유상우 에세이
자연으로 돌아가라
작가론과 작품론
좋은 문학작품이나 미술작품은 깊은 감동을 준다. 작가는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수많은 경험과 사색을 온몸으로 감내한다. 작가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작품의 감동은 배가된다.
이처럼 작품 자체를 맛보고 느끼며 어디에서 감동이 오는가 분석하는 것을 작품론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작가론은 이러한 작품이 쓰이게 된 작가의 삶과 사상, 배경 등을 탐구하는 영역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의 위 시는 아름다운 서정시이자 사랑노래이다.
한 사내가 연모하는 여인을 생각하며 눈이 내리는 날 소주 한잔에 불콰해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왠지 모르게 쓸쓸하면서 못다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들이 배어나온다.
백석이 그린 나타샤는 그가 학교선생이었을 무렵 만난 여인이다. 백석은 그녀를 자야라고 불렀다. 백석은 집안에서 강권한 여인과 혼례를 올리지만 자야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만주로 함께 떠나고자 하지만 결국 혼자 만주를 떠돌다가 자야와 영영 이별을 하게 된다.
백석이 만주를 떠돌다가 쓴 시편들은 떠돌이 특유의 진한 향수와 그리움들이 배어나온다.
결국 백석은 분단과 함께 이북에 남게 되고 김자야여사는 우리나라에서 대원각이라는 곳을 열어 많은 부를 축적한다. 훗날 불교에 귀의하여 대원각을 보시하는데 대원각이 지금의 길상사이다. 그리고 창비출판사에 얼마간의 돈을 기부하여 지금의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게 되었다. 생전에 자야여사는 백석의 생일에 음식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눈이 오는 날 길상사 마당에 한줌의 재로 다시 돌아갔다.
10년 전에 조계종 총무원에 근무할 때 길상사를 종종 갔었다. 성북동 골짜기에 자리 잡은 길상사는 참으로 예쁜 곳이었다. 길상사에 갈 때면 자야여사께 합장을 하곤 했다.
문학예술의 작가론과 작품론은 그대로 우리 술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술만을 시음평가하면 그것은 작품론이다. 술의 작품론과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 이 술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고 만든 장인의 어떤 이야기가 들어갔는지를 살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예술로 치면 작가론이다.
이것을 스토리텔링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술에서 작가론 영역을 보다 심화하고 확대하는 방향이 필요하다.
술 품평회에서도 술의 작가론에 대한 품평과 배점이 들어가야 한다. 또한 소비자를 대상으로 술맛과 함께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방식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맥주는 알코올과 홉의 쓴맛과 색들이 다 계산이 된다. 술이 과학화될수록 술맛은 수치화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을 보며 나는 계산된 영역을 가진 맛(작품론)보다 술이 태어난 배경과 환경을 논하는 것이 훨씬 우리 술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모던보이들은 맥주를 마셨을까?
20세기 초에 도입된 모더니즘은 봉건적인 모습을 타파하고 신문명을 추구하는 사조다.
개화기의 전기, 기차, 전화 등의 신문물과 새로운 사조는 근현대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우리나라 술에서 모더니즘의 활성화는 1970년대 후반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전까지 우리는 주로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의 출고량이 최대치를 찍은 것은 1970년대 후반이다. 그러나 이 당시 맥주도 급격하게 출고량이 늘어나다가 결국 1980년대 막걸리를 누르고 최대의 출고량을 자랑하는 술이 된다.
이 시기는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이 변하기 시작했으며, 이촌향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집중했던 때이다. 농촌에서 들일을 하며 막걸리를 마시는 것과 함께 대도시에서는 수많은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들이 맥주잔을 잡는 시기였다.
맥주공장은 막걸리공장과 다르게 거대한 생산체계를 갖추었으며, 서구미녀들을 비키니 차림으로 화보에 등장시켰다. 갈수록 사람들은 텁텁한 막걸리보다 깔끔하고 모던한 맥주를 찾기 시작했다.
맥주와 함께 살펴볼 것이 또한 소주이다. 소주 또한 삼겹살이나 육류소비가 늘어남과 함께 맥주와 더불어 우리나라 주류시장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 잡는다.
우리 술의 포스트모더니즘
호프집 혹은 주점들은 세련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으며, 젊은이들의 감성과 결합하여 더욱 번성을 구가하였다. 이러한 거대한 질서를 해치고 우리 전통술이 문화재 혹은 전통주의 명목으로 다시 귀환하였다. 또한 2000년대 초반 백세주와 산사춘이 돌풍을 일으켰으며, 그 뒤를 이어 수입 와인과 위스키가 시장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다.
IMF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으로 경제난이 닥치면 막걸리가 부활하기도 했다. 그리고 프리미엄급 막걸리와 약주 류가 출시되고 있으며, 서울을 중심으로 전통주가 새로운 트렌드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의 사케가 또한 상륙했다.
그리고 현재는 크래프트맥주 바람이 거세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소주와 맥주 양강 구도이다. 특히나 경제가 어려우면 소주와 맥주의 양강구도는 더욱 고착화된다.
근대화 및 산업화를 한참 이루었던 1970년대 소주와 맥주의 출현과 번성은 막걸리로 대표되던 봉건문화의 쇠퇴를 의미한다. 또한 우리 술사에서 모더니즘(구조주의)이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대량생산체재와 소비 그리고 근대화된 주점들과 문화들이 도시마다 넘쳐난 것이다.
이후 88년 올림픽을 전후한 시기는 소주와 맥주로 획일화된 주류시장을 비집고 지역을 반영한 개성 있는 술들이 탄생한 시기이다. 물론 경제력이 당연히 뒷받침되었으며, 획일화된 산업화시기를 넘어 개성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던 유렵과 미주사람들이 올림픽을 보러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해외여행자유화 조치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고 풍요한 일본과 유럽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87년 6월 항쟁은 가부장적 권위와 시스템을 무너뜨렸다. 젊은이들은 자유분방한 에너지를 발산했으며, 그러한 상상력과 저변이 한국 대중문화를 전 세계에 퍼뜨리는 한류로 바꿔내었다. 거기에 IT강국을 만들어서 보급력을 빛의 속도로 변화시켰다.
독재와 가부장제, 개성의 파괴, 급속한 산업화가 만든 병폐 등 구조주의(모더니즘)가 가진 나쁜 이면들이 새롭게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술에도 반영된다. 88년 올림픽을 전후한 시기에 우리 술은 후기구조주의(포스트모더니즘)로 들어서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막걸리는 달다. 이는 모더니즘(산업화) 이전에 단음식이 귀했던 시기의 맛이 그대로 넘어왔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그러나 현재는 지천이 단음식이며 단 전통주는 현재의 음식과 궁합도 맞지 않는다. 더군다나 고문헌에서만 우리 전통술을 찾는다면 우리 술은 달 수 밖에 없다. 또한 전통주학원들이 고문헌에 의존하여 우리 술의 전형을 강조하다보면 현재의 시장에 제한적 경쟁력을 가진 달달한 술들이 우리 전통주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고문헌이 이렇다고 해서 꼭 그것을 따를 필요는 없다. 이를 현대에 맞게 계승하고 개성 있게 발전시키는 작업이 더 필요해 보인다.
필연적으로 우리 술의 외연과 심연을 확장하려면 농업에 그 근간을 두어야 한다.
농업이 가진 본래의 힘을 자연스럽게 술에 풀어내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모범을 가진 곳이 송명섭막걸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 글쓴이 유 상 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