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첫사랑

권녕하 칼럼

 

첫사랑

 

권 녕 하

시인, 문화평론가,《한강문학》발행인

 

 

한 세대 전, 한 동네에 “술이 빠진 밥상은 안 받는다”는 집이 있었다. 그 집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그 집 아이는 술 주전자 달랑달랑 손에 들고 신작로 옆 대폿집에 달려가서 술 받아 오는 일이 아주 중요한 ‘심부름’이었다. 그 아이는 그 심부름을 아주 즐겁게 해냈다. 오늘도 해가 뉘엇지기 시작하자 어김없이 그 아이가 신작로를 향해 달랑달랑 뛰어가고 있었다. 어떤 날은 두 번씩 뛰어가기도 했다. 그런 날은 술심부름하다 신작로에 술을, 막걸리를 흘린 날이다. 그 집 어른이 호통을 치기라도 했는지, 또 휑하니 뛰어가는 그 아이 손에는 영락없이 또 막걸리 술 주전자가 들려 있곤 했다.

 

잽싸게, 눈치껏, 빨리, 심부름 하느라 저지른 실수여서인지 별로 야단맞는 기색도 없었다. 그런 그 아이에게서 어느 날 시큼한 냄새를 맡게 된 것은 아주 우연이다. “너 술 먹었니?” “응 물 인줄 알고~ 먹었는데, 술이야!” 제법 혀 꼬부라진 목소리가 꼭 그 집 어른 같았다. 학교 갔다 와서 목이 말라 부뚜막 위에 걸린 주전자 주둥이 입에 대고 쭈욱 빨아먹었는데, 술이었다는 것이다. “야~ 너! 술도 먹을 줄 아는구나?” 그 아이가 그 때 아주 대견스러워 보였고, 왜 그랬는지~ 덩달아 으쓱해졌던 그런 알쏭달쏭한(?) 기억이 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집을 “오장집”이라고 불렀다. 긴 칼 차고, 말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 집을 피해 다니는 것 같았다. “그 집 아이하고 친하니?” “그냥~ 같은 반이 됐어” “그 집에 놀러가지 마라!” 그래서, 부모님 몰래 한번 갔다가 못 볼 것을 많이 보고 만다. 현관문을 들어서자 긴 복도 끝 벽에, 무섭게 생긴 순록이 눈을 빨갛게 뜬 채 뿔로 찌를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루에는 시커멓고 매끄럽게 생긴 피아노를 본 것이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결국, 집에 와서~ “학교에 있는 풍금하고 얼마나 달라?” “뭐가?” “피아노!” 그래서 들키고만 기억이 아직도 쑥스럽다.

 

그런데, 한세상 살도록 그 기억이 그렇게도 선명한 것은~ “에이, 술 한 잔 마신 길에, 사실대로 고백해야겠다. 사실은 술 때문도 아니고, 피아노 때문도 아니야. 그 집에 사는 그 아이를~ 고3때 버스에서 마주쳤는데! 이런! 구찌베니 쌔 빨갛게 바르고, 다리 허옇게 드러내놓고, 굽 높은 삐딱구두신고, 머리는 고데해서 틀어 올렸어. 얼굴엔 뭘 발랐는지 화장품 냄새는 진동을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못 본 척 했지. 아! 그 아이? 계집애였어. 왜? 계집애하고 놀면 안 돼?”.

 

그 때, 그 집 그 아이 엄마를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 동네사람들과 왕래가 없는 비밀스럽고 베일에 가린 집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 아이 외삼촌이 그 아이의 엄마를, 어깨에 매달고 헤엄쳐서 현해탄을 건너갔다고 한다. 수영선수였다나? 그 동네에 수군대며 떠돌던 소문이었다. “말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해야겠다. 그 아이가~ 내 첫사랑이었다! 에이~ 술 다 깨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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