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우 교수의 특별기고
불타는 물, 음수사원(飮水思源)의 정신<下>
‘음수사원(飮水思源)’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심산유곡 밭 가운데로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노인은 시냇물이 흐르는 개울가에 수차(水車), 즉 물레방아를 만들어 마을사람들이 가져오는 벼를 찧어주고 거기에서 나오는 약간의 사례금으로 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매일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지만 노인의 생활은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매우 만족해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일이 늘어나 다른 날보다 돈 몇 푼을 더 벌게 되자 노인은 기분이 좋은 나머지 벼를 찧는 절굿공이와 절구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는 물레방아 앞에 쪼그리고 앉아 벼를 찧는 절굿공이를 바라보면서 자기의 감사한 마음을 중얼거리면서 이야기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절굿공이와 절구가 고마워 견딜 수 없었다. 만약 이들이 없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이런 좋은 생활을 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종이돈(紙錢)을 싸서 경건하게 절구와 절굿공이 앞에서 향을 피우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했다. 며칠이 지나 그는 갑자기 절굿공이가 하는 일은 물레방아가 돌아가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을 깨달았다. 만일 물레방아가 없었다면 절굿공이도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급히 음식을 준비하고 술을 데워 상(床)을 차려놓고 이번에는 물레방아를 향해 감사의 절을 올렸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느낀 것이 있어 물레방아를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물레방아는 어떻게 해서 움직이는 것일까? 노인은 물소리를 듣고 물레방아 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물레방아 위로 올라가 시냇가에서부터 물레방아를 향해 졸졸 흐르는 물을 보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만일 물이 없고 물레방아만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쌀만 있고 불로 끓이지 않으면 밥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이 절구와 절굿공이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므로 정말로 감사의 절을 하려면 모든 동작의 근원이 되는 물에게 절을 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비로소 노인의 눈에 모든 것이 제대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마침내 세상사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정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백독지장(百毒之長)’ 또는 ‘백약지장(百藥之長)’의 야누스로 변하기 십상이다. 허신(許愼)의『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술 주(酒)’자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酒 就也. 所以就人性之善惡. 從水酉. 一日造也. 吉凶所起也. 古者儀狄作酒醪. 禹嘗之而美. 遂疏儀狄. 杜康作秫酒”라 하여 술이라는 ‘주’(酒)자는 나아간다는 뜻의 ‘취’(就)와 그리고 만든다는 뜻의 ‘조’(造)를 뜻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술은 인성을 선한 쪽(吉)으로 가게도 하고, 악(凶)한 쪽으로 가게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흉(凶)은 바로 ‘百毒之長’이며, 길(吉)은 곧 ‘百藥之長’을 의미한다.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 술에는 양면성이 있어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 하기도 하고 ‘백독지원(百毒之源)’으로도 일러 왔다.이 말은 왕망(王莽, 기원전 45~기원후 25)이 내린 조(詔)의 초두(初頭)의 한 구(句)다. 즉, ‘소금은 식효(食肴)의 장(將), 술은 백약(百藥)의 장(長), 가회(嘉會)의 호(好), 철은 전농(田農)의 본(本)’에서 나온 말이다. 전한과 후한 사이 14년간의 황제 왕망이 경제 정책에 철저를 기한 것으로, 그 발단은 역시 술과 기이한 인연이 있다.
그러나 다소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이다. 전한의 원수(元壽) 2년, 애제(哀帝)가 죽자 그 외척에 의해 조정을 쫓겨난 왕망이 다시 대사마(大司馬)의 대권을 쥔 최고관이 되어 돌아와 어린 평제(平帝)를 세웠다. 당시 사회는 말할 수 없을 만큼 궁핍했다. 왕망은 자기 딸을 평제의 후(后)로 삼았는데, 불로장생의 약주인 초주(椒酒)를 먹게 하여 12세의 평제를 독살하고는 다루기 좋은 두 살짜리의 어린 임금을 세워, 스스로 가황제(假皇帝)라 일컬으며 드디어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술은 백약의 장’의 출처에는 이와 같은 흔한 이야기가 들어 있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그 피는 씻겨 없어지고 후세 사람들에게는 음주를 위해 편리한 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술의 다른 이름인 ‘미록(美祿)’은, 술은 하늘이 내려 준 아름다운 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야누스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백독지장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또한 중국 한(漢)나라 때의 역사책『사기(史記)』에 나오는 ‘주유성패(酒有成敗)’란 말은 술의 양면성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약이 되기도 하지만 병을 주기도 한다든가, 흥하게 하기도 하지만, 망하게 하기도 한다든가, 안될 일을 되게 하기도 하지만 될 일을 안 되게 한다든가 하는 술의 양면적 속성들이 모두 이 한 마디에 함축돼 있다.
술 주(酒)자의 훈칭은 ‘익을 유(酉)’, ‘성숙할 유(酉)’이다. 결국 술이란 항아리 속에서 오랫동안 익힌 액체이므로 물 수(水字)변에 유(酉字)를 합하여 물이 항아리에서 익은 술 주(酒)자가 형성된 된 것이다. 재료에 따라 독특한 향내와 함께 그 맛이 쓰다. 또한 의(醫)자와 주(酒)자에 공통적으로 쓰여진 유(酉字)는 항아리 모양으로 ‘약병’이라고도 하고 ‘술병’이라고도 한다. 의(醫)라는 글자의 윗변 글자는『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무(巫)의 추한 모습을 묘사하는 상형(象形)이다. 그리고 밑변은 술(酒)이다. 의(醫)는 곧 술 마시고 춤추며 병을 고치는 무당의 모습이다. 제사는 정신이다. 이 정신적 향연에 술이 없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술이란 또 사람의 병을 고치는 약이었다. 의원 의(醫)자는, 화살에 맞아 몸 속(匚)에 화살(矢)이 있거나, 몽둥이로 맞았을(殳) 때 술(酉)로 소독하고 마취를 시킨 데서 유래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술이 병도 치료한다고 믿었다. 또 다른 해석에서는 상자(匚) 속에 수술 칼로 사용되는 화살촉(矢)과 수술 도구를 들고 있는 손(殳), 치료제인 술(酉)이라고 한다. 그래서 ‘술은 모든 약의 우두머리(酒, 百藥之長也)’라고 하지 않았는가.‘음수사원’의 의미와 유사한 성어 중 ‘물망재거(勿忘在莒)’가 있다. ‘물망재거’란 거(莒) 땅에 있었던 고난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즉 어려웠을 때를 잊지 말고 항상 경계하라는 말로서 <여씨춘추(呂氏春秋)>‧<사기(史記) 전단열전(田單列傳)>에 나온다. 이 성어는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의 한 사람인 포숙아(鮑叔牙)가 한 말에서 유래한다. 춘추시대 초엽에 제(齊)나라 군주 양공(襄公)이 노나라 환공(魯桓公)을 술에 취하게 하여 죽이고 그 부인과 사통하였고, 주살한 것이 여러 차례 이치에 맞지 않으며 여자들에게 음란한 짓을 하고 대신들을 여러 번 속이자, 여러 동생들은 그 재앙이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 외국으로 피했다.이때 둘째 왕자인 규(糾, 양공의 배다른 동생)는 노나라로 달아났다.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이 보좌하고 있었다. 다음 동생 소백(小白, 후에 환공桓公)은 거(莒) 땅으로 달아났는데, 포숙아(鮑叔牙)가 그를 보좌했다. 양공이 배다른 동생 공손무지(公孫無知)에 피살되고 공손무지도 곧 원한을 품은 사람에게 피살되었다. 이에 제나라 대부들은 다른 나라로 피신한 왕자 중 먼저 제나라에 돌아오는 왕자를 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거(莒) 땅에 있던 소백이 가장 먼저 제나라에 들어와 왕으로 추대되니 곧 환공(桓公)이다. 왕자 규를 보필하던 관중은 포숙아의 노력으로 재상이 되었다.<여씨춘추 23권 직간(呂氏春秋卷第二十三二曰直諫)>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어느 날 제환공이 관중, 포숙아, 영척과 함께 주연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환공이 포숙아에게 축수를 부탁했다. 이에 포숙아는 술잔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주공께서는 거(莒) 땅에 피신하여 있던 일을 잊지 말아 주시고, 다정한 벗 관중도 노나라에서 묶인 몸을 풀고 제나라로 돌아올 때의 고난을 잊지 말고, 영척도 왕년에 마차 아래서 당했던 재난을 잊지 말 것을 바랍니다.” 환공은 이 충언을 잊지 않고 새겨 제나라를 훌륭하게 이끌고 제후들의 패자가 되었다.또, 전국시대 말엽 연(燕)나라의 소왕(昭王)은 전날 제(齊)나라에 패한 원한을 풀려고 악의(樂毅)를 상장군으로 삼아 다섯 나라의 병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치게 하여 제나라 수도 임치와 칠십여 성을 함락 시켰다. 제나라는 거(莒)와 즉묵(即墨) 두 성만을 지키고 있고, 제나라 민왕(湣王)도 피살 되었다. 이때 제나라 장수 전단(田單)이 비상한 지혜와 군사적 재능으로 연나라를 깨뜨리고 구사일생으로 제나라 지켜 냈다. 이후 제나라에서는 국왕이나 지배층이 해이(解弛)할 때마다 ‘물망재거’의 교훈을 거론했다.세월이 흘러 ‘물망재거’라 씌어 진 장개석 총통의 친필로 된 돌비가 중국 대륙과 타이완 사이에 있는 진먼다오(金門島) 요새 위에 있다. 진먼다오에 세워진 돌비는 결국 다음과 같은 것을 호소하고 있다. “국민당정부(國府)는 이제 타이완과 그 주변의 작은 섬에 묶여 있지만, 결국 제나라가 그러했듯이 대륙을 회복해야만 한다. 꼭 그러할 것이다. 한시라도 대륙 회복의 염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꿈인 것만 같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은 김구 선생의 좌우명으로 하셨던 말씀이기도 하다. <청오회(靑五會)>는 1966년에 설립됐다. ‘靑五’는 청와대와 5·16을 연상하게 한다. 회원은 400여 명의 정수장학회 대학·대학원 장학생들로 구성돼 있다. 현재 전국 10개 시·도에 지부를 두고 있다. 각 지부에는 정수장학회 출신이자 상청회 회원인 대학교수 한 명이 배치돼 지도하고 있다. 청오회 회원들은 학술 연구, 후배 양성, 사회봉사 등의 활동을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7년 3월 청오회 회원들의 소식지 ‘청오지’가 창간되자 친필 휘호인 ‘음수사원’을 보내줬다. 다음 작품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청오지(靑五誌)> 창간호를 기념해 내린 휘호다.
정수장학회 출신 장학생들은 촘촘한 점조직으로 연결돼 있다. 대학·대학원 재학생들은 ‘청오회’, 사회에 나오면 ‘상청회(常靑會)’ 회원으로 활동한다. 먼저 상청회는 정수장학회 장학생 출신들의 친목 모임이다. 학교로 따지면 ‘동문회’인 셈이다. 상청회의 한자 뜻을 보면 ‘늘 푸르게’ 또는 ‘항상 청와대를 생각한다’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청와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상청회 회원들은 3만 8000명에 이른다. 전국 시·도별로 12개 지부가 결성돼 있으며, 매년 정기·비정기 모임을 열어 친목을 다지고 있다. 설립자(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방문, 체육대회, 가족한마당, 등산 등을 정례적으로 개최하며 연말에는 정기총회와 송년회도 갖는다. 회원들의 결혼·승진·영전 등도 챙기는 등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