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미국의 금주법이 남긴 것

김준철의 와인교실(44)

 

미국의 금주법이 남긴 것

 

김준철 원장 (김준철 와인스쿨)

 

 

미국의 금주운동은 1830년대와 1840년대 이 나라를 휩쓸던 개혁에 대한 열망으로 시작되었다. 노예제도 폐지와 투쟁하고 있던 노예해방론자들은 음주를 노예제도와 같이 근절해야 할 해악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수많은 금주 단체가 생기기 시작했고,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단체는 1873년에 설립된 ‘기독교여성금주연맹(Woman’s Christian Temperance Union, WCTU)’과 1893년에 설립된 ‘안티살롱연대(Anti-Saloon League)’였다.

 

이들은 단순한 금주운동에 그치지 않고, 헌법을 개정하여 주류의 제조와 판매 그리고 운반을 금지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에 뜻을 같이하는 유권자 층과 동맹을 맺고, 끈질긴 금주 로비 활동을 벌였다.

결국, 1917년 12월 전국적인 금주법을 시행하기 위한 ‘제18차 개정헌법’이 양원에서 통과되었고, 1919년에는 제18차 개정헌법을 시행하기 위해 ‘볼스테드 법’을 통과시켜, 0.5% 이상의 알코올음료를 불법으로 규정하면서 금주 시행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확정지었다. 이 법안은 1920년 1월 17일 오전 12시 1분에 효력을 발생하여, 미국은 공식적으로 번복할 수 없는 금주국가가 되었다.

준비 안 된 금주법의 시행

 

금주법의 시행은 예기치 못한 사건을 많이 만들었다. 제18차 개정헌법은 술의 제조, 판매, 운반을 금하지만, 술을 보관하거나 마시는 것은 불법이 아니었다. 볼스테드 법은 금주법을 실행하기 위한 연방법이었지만, 금주법을 피해 갈 수 있는 맹점이나 별난 사항이 많았다. 금주법의 합법적인 예외조항 중 하나를 보면, 약사는 불안증부터 유행성 감기까지 수많은 질병에 대한 처방으로 위스키를 처방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다. 의사들은 의료용으로 위스키 처방전을 날려 4,000만 불을 벌었으며, 밀주업자들은 이를 재빨리 알고 약국으로 달려가 합법적으로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또 와인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획득할 수 있어서, 교회, 유대교당 등의 등록이 증가하였고, 스스로를 랍비라고 하는 사람들도 와인을 구할 수 있어서 이들의 숫자도 크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금주법 이전에 제조된 술은 폐기할 필요가 없었다. 단속이 나오면 금주법 이전에 제조했다고 핑계를 댈 수 있었다. 또 고위 정치인들은 외국 대사관에 가서 음주를 즐기고 나올 수 있었다.

또한, 이 법은 가정에서 와인을 양조하는 데 불분명했다. 한 가구당 연간 최대 200갤런(750㎖로 약 1,000병)의 와인이나 사이다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캘리포니아에서는 처음 5년 동안 오히려 포도밭이 더 증가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미국의 포도업체는 농축주스 형태의 키트를 만들어서 오래 두면 발효되어 술이 되므로 불법이라는 경고문을 붙였는데, 사실은 와인 만드는 법을 설명해 준 안내서 역할을 했다.

또 가정용 증류기는 불법이었지만, 미국인들은 이를 철물점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었고, 증류 방법은 공공 도서관에 가면 농림부에서 발행한 팸플릿에 다 적혀 있었다. 미국인들의 음주를 막는 금주법은 점차 그들을 양조 전문가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밀주의 거래는 공중보건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밀주 제조는 갈수록 수익성이 좋아서, 갈수록 밀주의 품질은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연방정부는 공업용 에틸알코올을 사용하여 불법 음료를 생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공업용 에틸알코올에 메틸알코올을 첨가하여 변성하였다. 금주 기간 중 이런 불량 주류를 마시고 매년 1,000명의 미국인이 사망하였다.

 

볼스테드 법 집행 업무를 맡은 세 개의 연방기관은 해안 경비대, 국세청, 법무부였지만, 인력과 예산 부족으로 금주법 기간 중 연방이나 각 주 그리고 지방이든 금주 단속사무국은 타락하기 시작했다. 경찰관과 금주 단속요원은 뇌물이나 수익성이 좋은 밀주 제조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었다. 그리고 금주법 기간 중 불법 주류 거래의 증가는 수백만의 미국인을 범죄자로 만들었다. 10년이 지나자 법정과 감옥은 사람으로 넘쳐났으며, 이 법을 유지하기 위한 법률적인 체계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금주법으로 기소된 사람은 판정까지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예상치 못한 경제적 타격

 

전반적으로 초창기 금주법으로 인한 경제적인 효과는 부정적이었다. 맥주 공장의 폐업, 증류 공장과 술집의 폐업으로 수천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나무통 제작업자, 트럭 운전사, 웨이터, 기타 이와 관련된 수천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금주법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부의 세수 감소였다. 연방정부는 총 110억 불의 세수가 사라지고, 반면 금주법을 유지하는 데 3억 불이 소요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농민들이었다. 곡물 가격이 급격히 내려간 것이다. 1929년 주식시장이 붕괴하기 2년 전에 농민들은 밭에 있는 곡물을 그대로 태워버렸다. 수확하여 파는 것보다 더 싸게 먹혔기 때문이다. 이 곡물은 위스키와 맥주를 만드는 데 쓰였던 것이다.

 

불법 주점(Speakeasies) 시대

 

알코올음료를 판매하는 불법 주점인 스피크이지(Speakeasies)는 1920년부터 1933년까지 미국의 금주시대에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살롱은 단순하게 지하실, 다락방, 위층으로 잠입하거나, 카페나 청량음료점, 오락실로 위장하였다. 불법 주점은 손님들에게 음악을 제공하였고, 수많은 재즈 음악가들은 쉽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한 재즈 거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재즈는 흑인 음악가들과 대부분의 백인 관객을 결합시켰다. 맥주와 와인을 마시던 곳이 이제는 운반이 쉽고 공간을 적게 차지하는 독한 술을 팔기 시작했다. 이때 칵테일이 탄생하는데, 금주령 이전에는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보기에는 청량음료이지만, 테이블 밑에는 독한 증류주가 있었다. 그러나 더한 것은 이들이 고객에게 새로운 쾌락인 마약을 소개한 것이다. 마약, 대마초 그리고 마리화나 등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금주법이 폐지되고 나서 금주 단속요원은 그대로 마약 단속요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범죄조직의 성장

 

이 많은 불법 시설에 맥주, 와인 및 독한 술을 공급하려면 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에 범죄조직이 탄생하게 된다. 여기에 개입한 시카고의 ‘알 카포네’는 매춘과 밀주, 밀수, 도박장 등의 사업 다각화를 통해 1927년에는 1억 달러에 이르는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사업은 금주 시대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이룬 것으로 그는 ‘금주법의 최대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대형 불법 주점은 범죄조직에서 설립하고 운영되었으며, 이들은 고급 나이트클럽에서 어둡고 연기 자욱한 지하실의 술집까지 모든 것을 관리하고 있었다.

 

교훈

 

금주법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금주법의 좋은 점보다는 예기치 않았던 문제가 훨씬 심각했다. 여기서 배워야 할 점은 두 가지가 겹쳐 있다.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점보다 해결책이 더 나쁜 방향으로 가버린 점을 유념해야 하고, 그 뜻이 고귀하든 아니든 헌법은 실험 대상이 아니라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 마이클 러너, 역사학자(By Michael Lerner, historian)

 

 

필자:▴김준철와인스쿨(원장)▴한국와인협회(회장)▴고려대학교 농화학과, 동 대학원 발효화학전공(농학석사),▴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프레즈노캠퍼스 와인양조학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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