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망령 팸투어 참관기
太行至尊, 어디서나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왕망령(王莽岭)
먼동이 트기엔 아직 이른 새벽, 일출을 본다는 생각에 선잠에서 일어난다. 하늘엔 영롱한 별들이 금시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다. 하현달이 눈인사를 보낸다.
어제 질척거리며 내린 비 때문일까. 아니면 호텔이 위치해있는 지점이 산 중이어 일까. 초여름답지 않게 찬 공기가 옷깃을 여미게 했다.
숙소인 와룡산장(臥龍山莊)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한참을 오르니 거의 정상부분에 다다랐다.
태행석림(太行石林)지대를 지나면 왕망령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관일 대(观日台)가 나타난다. 장관이다. 아직 해가 솟기엔 이르다. 잠시 어둠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면서 동쪽 하늘이 서서히 붉은 빛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와~ 하는 탄성들이 절로 나온다. 어떤 이들은 사진 찍기에 바쁘고 또 어떤 이들은 힘차게 솟는 해님을 바라보며 소원성취를 빌기도 한다.
관일대 아래는 무수한 영봉들이 햇빛을 받자 보란 듯 자태를 뽐내기 시작했다. 어둠에 가렸던 검은 자태와는 사뭇 다르다. 깎아지른 절벽을 이룬 영봉들이 평풍을 친듯하다.
한 여름 평균 기온이 22℃ 정도로 피서지로도 적격이다. 때문에 금나라와 원나라 시기 문학 명인 원호문(元好問)은 ‘淸凉의 聖境’라고 했을 정도다.
왕망령 풍경구는 왕망령(王莽岭) 석애구, 곤산(昆山), 유수성 의 큰 네 개의 관광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시 성 지역 자원개발 회사인 란화(兰花)그룹이 2003년부터 개발을 시작했다고 한다.
총 면적 150,000,000m2 의 광대한 면적에 펼쳐진 최고 해발 1,700여 미터에 달하는 깎아지를 듯한 절벽, 굽이굽이 늘어선 기이한 능선과 봉우리들이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며, ‘남해항 최고봉’, ‘무릉도원’, ‘태항지존(太行至尊)’ 등으로 불린다.
특히, 일출과 운해, 송도(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려 파도치는 듯한 소리가 나는 현상), 괘벽공로(거주 원주민들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산을 파내서 만든 도로)는 왕망령 풍경구의 4대 장관으로 손꼽힌다.
모택동 주석의 비서이자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유명작가 리예(李锐)는 왕망령에 자주 오르며, 그 아름다움을 아래와 같은 시로 표현 하였다.
부등왕망령(不登王莽嶺)/ 기지태항산(豈識太行山/ 천하기봉취(天下奇峰聚)/ 하수오악반(何須五嶽攀) 왕망령에 오르지 아니하고, 어찌 태항 산을 안다고 하리, 천하의 기봉을 취하고서야, 감히 오악을 올랐다하리.
왕망령은 중국 산시 성(山西省) 진청(晋城) 링촨현(陵川縣)의 동쪽 40㎞지점에 위치한 고개가 왕망령이다.
이 지역은 최고 해발이 1665m, 최저 해발이 800m인 높고 낮은 50여 개의 산봉우리로 조성되어 있다. 치쯔산(棋子山), 과비도로(挂壁公路)와 시야거우(锡崖沟) 등을 포함하고 있다는 풍경구로서 풍치지역인 황투고원(黄土高原)과 중저우평원(中州平原)은 지진대에 속한다.
무관치 않다고 한다.
왕망은 신(新)나라를 건설했다. 초기엔 총명한 머리로 백성을 잘 다스려 태평성대를 누리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시간이 지나면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인가. 세월이 흐르자 총명함은 사라지고 게으르고 정사는 제쳐놓고 주색에 빠지기 시작한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원성이 자자해지자 신하 중에 유수라는 사람이 임금 몰래 백성들을 위해 일을 시작했다. 자연히 백성들은 유수를 칭송하게 이른다.
그러던 중 주색에 빠졌던 왕명이 정신을 차리고 본래대로 정치를 하려 했지만 민심은 왕명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는 백성들이 유수를 따르고 자신을 배척하자 왕명은 유수를 제거 하려 절벽 아래로 밀어버렸다. 죽은 줄만 알았던 유수는 나무에 걸려 목숨을 건져 백성들과 힘을 합쳐서 왕명을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운 나라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즉, 유수다.
왕망은 후한을 세운 유수(광무제)를 제거하려 하자 유수는 태항산으로 도망을 쳤다고 한다. 이에 왕망은 80만 대군을 이끌고 그를 쫓아와 오늘날의 왕망령에 진을 치고 유수와 결전을 벌렸다고 해서 왕망령이라 불리게 됐다고 전해진다.
왕망은 광무제에 패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만은 영원히 남아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왕망령풍경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관광코스 중 하나가 괘벽공로(挂壁公路)다. 이 괘벽공로는 그 동안 많은 언론매채들이 기사화 한 곳이기도 하다.
산비탈 절벽을 횡으로 뚫어 긴 동굴을 만들고 줄지어 창문을 낸 터널인데 이 지역 사람들은 외지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머나먼 산길을 돌아야 만 했다. 그래서 지역 주민 9명(어떤 사람은 13명이라고 한다)이 터널을 뚫자고 의기투합했다. 동네 사람들은 미친 짓이라며 눈 여겨 보지도 않았다. 중장비가 있을 턱이 있겠는가. 손으로 터널을 뚫기를 11년, 1.25㎞에 이르는 터널이 마침내 뚫렸다. 그 때서야 주민들은 자손만대 길이길이 빛나라고 ‘빛나리 길’로 명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관광객들에게는 ‘비나리길’로 더 유명하다. 이는 2009년 이 길을 처음 알아내고 관광 상품으로 만든 비나리 여행사가 자사 상호를 그 대로 붙여서 사용 한 것이 그대로 굳어져 비나리길이 되었다.
일명 개미길이라고 불리는 괘벽공로(掛壁公路)는 중국의 8대 기적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진시황의 만리장성과 수양제가 건설한 경황 대수로와 더불어 중국의 3대 토목공사 가운데 하나다.
‘비나리길’에서 석창(石窓)밖 풍경을 보고 있으면 그 옛날 이 굴을 뚫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얼마나 많은 고색을 했을까. 자기의 재산까지 모두 팔아 공사 도구를 마련한 결과 많은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준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괘벽공로(挂壁公路)는 석애구(锡崖沟)와 천계산(天界山) 등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코스에도 있는데 이 길 역시 모든 공사를 손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이번 팸투어는 석애구(锡崖沟)와 천계산(天界山) 등을 둘러보는 것으로 공식 일정을 마무리했다.
왕망령에서 서남쪽 산기슭에 있는 석애구로 향한다. 석애구는 해발 1000m 지점에 위치하지만 지형이 평탄하여 세외도원(世外桃源)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산골마을이다. 석애구 마을은 최근 한국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예전에는 사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독특한 지형 때문에 마을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 외부세계와 소통이 단절되었던 곳이라 했다. 바깥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이곳 출신 한 독지가가 자금을 대서 1960년대 이후 굴을 뚫기 시작해 30년 만에 깎아지른 절벽에 7.5km의 도로를 건설했다.
괘벽공로처럼 터널 내부의 조명과 환기를 위해 절벽 쪽으로 커다랗게 뚫어낸 창의 모양이 제각각이어서 이채롭다.
석애구 조망대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경이롭다고 해야 할까. 천야 낭떠러지에 전망대를 설치한 자체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잠시잠시 눈을 감는 것도 도움이 될 만큼 깎아지른 절벽 위를 소위 빵차는 잘도 달린다.
빵차(전동카)를 타고 천계산을 360° 돌면 원래 승차 했던 장소로 돌아오게 되는데 관광하는 전망대가 7개나 된다. 이 산 이름을 천계산이라 명명한 것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왜냐 하면 하늘과 산의 경계가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 트레블비즈 임병연 대표는 공식 일정 말미에, “이번 팸투어를 통해, ㈜ 트레블비즈는 중국 지역/ 관광지 전문 홍보/ 마케팅 회사로서 그 전문성을 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고, “한국 내에서 태산과 태항산(왕망령, 태항산 대협곡)에 대한 인지도 상승과 실제 송출객 증가에 큰 공헌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원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