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황진이가 사랑한 서경덕의 술과 시심

 

황진이가 사랑한 서경덕의 술과 시심

박 정 근

(문학박사, 황야문학 주간, 소설가, 극작가, 시인)

박정근 교수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도학자이자 화담학파의 명조였던 서경덕은 절제를 잘하는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학문에 정진하기 위해 여성을 돌보듯이 함으로써 절제의 미덕을 지닌 인격자로 존경받았다. 그의 명성을 들은 황진이가 그의 지조를 꺾기 위해 유혹하였으나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술 실력과 풍류는 어떠했을까. 그는 한마디로 주량도 깊었으나, 결코 술에 취해 흐려지지 않는 군자의 멋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송도삼절로 꼽히는 황진이와의 일화와 당대 기록은 그의 술 실력은 잘 보여주고 있다. 서경덕은 평소 조용하고 학문에만 몰두했을 것 같지만, 의외로 술을 무척 좋아하고 잘 마셨다. 그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시를 읊으며 막걸리나 청주를 즐겼다고 한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아무리 마셔도 취한 기색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주량이 뛰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서경덕이 술을 마시는 모습은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술꾼들하고 달랐다. 그는 술을 마실 때 단순히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논하고 호연지기를 기르는 풍류의 도구로 삼았다. 술자리에서도 그의 브랜드 마크인 절제를 잘한다는 소문을 들은 황진이는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황진이가 서경덕을 유혹하기 위해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새 함께 술을 마셨다는 일화는 술꾼들에게 전해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황진이는 빼어난 미색과 더불어 당대 최고 수준의 한시와 거문고 연주, 그리고 화려한 말솜씨로 술을 권하며 그의 마음을 흔들려고 시도했다.

밤새도록 술상이 이어졌음에도 서경덕은 흐트러짐 없이 황진이의 시에 화답했다. 그는 거문고 소리를 감상하며 끝까지 담담하고 고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에 황진이는 그의 깊은 주량뿐만 아니라, 술에 취해도 정신과 지조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엄격한 자기 절제력에 감복했다. 술이란 유혹의 수단이 되기도 하고 절제를 시험하는 효과적인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술은 서경덕에게 마음을 어지럽히는 유혹의 매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술은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흉중을 터놓게 하는 도우미였다. 그는 음주의 도를 이렇게 정의한다. “술을 마시되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하고, 풍류를 즐기되 법도를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서경덕의 술 실력은 어떠했길래 황진이가 사랑하고 존경할 대상으로 평가했을까. 그는 음주의 덕목으로 단순히 몇 병을 마시느냐를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황진이가 발견한 서경덕은 술을 많이 마셔도 겉과 속이 모두 깨끗하고 단정했던 진정한 애주가였다.

서경덕은 황진이를 그리워하며 시조를 지어서 보낸다. 그는 구름이 잔뜩 끼어 흐린 날 그가 깊은 산속에서 거주하면서 강한 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낙엽이 낙하하여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혹시 황진이의 발걸음 소리가 아닐까 솔깃해진다. 이런 심정은 서경덕의 황진이에 대한 그리움에서 발원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리움의 정을 시로 써서 그녀에게 보낸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겹겹이 구름이 낀 산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서경덕의 그리움에 관한 시조에 대해 황진이는 화답하여 시조를 한 편 쓰게 된다. 이 시조는 술자리의 풍류와 떨어지는 낙엽마저 서로를 향한 마음으로 비유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낙엽과 바람 속에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이입시키고자 하는 연인들이 아니라면 쓸 수 없는 애틋한 시편이라고 볼 수 있다. 서경덕과 황진이가 서로에게 얼마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시를 통해 전해주고 있다.

서경덕에게 술을 권했던 황진이의 시는 과연 어떤 내용을 담았을까. 황진이는 서경덕의 시를 읽고 자신의 연심을 전하고자 한다. 어떻게 마음을 재현하는 것이 그녀다운 것일까. 황진이는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서경덕의 처소를 찾아갔다. 그녀는 서경덕에게 술을 한잔 권하고 시조를 한 편 지어 거문고 반주에 맞추어 노래한다.

그녀는 서경덕이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소리를 그녀로 착각하는 서경덕의 마음에 대해 감동하고 있음을 전한다. 하지만 그녀가 의도적으로 서경덕이 착각하게 만든 것은 아니라고 강변한다. 다만 자연물인 바람과 낙엽을 움직이는 능력은 없노라고 안타까움을 재현한다.

내가 언제 신의가 없어 임을 속였기에

달이 진 깊은 밤이 되어도 오실 기색이 전혀 없는가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잎 소리를 나인들 어찌하겠는가

 

황진이 또한 서경덕을 그리워하며 기다리고 있었음을 시를 통해 밝힌다. 다만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그녀로 착각하는 서경덕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황진이와 서경덕이가 주고받은 두 편의 시조는 그들이 얼마나 격조가 있는 사랑을 나누었는가를 느끼게 한다. 술이란 그저 지나치게 취함보다 술자리에서 즐기는 콘텐츠의 수준이 더 의미가 있다. 이후로 황진이는 술자리에서 서경덕의 고결한 인품에 감복한 후 그를 평생의 스승이자 정신적 연인으로 모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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