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녕 하 시인, 문학평론가 <한강문학> 발행인
춘도주도(春道酒道)
경기 남부 인근의 충남에 ‘음봉’이란 고장이 있다. 경기도 양수리 인근 한강수 북편에 ‘시우리’ 마을이 있다. 이 두 곳은 봄이 오면! 봄 꽃 사진을 찍으려고 늘 달려가던 곳인데, 공통점이 있다. 궁궁을을(弓弓乙乙)의 태극(太極) 형상의 지형에 바람風이 잠들 듯 고요하고, 햇볕 따뜻한 양지 녘에 사람 발길 닿지 않는 곳이었다. 토질은 발이 푹푹 빠지는 낙엽이 썩은 곳이거나 황토가 잘 배합된 수목이 자라기 좋은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두 곳은 위도 상 분명! 중부지방이지만 남쪽에서부터 봄꽃 소식이 시작되면 그 어느 곳보다 먼저 꽃이 피는 아늑한 곳이었다.
그 날도 전에 봐뒀던 칙칙한 산기슭을 향해 달려갔다. 과연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오우! 진달래가 화려하게 피어있었다. 연한 식물성(?)의 밝은 핏빛이, 여린 소녀의 피부처럼, 퇴락했던 산과 계곡의 경사면에 동맥정맥이 울긋불긋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는 오시는 임, 길 밝히듯 노오란 등(燈)을 촘촘히 매단 개나리꽃이 어둠 그늘 속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마을 어귀의 햇살 밝은 곳 혹은 담장 너머 그윽한 곳에는 매화 고목과 함께 꽃부터 불쑥 먼저 피어오른 목련이 해사했다. 마치 상복 입은 여인처럼 외면한 듯 곱게 여몄거나 처절하게 몸부림쳤거나 탱고 리듬에 꺾은 허리 휘돌리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대낮부터 북향화(北向花)로 처량한 척 했다.
강 마을에서~ 이빨 빠진 막사발에 한 잔술 벌컥 들이킨 날, 아슬아슬한 옷차림을 한 소녀가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 날은 장날이었다. 5일장이 서면 시골 아낙네와 할머니들이 봄소식을 들고 나왔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찬바람을 이겨내고 살아낸 봄소식을 싸들고 장터로 나왔다. 한량들은 이때다 싶어 주막을 점령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나누기에 분주했다. 그 때 시끌벅적한 장터 한 모퉁이에서 소녀를 본 것 같았다. 그리움이 쌓인 시간이 달려가고 있었다. 가슴 속에서. 그 날의 그 감성은 장터거리의 완만하게 흐트러진 분위기도 한 몫 했지만, 마을마다 술 익는 계절, 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춘분(春分)이 오면, 된장 띄우고 고추장 담고 닭장에선 병아리 산란하고 텃밭 매며 한결 누그러진 봄바람에 마음 설레던 춘정(春情)의 일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봄기운 붉게 취한 주막집에서였다. “어서~ 이제, 일어나세요. 그리고… 다신 오지 마세요.”
봄이 오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어린 새 생명들이 책가방 메고 학교 갈 때, 연민을 불러일으키던 그 소녀의 무릎엔 아직도 거뭇한 땟국물이 남아있는데, 몌별(袂別)의 소매 끝에는 지도처럼 얼룩진 흔적이 물들어 있는데, 강마을 나루터를 찾아 온 이른 봄날, 이른 봄꽃이 먼저 피는 이곳에서 꽃불 밝히며 스쳐간 소녀가 아롱지고 있었다. 소녀가 부르던 노래 “따옥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가 핏빛 진달래 노오란 등불에 출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