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남성들이여 ‘키친드링커’를 아십니까?

명의에게 묻다(5)

 

다상중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許成泰 원장

남성들이여 ‘키친드링커’를 아십니까?

비난 받을까봐 방치되는 ‘여성알코올중독’ 해결방법은 없을까

 

 

만약에 “술은 남자만 마실 수 있는 것”이라고 해보자. 그러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고 있냐”며 타박하거나,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시계를 거꾸로 돌려 조선시대로 들어가 보면 어떨까. 화류계 여성 즉, 기생이나 주모가 아니고 보통 여염집 여성이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굳이 찾자면 부녀자들이 화창한 봄날을 맞아 화전놀이를 하면서 노래도 부르고 술을 나누는 정도 였을 것 같다.

내외(內外)가 분명하던 시절 집안에 틀어박혀 살아야 했던 여성들에게 집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쐴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화전놀이가 아니었을까. 풍광이 좋은 곳에서 화전(花煎)도 부쳐 먹고 술잔도 기울였을 것이다. 흥이 나면 노랫가락도 부르고 시도 지으며, 사대부 남정네들이 즐기던 대로 하루를 보낼 때 몇 잔의 술을 마셨을 법하다. 불과 일이백년 전의 이야기다.

 

그런데 요즘은 여성의 음주 문제가 남자 못지않게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어 적절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보건복지부 지정 알코올 질환 전문 다사랑중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허성태(許成泰, 44세) 원장은 지난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비난과 편견 속에 방치되는 여성 알코올중독자가 심각한 수준”이라며 “고위험 음주율 증가세가 남성은 감소하고 있는데 반해 여성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여성 알코올 중독들의 문제점과 대안을 듣기 위해 허 원장을 만났다.

-여성 음주율이 높아진 이유는.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왕성해지면서 여성 음주가 보편화되고 음주 빈도 역시 높아지면서 여성 고위험 음주율이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일각에서 여성들의 음주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어느 정도인가.

“여성 음주 문제는 남성과 달리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부 조사 자료에 따르면 남성의 고위험 음주율(소주를 기준으로 한 번에 남성은 7잔 이상, 여성은 5잔 이상을 일주일에 두 차례 이상 마시는 것)은 2011년 23.2%에서 2014년 20.7%로 감소했지만 여성은 4.9%에서 6.6%로 늘었다.

현재 다사랑중앙병원에 입원해 있는 알코올 중독 환자들이 평균 240명 정도인데 이 중 여성 환자가 약 50여명 된다. 상당히 많은 편이다.”

-왜 여성의 알코올 중독 환자가 급증하고 있는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성의 활발한 사회 진출로 인해 여성 음주율이 높아졌고, 최근에는 주류회사들의 여성을 겨냥한 마케팅 즉, 저 도주, 과일주 등이 여성들의 술에 대한 부담감을 줄여주는 등 사회적 분위기가 여성 음주 증가를 가져왔다.

그렇다고 남성들처럼 여성들이 내 놓고 술을 마시는 데에 한계는 있다. 직장이나 친구끼리는 할 수 있어도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은 아직은 꺼린다. 그래서 남 몰래, 가족 몰래 술을 마시는 ‘키친드링커’인 여성 알코올 중독자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키친드링커가 뭔가?

“말 그대로 키친(kitchen) 즉, 가족이 없는 시간에 부엌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여성 알코올 중독자를 일컫는 말이다. 본원에 입원한 환자 가운데 이런 키친드링커로 인해 중독자가 된 경우가 의외로 많다. 가정 주부의 경우 아이들이 등교하고, 남편도 출근하고 주부 혼자 집에 남는다. 얼른 집안 청소도 하고 빨래도 깨끗이 해치운다. 그렇게 아주 완벽하게 집안을 정돈하고 난 후 혼자서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들과 남편이 귀가하기 전에 술병을 감쪽같이 치워 놓는다. 가족들은 엄마가 술을 마셨다는 흔적은 찾아 볼 수 없게 된다. 이런 생활이 쌓여 가면 주량이 늘어나게 되고 결국엔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가족들이 문제를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서다.”

한 자료에 따르면, 여성의 알코올 중독 역시 남성과 마찬가지로 유전적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이나 이 유전적 요소가 질병으로 나타나는 데에는 환경적 요소의 작용이 남성에 비해 크다고 했다. 이에 허 원장은 여성들이 받는 환경적 요소의 대부분은 스트레스라고 진단했다.

“여성들은 남편 또는 가족(시부모 등), 자녀들의 양육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남자들에 비해 높을 수밖에 없다. 결혼 전부터 술을 마셨던 경험이 있는 여성들은 이런 스트레스를 받을 때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술을 찾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막상 술을 마시면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할 수 없어 스트레스가 더 쌓이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허 원장은 말했다.

-중독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성들이 음주를 할 때 조심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가임기 여성, 특히 임산부의 음주는 반드시 자제해야 한다. 배가 남산 만하게 불러오면 술을 마시는 경우가 거의 없겠지만 임신 초기에는 자신도 모르게 술을 마실 수 있다. 이 경우 엄마가 마신 술은 태아에게 그대로 전해진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임산부는 물론 임신을 계획하고 있는 가임기 여성이라면 음주를 자제하는 것이 좋다.”

허 원장은 “특히 임신 전 음주 문제 즉, 알코올 중독자라면 반드시 치료를 받고 난 후에 임신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술은 아주 적은 양이라고 해도 임신 중 태아의 건강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논리다. ​임산부가 술을 마시게 되면 알코올이 아무런 여과 없이 태반을 통과해 자궁 속의 태아에게 직접적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허 원장은 “술에 든 알코올과 알코올의 1차 대사산물인 아세트알데히드는 태아의 뇌세포에 직접 영향을 줄 뿐 아니라 태아의 성장과 발달에 필요한 산소와 영양 공급을 감소시킨다.”고 했다.

여성의 음주문제가 남성에 비해 심각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점 때문이다. 임신 중에 술을 마시면 심할 경우 정신지체, 성장장애, 안면기형 등을 일으키는 ‘태아알코올증후군’에 노출될 수 있어서다. ‘태아알코올증후군’이란 임신 중 여성이 알코올을 섭취함으로써 태아에게 신체적 기형 또는 정신적 장애가 나타나는 질환으로 이미 아이에게 생긴 장애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기 때문에 예방이 특히 중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성들의 음주 문제는 비단 임신부나 가임기 여성문제 뿐만 아니라 갱년기 여성들에게 찾아오는 우울증 문제와도 연관성이 깊다. 여성 중 65% 이상이 경험하는 갱년기 우울증이 오면 많은 사람들이 음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들기 때문이다.

허 원장은 “여성은 남성보다 우울이나 불안, 불면 등 정서적인 문제로 술을 찾는 경향이 높다”며 “갱년기에는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의 영향을 받는 ‘행복 호르몬’ 세라토닌의 수치가 감소해 감정 기복을 느끼기 쉬운데, 이 때 기분을 달래기 위한 자가 처치로 술을 찾는 여성들이 많다. 문제는 술은 도파민과 엔도르핀의 수치를 높여 일시적으로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코올 효과가 사라지면 다시 우울한 감정에 빠지게 되고 또 다시 술을 찾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경고했다.

이 같은 여성들의 알코올 중독 문제에 대해 허 원장은 “여성알코올중독 환자는 가족들부터 버림받거나 비난받을까 두려워 몰래 숨어서 술을 마시고, 가족들 역시 이를 부끄럽게 여겨 술 문제를 외면하거나 방치하는 경향이 높다”며 “주변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병원을 찾았을 때에는 이미 상태가 악화된 경우가 대다수인 만큼 적극적인 치료 개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제 여성의 음주 문제는 숨길 것이 아니라 드러내 놓고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때다. 우리의 2세를 위해서도 그렇다.

김원하 기자

 

허성태 원장

(현) 다사랑중앙병원 원장 / (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 (현) 한국중독정신의학회 정회원 / (현) 의료기관평가인증원 조사위원 / (현) 한림대학교의료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 공저-알기쉬운 회복의 길(2014.하나의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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