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가양주(家釀酒)와 세시풍속<上>

南台祐 교수의 특별기고

 

가양주(家釀酒)와 세시풍속<上>

 

 

자연의 순환리듬에 대응하는 세시의례(歲時儀禮)에도 술은 필수품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뚜렷한 변화가 있는 자연환경과 농경 생활양식의 전통을 가져온 세시의례는 생산뿐만 아니라 생산 주체자들의 노동과 휴식에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이어져 오고 있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명절도 대체로 계절에 따라 그 행사내용이 결정된다. 그것은 다시 농업 생산 활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월령(月令)’에 의해 달마다의 행사내용이 정해진다. 따라서 명절행사는 농작(農作)의 개시, 파종, 제초, 수확, 저장 등 생산 활동의 계절적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각 명절에 연례적으로 빚어 마셔온 ‘시양주(時釀酒)’는 세시의례에 나타나는 자연과 감응하면서 살아온 우리 민족의 일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자연 혹은 자연 순환리듬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매개체로서 술의 또 다른 의미를 가름해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시양주’는 각 가정에서 담근 술로서 ‘가양주(家釀酒)’라고 일컫는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각 가정에서 술을 빚어 마시는 풍습이 뿌리를 내려왔다. 지방에 따라 가문에 따라 또 빚는 사람에 따라 갖가지 방법과 기술을 발휘한 가양주들이 등장하여 맛과 향기를 자랑했는바, ‘명가명주(名家銘酒)’라는 말이 생겨났다. ‘명가명주’란 ‘이름 있는 집안에 맛있는 술이 있다.’는 뜻이다. ‘가양주’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제사를 중하게 여기는 관습이 뿌리를 내리면서, 조상신에 대한 제주(祭酒) 목적으로 술을 빚게 되었고, 1년 열두 달 매 절기마다의 명절에 차례와 제사하는 풍속이 중요한 관습으로 이어졌으므로, 이때 정성껏 술을 빚어 천신했다 가양주와 세시풍속은 한 쌍으로 이루어진다.

 

정월주:정조다례, 세배, 이명주

한 해의 머리가 되는 달 ‘정월(正月)’은 우주가 갱생하는 시간출발의 시간이다. 따라서 일 년 열두 달 그 어느 시절보다 세시의례가 집중된 달이다. 정월 초하루 ‘설날’이나 정월 열닷새 날일 ‘대보름 날’은 한 해를 맞이하는 시기이다. ‘설’에 쓰는 술은 ‘세주(歲酒)’라 한다. ‘세주’는 찬술을 그대로 마시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봄을 맞이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歲酒不溫 寓迎春之意). 설날과 대보름에는 새벽에 찬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 하여 ‘이명주(耳明酒)’라고 하였다.

정월의 네 번째 말날(午日)에 술을 담그면 봄에 익어 일 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는다 하여 이 때 술을 담그는데, 그 술을 ‘사마주(四馬酒)’라 한다. 조선 초기 1540년경에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에 의해 저술된 요리책 <수운잡방(需雲雜方)>에는 ‘삼오주(三午酒)’와 ‘사오주(四午酒)’에 대하여 그 차이를 기록해 놓았다. ‘삼오주’와 ‘사오주’는 말날(午日)에 담그는 것은 같지만, 백미를 말날마다 세 번 넣느냐 네 번 넣느냐의 차이가 있고, ‘사오주’는 ‘삼오주’보다 재료에 백미가 하나 더 들어간다. 또한 재료를 다루는 기법도 고급스럽다. 곧 ‘삼오주’는 누룩과 술밥을 재료로 삼는데, ‘사오주’는 누룩을 가루로 하여 체로 친다든가 또는 백미를 가루로 하여 찐다. 어쨌든 ‘삼오주’와 ‘사오주’는 모두 정월 첫 말날에 담가서 단옷날과 여름철에 마시는 술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정월은 사람을 받드는 달이며, 또 신비의 슬기를 가진 사람은 천지의 만상과 더불어 해조를 할 수 있는 사람의 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월의 행사 중 종묘와 사직, 그리고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율력의 세시기의 기강대로 좋은 인재를 선발하여 연중행사를 성공리에 수행할 수 있도록 비는 행사이다.

◇ 세찬으로서의 세주(歲酒, 액막이 술 도소주):설날에 쓰이는 찬 술로서 이를 ‘세주’라고 하는데, 가양주 제조가 금지된 때에도 세주만은 가정에서 담가 마셨다. 세주로는 ‘도소주(屠蘇酒)’를 가리킬 정도로, 고려시대 때부터 이 ‘도소주’를 마시는 풍속이 전해오고 있다. <동국세시기>에 이르기를 “설날 도소주(屠蘇酒)와 교아당(膠牙糖, 엿)을 올린다”, “설날 차례를 물리고 ‘초백주(椒栢酒)’를 마신다.”고 하였다. 후에 ‘도소주’는 산초에 다시 잣나무 잎을 가미하였기 때문에 ‘초백주’라고도 하였다.

1554년(명종 9) 어숙권(魚叔權)이 편찬한 유서(類書) <고사촬요(攷事撮要)>에 “도소주는 육계, 백미, 대황, 천호, 거목, 질경, 호장근(虎杖根), 오두거피를 주머니에 넣어서 12월 그믐날에 우물물에 담갔다가, 정월 하룻날 새벽에 건져서 잠깐 끓인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금주령에 의한 방편으로 약재를 끓여 마신 ‘도소주’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1819년 김매순(金邁淳)이 한양의 세시풍속에 관해 쓴 책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도소주는 육계, 산초, 백출, 도라지, 방풍 등 여러 가지 약재를 넣어 빚은 술로서, 이 술을 마시면 병이 나지 않는다는 속신이 있다.”면서, “연소자부터 이 술을 마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소주’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첫 번째로는 옛날에 집 지을 때 천장에 도소(邪鬼를 물리치는 약)를 그려 붙이면 좋다는 속신이 있었는데, 그런 집에서 만든 술을 ‘도소주’라 불렀다고 한다. 두 번째로는 어떤 사람이 짚으로 인 암자에 살고 있었는데, 매년 섣달그믐에 약 한 첩을 주머니에 넣어 우물 속에 빠뜨려 놓은 다음 설날에 그 물을 술통에 넣어 둔 것을 ‘도소’라고 했으며, 온 집안이 그것을 마시면 돌림병을 앓지 않는다고 하여 ‘도소주’라 했다고 한다.

 

◇ 대보름날의 귀밝이술 이명주(耳明酒):정월 대보름날 절식으로 오곡밥, 보쌈, 진채식(陳菜食), 아홉 가지 부럼과 함께 이날 귀밝이술 ‘이명주(耳明酒)’라고 하는 찬 술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1년 동안 귓병이 생기지 않으며, 한 해 동안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고 한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정월편’에는 귀밝이술에 대해 “귀 밝히는 약(藥)술이며 부름 삭는 생률(生栗)이라” 하여 ‘귀를 밝히는 약술’이라 하였다. 또한 ‘귀밝이술’은 ‘귀가 잘 들리게 하는 술’이라는 뜻으로 ‘명이주(明耳酒)’ㆍ‘총이주(聰耳酒)’라고도 하며, ‘귀머거리를 고쳐 주는 술’이라 하여 ‘치롱주(治聾酒)’라고도 한다. 또한 술을 마시면 귀 밑이 빨갛게 된다고 하여 ‘귀가 붉어지는 술’이라고도 하는 등 이름이 다양하다.

 

2월 중화절식(中和節食)

2월과 3월이 교차될 때 비바람의 차기가 겨울 같다. 이를 속칭 ‘화투연(花妬娟, 꽃샘)’이라 한다. 또 속담에 “2월 바람에 큰 독이 깨지고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고 한다. 중화절(中和節)은 농사철의 시작을 기념하는 음력 2월 초하루에 절식을 즐기는 풍속으로, 중화절식은 조선조 궁중에서 해먹는 여러 가지 음식을 일컫는다. 민간에서는 ‘노비일, 하리아드랫날, 굴억딸깃날, 노록딸깃날, 머슴날’이라고 하여 그 해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주인은 이날 머슴들에게 주식(酒食)을 내어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즐기게 함으로써, 주인의 아랫사람들에 대한 위로의 뜻이 담겨 있다.

2월 초하루 날은 ‘노비일(奴婢日)’이라 하는데 이 날의 별칭이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는 오랫동안 농사일이 없어 머슴들은 별로 뚜렷한 일이 없지만, 이 달부터는 농사 준비가 시작되는 시기이니 만큼 앞일을 위하여 위로 겸 노비에게 하루를 즐겁게 쉬게 하고 주식(酒食)을 마련하여 농악을 치며 푸짐하게 즐긴다. 이 날 아직 장가를 들지 못한 나이든 노총각 머슴에게 큰 사발에 술을 주면서 고개 돌이키지 말고 먹어라 하고 술을 내린다. 이 술을 마신 머슴은 그로부터 어른과 맞 품앗이를 하게 되었다. 소박하나마 일종의 성인식이었다.

 


중삼절식(重三節食) 과하주(過夏酒)

3월 3일을 일명 ‘삼짇날’이라고 하며, 이 날 무렵에는 춘색도 짙고 강남 갔던 제비도 되돌아오는 시절이다. 이날에는 ‘술과 떡’을 빚어 들놀이를 하는 풍습이 있다. 이날의 절식으로 쌀과 누룩 외에 봄에 피는 진달래꽃을 따다 빚은 ‘두견주(진달래술)’를 비롯, 꽃과 초근목피를 넣어 다양한 술을 빚는데, ‘도화주’ ‘과하주’, ‘송순주’, ‘이강주’, ‘국력고’, ‘계당주’, ‘노산춘’, ‘삼해주’, ‘소곡주’가 유명했다.

이 날 답청(踏靑, 봄에 파릇하게 난 풀을 밟으며 거니는 일)이라 하여 들에 나가 꽃놀이를 하고 새 풀을 밟으며 봄을 즐긴다. 또 제비 마중을 하고 돌아와 들에서 화전(花煎)을 만들어 먹으며 화전놀이를 한다. 삼월 삼짇날을 기해 각 가정에서는 솜씨를 발휘하여 술을 빚어 마셨다. 이때 술의 재료는 쌀뿐만 아니라 봄에 피는 꽃 초근목피 등을 써서 특이한 술을 만들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월에는 곡우 외 입하를 농민들에게 알려서 농사를 권장하는 외에는 아무 세시행사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1849년 조선 후기의 문신 홍석모(洪錫謨)가 우리나라의 세시풍속들에 대해 기록한 책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3월 중의 행사가 지방마다 다르게 거행되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3월은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요, 생명이 개화하는 시기이다. 이 달에 술집에서는 무더운 여름을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술 ‘과하주(過夏酒)’를 만들어서 파는데, 이 ‘과하주’는 여름을 별 탈 없이 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미래에 대비하여 미리 술 한 잔을 마셔 두는 여유로 볼 수 있다. 봄에는 ‘소국주, 두견주, 도화주, 송순주’의 술을 빚는다고 한다. 술 이름만 들어도 봄의 정취가 느껴진다.

 

◇ 3월 청명일과 청명주: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이 ‘한식’인데, 하루 전날이나 같은 날 ‘청명일’이 들게 된다. 이날은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라는 속담이 있듯이, 한식의 하루 전날이거나 때로는 한식과 같은 날이 된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청명을 기준으로 춘경이라 하여 논 농사일을 시작하고, 다음 절기인 곡우 무렵에는 못자리판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농사를 많이 짓는 경우에는 일꾼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이 무렵이 되면 서둘러 일꾼을 구하기도 하였다. 또한 청명에는 ‘내 나무’라 하여 나무를 심었는데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시집·장가 갈 때 농짝을 만들 재목으로 삼았다 한다.

이 날은 종묘(宗廟), 능원(陵園), 조상의 묘에 성묘하는 풍속이 있다. 한(漢)나라 종묘에 바치는 술이 ‘고묘주(高廟酎)’인데, 정월 초하루에 술을 만들기 시작하면 8월에 완성된다. ‘고묘주’를 ‘주금(酎金)’이라고도 하는데, 한 무제(武帝) 때 제후들이 8월이면 종묘에 모여 순주(醇酒)를 올리는 의식을 갖는데, 이때 제후들이 제사 비용으로 금을 바쳤던 데서 나온 말이다.

이때의 절식(節食)으로 청명일 20여일 전에 빚어 이 날 마시고, 한식 때 성묘에도 쓰는 ‘청명주(淸明酒)’가 있다. 음력 3월의 청명일에 마시는 절기 술이라서 ‘청명주’라 부른 것이다. ‘청명주’는 20여 일 동안 발효하여 빚어내는 청주로서 엿기름을 사용하여 단맛이 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즐겨 마셨다 한다. 실학자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 만물문>에 오재‧삼주(五齋三酒)에서는 청명주를 좋아한다며 청명주 주조방법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나는 평생 청명주(淸明酒)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였는데, 청명주의 양조방법을 양계처사(良溪處士)에게 배우고 나서 “혹시나 잊어버릴까 두려워 기록해 둔다”고 하였는데, 당시에 청명주가 얼마나 소문이 났으며 애주가들에 의해 사랑받았는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 4월의 농주(農酒), 나그네 창자는 박주로 씻는다

입하는 4월의 절기이고, 소만은 중기이다. 청개구리가 울고 지렁이가 나오며, 씀바귀가 뻗어 오르며, 냉이가 죽고 보리가 익는다. 율서(律書)에 이르기를 4월은 통칭 ‘유달’이라 하여 열매가 다닥다닥 열리는 달이다. 이것을 말하여 양기가 시작되어 음기와 더불어 만물을 자라게 하는 달로 꼽는다. 4월의 세시행사로는 ‘소만(小滿)’과 ‘망종(芒種)’이 있다. ‘등석(燈夕)’ 또는 ‘사월 초팔일’, 석가모니의 탄신일로 저녁에 연등하여 경축행사를 벌인다. 중국의 연등회는 정월보름이지 만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4월로 옮겨졌다.

한국의 ‘삼해주(三亥酒)’는 봄부터 여름에 마시는 술이다. 정월의 첫 해일(亥日)에 시작하여 해일마다 세 번에 걸쳐 빚는다고 해서 삼해주라고 하며, 정월 첫 해일에 담가 버들개지가 날릴 때쯤 먹는다고 해서 ‘유서주(柳絮酒)’라고도 한다. 고려 때부터 제조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약주이다. 가장 추운 설 무렵 술을 빚기 시작해, 음력 4월 버들가지인 유서(柳絮)가 초여름 바람을 타고 날릴 때 마시기 시작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계절 내내 청주를 즐기는 일본에서는 벚꽃이 만개할 때 마시는 ‘하나미사케(花見酒)’, 음력 추석 때 보름달을 감상하며 마시는 ‘쓰키미사케(月見酒)’, 소복소복 내리는 눈을 보며 마시는 ‘유키미사케(雪見酒)’ 등 계절에 따라 운치 있는 이름을 붙인다. 모내기가 끝나 한숨 돌리는 6월 말, 다가올 더위를 이기기 위해 마시는 ‘나쯔고시노사케(夏越しの酒)’도 있다.

음력 4월에는 석가탄일 사월 초팔일이 들어있는 달이다. <승무(僧舞)>의 시인 동탁(東卓)의 ‘삼도주’를 언급하지 않을 수 있을 손가. 그가 직접 빚은 술을 ‘삼도주(三道酒)’라고 하였는데, 그가 1941년 오대선 월정사에서 불교 전문강원의 강사로 있으면서 승려들과 함께 빚어 마신 술이다.<다음호 계속>

남태우 교수

▴문학박사/중앙대학교 명예교수▴전남대 교수▴중앙대학교 도서관장▴중앙대학교 교무처장▴중앙대학교 문과대학장▴한국정보관리학회장▴한국도서관협회장▴대통령소속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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