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인의 동상이 강화도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환하게 웃는 모습과 함께 양손에는 술병과 잔을 들고 있습니다
인천시 강화군이 지난 해 12월 건평항에 ‘천상병귀천공원’을 조성 한 것을 여러 언론에서 기사화 하면서 천상병 시인이 마치 살아 돌아 온 듯 한 착각을 할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다.
천상병 시인의 동상은 그 동안 수락산 자락에도 건립되었지만 이 번 만큼은 관심이 적었다.
1993년 타계한 고 천상병 시인의 동상이 인천 강화도 건평항에 건립된 것은 그의 대표작이랄 ‘귀천(歸天)’을 바로 건평항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쓴 시라는 것이 알려져 강화군이 이곳에 ‘천상병귀천공원’을 건립하게 되고부터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오늘날 건평항은 해안에 포장도로가 건설돼 접근성도 좋고, 드라이브코스로도 손색없는 곳이지만 아마도 천상병 시인이 건평항을 찾았을 때는 제대로 된 신작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곳까지 찾아든 것은 모르긴 해도 해지는 저녁노을을 보러 왔었을 것 같다. 막걸리 한잔 마시며 저녁노을을 감상하면 시인이 아니더라도 시상이 떠오를 것 같은데 천상병시인이야 어쩌겠는가.
천상병 시인과 건평항과의 관계는 장인성 시인으로 시작된다.강화군은 몇 해 전 강화 나들길 홍보책자를 집필한 장인성 시인으로부터 옛 건평나루가 귀천의 탄생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확인 작업을 거쳐 건평항 인근 쉼터에 동상과 함께 공원 조성을 계획하게 됐다고 한다.조각가 박상희(63세)씨가 제작 한 천상병 동상은 공원 너럭바위에 앉아 막걸리 잔을 들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어깨에는 새 한 마리 앉아 천 시인과 놀아주는 형상이다.
생전의 천 시인의 대표작인 ‘귀천’은 근대 한국 시문학에서 가장 서정적이고 순수한 작품이라는 평가와 함께 국민애송시로 자리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실제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아는 작품이기도 하다.그런데 누군가가 천상병 시인이 들고 있는 막걸리 잔에 진짜 막걸리를 따라 넣는 다는 뉴스가 나갔다.
동상을 조각한 박상희 씨는 “처음에는 작품이 손상될 까 봐 황당했었는데요, 하루 이틀 막걸리를 따라주는 것을 보고 그분을 추모하는 진정성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이에 대해 강화군도 동상이 조금 손상돼도 시인을 좋아하는 마음이 감상에 직접 참여하는 형태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천상병 시인을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에도 큰 의미를 두고 있다.”며 한편으로는 반기고 있다.시가 발표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국민적 사랑이 식지 않는 것은,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감동, 위안을 주기 때문일 것이라는 게 강화군 측 설명이다. 군 관계자는 “올해가 ‘귀천’이 탄생한 지 꼭 50년 됐다”고 전했다.이 공원에는 천 시인의 동상과 육필 글씨를 새긴 귀천 시비, 안내판 등이 설치돼 있는 상태다. 군은 동상 주변 조경과 경관조명 공사가 끝나는 3월 동상 및 시비 제막식을 열 계획인데, 이 공원에는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강화도 출신 작곡가 최영섭 선생(88)의 노래비도 있다. 천 시인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 일본의 해안도시 효고현(兵庫縣)에서 태어나 해방과 더불어 고국으로 돌아와 경남 마산에 정착했다. 1955년 마산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늘 고향바다를 그리워했고, 마산까지 갈 여비가 없어 고향친구인 박재삼 시인과 더불어 서울에서 가까운 강화도를 자주 찾아가 바다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천 시인이 강화도 건평나루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시다 쓴 시가 바로 ‘귀천’으로, 천 시인은 이 시를 메모지에 적어 박 시인에게 건네주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천 시인은 시를 쓴 직후인 1967년 소위 동백림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겪고 풀려 나와 의정부 수락산 밑에 살며 인사동에 나왔는데, 벗들에게 1000원을 얻어 막걸리 한잔 마시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았다. 1970년 영양실조로 쓰러진 뒤 무연고자로 분류돼 서울시립정신병원에서 치료받았다. 다들 몇 달째 코빼기도 내밀지 않고 소식이 끊긴 천상병이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렇게 오랜 기간 행방이 묘연하자 천 시인이 죽은 것으로 생각한 박 시인이 ‘귀천’을 천 시인의 유작으로 창작과 비평에 발표하면서 작품이 알려지게 됐다.
천 시인은 1993년 4월 숙환으로 타계했고, 세상을 떠난 이후로도 ‘귀천’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시인 겸 평론가.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으로 불렸던 천상병은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주요 작품집으로《새》(1971),《귀천 歸天》(1989) 등이 있다
43세가 되도록 독신으로 오랜 유랑생활을 하다가 1972년 목순옥(睦順玉)과 결혼하여 비로소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 뒤 지병으로 죽기 전까지 부인의 지극한 보살핌에 힘입어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였다고 한다.
죽어서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들면 어쩌냐고 걱정했던 시인. 커피 한 잔과 갑 속의 두둑한 담배, 막걸리 한 병을 마시고도 버스 요금이 남았다며 행복하다고 말하던 시인. 그는 무소유였지만 가난과 불행에 주눅 들지 않고 늘 늠름했다. 오히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고 ‘귀천(歸天)’에서 썼다. 시인의 긍정주의 낙관론은 많은 것을 거머쥐고도 불행감에 허덕이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글·사진 김원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