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동영 이태백시
당시(唐詩)로 대륙 중국을 헤아려보자⑩
중국 李 白 詩 해설집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유교와 도교의 절대 차이점
유교는 한 사물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고 도교는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의아하겠지만 한 가지 예로 금방 수긍할 수 있다. 술잔이 하나 있다고 치자. 유교 관점에서는 술잔은 그저 하나의 술잔이다. 그렇다면 도교의 관점은 어떠할까. ‘술잔’이 아닌 하나의 잔일뿐이다. 술잔으로 용도를 한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 잔에다 밥도 먹을 수 있고 물도 마실 수도, 또한 술도 마실 수도 있지 않나. 이렇게 굳이 정의를 내리지 않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부분이 바로 도교의 관점이다.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도교적 관점으로 조금 특이하게 바라볼 수 있다. 왜 사랑은 눈물의 씨앗만 되나? 기쁨의 씨앗은 안 되고 또 슬픔의 씨앗은 안 되나?
이와 같이 사람의 도리에 대해 유교는 하나의 정의를 내리고 사람들은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바로 ‘성인군자’이다. 인간의 최고의 선을 군자에 비유하고 누구나 수양을 하여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도교는 인간의 능력을 다양함에 비유했고 그래서 각자에 맞춰 개발해야 한다고 했다. 음악에 조예가 있는 사람, 미술에 조예가 있는 사람, 건축에 조예가 있는 사람 등 다양성에 주목한다. 그래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한다. 소위 말하는 무위자연설이다.
굳이 현대적으로 비유하자면 유교는 중앙집권적이요, 도교는 지방분권적이다. 국가에 위기가 닥치면 일사분란하게 난국을 극복해야 하는 중앙통제가 맞고, 국가가 안정되었을 때는 지방의 실정에 맞게 다양성을 강조하는 지방분권이 맞다. 필자는 두 가지가 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것이 우위는 아니다. 그 시대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 客中作(나그네 심정을 노래하며)
난릉 지역의 좋은 술은 울금향이 나고
옥잔에 가득 부으니 호박 광채가 나는구나
그런데 주인이여 객을 취하게 만드니
어디가 타향인지 모르겠구나
蘭陵美酒鬱金香
玉碗盛來琥珀光
但使主人能醉客
不知何處是他鄕
배경:이백이 35세 무렵 가족과 함께 호북의 안릉 지역에서 산동의 난릉 지역으로 이사해 타향에 대한 시정(詩情)이 난릉의 이름난 술들과 어우러져「객중작」이라는 명작이 탄생된다.
어휘蘭陵(난릉):지금의 산둥 성 난릉현.
鬱金香(울금향):향기로울·숲 우거질 울. 울금은 향초로 이 향초를 삶아 술에 타면 향기로운 술이 된다. 중국 난릉의 특산물로서 울금(鬱金)으로 만든 향이 뛰어난 술.
玉碗(옥완):옥으로 만든 술잔.
琥珀(호박):돌의 일종. 투명하고 붉거나 누런색이 나 장식물로 많이 쓰여 예로부터 보석에 준한다 함. 여기서는 술의 빛깔을 호박 광채로 비유했다.
客(객):이백 자신.
해설:고향을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산동 땅에서 식객 노릇만 하던 이백은 망향의 정을 술로 달래며 이 글을 휘갈겼다. 하룻밤을 묵게 된 집주인에게 “나를 취하게만 해준다면 이곳이 타향이라는 생각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고 말하는 이백의 마음속 처절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향이 뭔지, 그렇게 한평생 달과 술이 좋아 방랑생활을 하던 이백도 인간 본연인 고향의 정을 끝내 떨쳐버릴 수는 없나 보다. 타향이 과연 고향보다 좋을까? 문득 김상진의 <고향이 좋아>가 불현듯 떠오른다.
타향도 정이 들면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말을 했던가 바보처럼/ 바보처럼 아니야 아니야 그것은 거짓말/ 향수를 달래려고 술이 취해 하는 말이야/ 아 아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
그런데 요새는 고향이라는 개념이 없어졌다. 그만큼 사회가 각박해진 걸까?
명구(名句)但使主人能醉客 不知何處是他鄕
*편집자주:본지는 저자의 양해를 받아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중에서 술과 직접 관련이 있는 대표시를 연제한다. 삽화및 관련 사진은 청어사가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