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술 맛

 

잊을 수 없는 술 맛

백 필 기(용수문학 회장)

 

술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 포장된 생김새나 맛도 제 각각이다. 독한 술이 있고 순한 술도 있고 부드러운 술도 있다. 그래서 은은한 향취에 호감을 갖게 되는 술도 있다. 술의 향취는 술마다 독특한 특징이 있어서 기호에 따라 즐겨 찾는 술이 있기 마련이다.

맛 또한 종류나 품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같은 주종이라도 장소와 분위기 또는 사람의 신체적 상태에 따라 술맛을 느끼는 흥취가 달라지기도 한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스쳐가는 쌀롱에서 정겨운 사람과 함께 드는 와인의 맛도 일품이고, 땀을 많이 흘린 후, 마시는 막걸리의 맛도 반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오랜 벗을 만나 함께 마시는 술 맛에 비할 수는 없다.

어린 시절, 동작이 민첩하지 못했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운동회에서 상을 타 본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를 입학한지 며칠 후, 개교기념일이었다. ‘전교생 단축마라톤 대회’ 축제가 열렸다. 달리기에 꼴찌만 하던 자괴감을 탈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선두그룹에 끼어들어 한참을 달렸다. 이 단축마라톤 경기서 이름을 드날리던 삼 학년 학생과 선두로 나섰는데, 간발의 차로 이등을 했다. 그 후 공교롭게도, 두 주일쯤 후, ‘도민 체전’에 출전하여 우승을 했다. 이어서 ‘군민 체육대회’에서는 ‘우승 컵’을 받기에 이르렀다.

육상경기에서 우승 메달을 받기는 해도 ‘우승 컵’을 받는 예가 드물 뿐 아니라 처음 받은 것이라서, 기념이 될 것 같아, 지금껏 귀하게 여기면서 보관하고 있다.

고향 마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매년 ‘마을 친선 체육대회’를 개최한다. 전년도에는 우리 마을이 종합 우승을 하여 트로피를 받아왔다. 당시의 마을 이장이 트로피를 마을회관에 두지 않고, 개인자택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도회지로 이사를 하면서 이삿짐을 따라 트로피까지 도회지로 가고말았다. 이 사실을 대회 당일에서야 알게 됐고, 결국 시상할 트로피가 없는 가운데 시상식을 할 판이었다. 트로피를 갑자기 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긴급 방편으로 내가 받았던 ‘우승 컵’을 트로피 대신 시상식에서 수여하고, 후일에 진품을 찾아오면 바꾸어서 돌려받기로 하였다.

내가 군대에 입대를 하여 전 이장이 이사한 도회지 외곽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도 대표선수로써 영외 운동장에서 훈련할 기회가 많았는데, 운동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그 분에게서 트로피를 받아올 수 있었다.

한창 무더운 날 휴가를 받아 귀향하면서 내가 받았던 상품과 바꿔오기로 하였다. 당시의 농촌 실정으로는 차도가 마을까지 이어지지 못했거니와 승용차나 택시를 이용하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무더운 여름철, 한낮에 소매가 긴 군복 차림으로 꼬불꼬불한 먼 시골길을 걷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해가 적었던 그 시절의 농촌 햇살은 뜨거운 불볕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나뭇잎은 따가운 햇살을 견디다 못해 아래로 늘어뜨리고, 귀를 간질이던 매미소리 마저 간간이 흩어져 내리고 있었다. 빗물처럼 흐르던 땀방울은 눈가로 스며들어 소매 깃으로 훔쳐내어도 시린 눈을 진정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마을 입구 근처로 들어서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 오솔길 안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웃마을 친구들이 새파랗게 웃자란 볏논에서 논을 매다가 땀에 젖은 내 모습을 저희들만 보고 불렀던 것이다. 논 가운데서 일하다가 나오기도 어려운 처지이라, 그 자리에 서서 얘기하면서 손이 시리도록 차가운 개울물에 담가두었던 막걸리를 먹으라고 권하지 않는가.

텁텁한 막걸리 한 사발로 마르다 못해 타들어 가는 목을 시원하게 적시는 컬컬한 그 탁배기 맛은 말로서 다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지경이었다. 달콤하거나 구수하지도 않고 텁텁한 맛에 혀끝을 쏘는 자극이 싫지 않으면서, 마른 목을 지나 가슴까지 촉촉이 적셔주는 상쾌한 그 첫 맛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알맞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원스런 그 감각이 발끝까지 저려오는 전율에 빠져들었다. 잊을 수 없었던 첫 잔의 미각이 각인되어 세월이 흘러가도 여운은 남아 있었다.

우승 컵을 처음 받던 날, 군 체육회가 지도자들에게 베푸는 만찬에 어린 나이로 참석하여, 그 우승 컵에 술을 부어서 잔을 돌려마시던 그 술의 맛은 기억나지 않는데, 이 날의 술맛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좌석에서 술잔을 들 때마다 그 향취를 찾아보았지만 그 때와 비교될만한 맛을 느낄 수 없어서 마음이 허탈해지곤 한다. 오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향미에 마음을 앗겨 말로서 나타내려 해보지만 끝내 절묘하던 제 맛에 가름하는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때의 그 막걸리가 썩 좋은 술이어서 잊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환경과 분위기에 도취되어, 감미로운 신비경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땀을 많이 흘려 목이 타들어가던 내 자신이 첫 잔의 감미로운 맛에 흠뻑 빠져들었던 탓일 게다.

여간 목이 말라도 혼자는 술이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벗을 만나거나 손님을 접할 때 술을 찾는 것은 잊지 못할 그 때 첫잔의 참맛이 뇌리에 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진귀한 이 맛을 너무 즐기다가 혼미해져서 낭패하는 수가 허다하다. 취기가 오르고 있음은, 자신만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음주량이 과다하면 정신을 가다듬지 못하여 실수로 이어지는 법이다. 주량은 ‘적당할 때 자제할 수 있을 때’까지가 주량인 것이다.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만 품격을 갖춘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심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술 버릇은, 타인들에게 상종하기 싫은 사람으로 인식되고 말 것이다.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꼭 좋은 것이 제공되어야 감명 받는 것은 아니다. 하찮은 것이라도 환경이나 분위기에 맞아 자신의 감정과 동화되면 반겨지는 것이다. 맛인들 분위기에 따라 느끼는 감정이 달라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미 있게 마련한 주안에 정이 담겨 있어야 맛이 우러나는 법이다. 갈증이 나면, 시원한 술 한잔 생각에 그 맛과 기쁨은 배가되는 것이다.

운치가 있는 자연에서, 정 깊은 벗들과 함께 권커니 잣거니 술잔을 기울일 수 있다면, 그 옛날의 그 맛을 다시 느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백필기는:▸수필, 시조, 시, 평론가, 용수문학 회장 ▸시와 수필사 운영위원, 한국문학세상 심사위원▸해동문학 편집위원, 건국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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