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한 술천국
툭하면 금주령(禁酒令)을 선포하던 조선시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아 학문권력자 지배집단, 즉 사대부들이 패거리를 지어 그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만든 오백여년 동안 금주령이 왕명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이 발동한다. 까닭은, 국가경영을 생산총량을 나눠먹는 스타일로 옹졸하게 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 하에서 흉년이라도 들면 상대적 하층계층인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는 사태가 벌어지곤 했다. 이런 판에 사대부들이라도 양심적으로, 사서삼경에서 배운 것처럼, 생명처럼 귀중한 곡식으로, 술을 담가 먹을 수는 없었겠다. 최소한 사농공상이란 지배 시스템을 유지하려면 농업에 종사하는 백성계층을 굶기거나 죽여서는 안 되기 때문인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죽을 정도가 됐다면, 바로! 국가재정 손실로 이어져, 왕권이 바뀌거나 혹은 책임자를 가리는 척! 사화(士禍)가 일어나거나, 심각하게도 민란(民亂)이 일어나거나 하는 중대하고 엄중한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엄중한 상황을 금주령이란 미봉책(彌縫策) 만으로도 번번이 막을 수 있었다니! 결론이 자명해진다. 국가경영에 위해를 끼치는 계층은 이 바로 지배계층 즉 사대부들이었던 것이다.
한잔 먹새 그려 또 한잔 먹새 그려.
꽃을 꺾어 술잔 수를 세면서 한없이 먹세 그려
-중략
누런 해와 흰 달이 뜨고 가랑비와 함박눈이 내리며
회오리바람이 불 때 그 누가 한잔 먹자고 하겠는가.
-하략
위 인용문은 조선조 중기 정철(鄭澈:1536~1593, 호는 松江, 자는 季涵)이 쓴 <장진주사(將進酒辭)>다. 송강이 살던 시대는 성리학 국가, 조선이 본격적으로 망해가기 시작한 때로서 조선을 망친 대표적 임금 선조의 총신(寵臣)이었다. 송강은 여동생 둘을 인종의 귀인(貴人)으로 주고, 둘째는 계림군(桂林君)의 부인으로 들일 정도로 당대의 세도가였는데~ 집권, 모함, 귀양, 재집권, 숙청, 그리고 임진왜란을 거치며 영욕을 부침하다 58세(1593, 선조26) 강화에서 일생을 마친다.
위 글을 요즘 학계나 강단이나 문학인들이 태평성세의 권주가처럼 보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러나 실상을 살펴보면, 왕에게 버림받고 당파싸움에서 밀려난 몰락한 늙은 사대부의 술 취한 탄식에 불과하다. 이 글을 문학적 위상을 거론하며 “사설시조 스타일의 뛰어난 권주가”로 칭해야 한다고 하면, 말 나온 길에 한마디 더 해야겠다. “글 줄 좀 쓸 줄 아는 술 취한 벼슬 떨거지가 정격(定格)에 맞지 않게 읊조린 시조풍의 탄식”이다. 요즘 국문학 용어로 ‘사설시조’라고 하는데~ 사실, 사설시조는 그 당시 글 잘 모르는 평민계층이 여유(정신적인)가 생겨서 부르던 유행가 스타일이었다.
2016년 봄 대한민국! 중국에서 요우커(旅遊客)! 관광객이 떼로 몰려오고 있다. 현금을 들고 여단(旅團) 규모의 인원이 중부지방을 휩쓸고 있다. 자유시장경제, 자본주의 파워는 국경선 무색하게 만들고 이어서 종교화 된 마르크시즘까지 순둥이(?)로 만들었다. 현재, 자유시장경제는 북미, 유럽, 태평양 등 권역별로 엮고 묶다가 결국에는 글로벌경제권역으로 발전해 갈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잘 지켜지지도 않는 고상한 금주령(19금)을 앞세우고 그 절대적인(?) 법령만을 앞세워, 해외 토픽감의 우스꽝스러운 통제위주 시스템을 지금도 생산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서울시 중구청의 민원해결 방식이다. 미성년자를 받아들인 업소와 이를 알고도 빈번하게 받아들인다고 의심하고 고발한 경쟁업소와의 고발분쟁을 해결한 방식이다. 늘 문제는 지배계층이 문제였고 통치계층이 문제였지 어린백성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문제를 일으키겠는가. 기껏해야 자유시장 경제체제 하에서 제 돈 써가며 술푸념이나 하는 정도지. 끝.
권 녕 하:시인, 문학평론가<한강문학>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