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목련이 지는 밤, 참회의 술잔을 채우다
박정근
(문학박사, 대진대 전 대학원장, 황야문학 주간, 작가, 시인)

봄은 때로 잔인할 정도로 찬란하게 다가와, 속절없이 스러지곤 한다. 그중에서도 잎보다 먼저 피어나 마른 가지 위에 백자처럼 하얗게 맺히는 꽃이 백목련이다. 매창이 좋아하는 꽃은 매화였지만 매창의 사랑을 닮은 꽃은 백목련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매창과 유희경의 사랑은 이른 봄 화려하게 피어났다가 목련꽃처럼 허무하게 져버렸기 때문이다.
매창은 유희경을 처음 만나는 순간 여류시인이자 기생으로서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남성 중에서 가장 큰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그와 깊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본 진정한 사랑이었다. 아무리 고매한 시를 써도 천기 출신이라는 이유로 진정한 사랑을 온전하게 누리기 어려운 유교 사회가 운명처럼 가로막고 있다. 매창은 기생으로서 세도가들에게 술을 따르는 자신의 처지에 진저리를 칠 정도로 염증을 느끼곤 했다.
사실 그녀에게 접근했던 남성은 헤아릴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매창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시문학과 자유를 추구하는 여성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조선의 계급사회에 갇혀있던 양반 출신의 남성들이 매창의 시정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으리라. 이러한 우울한 상황에서 백마를 타고 나타난 기사처럼 유희경이 나타났다. 유희경은 뛰어난 시인이었지만 천민 출신이었다. 거드름을 피우는 양반들에게 느꼈던 거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동질감을 그에게서 매창은 느낄 수 있었다.
매창은 유희경을 향한 사랑을 추구하면서 시적 감응의 황홀함과 신분적 일치감에서 오는 감정적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지나친 행복을 질투하는 신의 장난이었을까. 그들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국가적 전란이 일어나고 만다. 바로 임진왜란이다. 유교적 가치를 신봉하는 유희경은 매창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선비로서 국가적 위기를 회피할 수 없었다. 결국 꿈결과 같은 매창과 나눈 사랑의 황홀한 절정에서 전락하여 이별의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전란의 세월을 맞이한 늙은 시객은 떨어지는 목련처럼 가장 극적인 봄의 비애를 느낀다. 이제 사랑하는 매창을 떠나 전장으로 떠나야 한다. 그는 매창에게 이별의 잔을 건네며 이별의 시를 함께 읊어야 한다. 저편에 그들의 슬픔을 말해주는 듯 백목련 한 송이가 바람에 뚝 떨어진다. 어둠이 내린 봄밤에 창밖에 핀 하얀 목련을 보면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며 밤새 켜둔 하얀 등불 같아 가슴이 미어졌다.

필자는 달이 밝은 밤, 흐드러지게 핀 목련 나무 아래 홀로 앉아 술잔을 채웠던 한양의 유희경을 생각한다. 봄바람이 스칠 때마다 농밀한 꽃향기가 코끝을 맴돈다. 투명한 술잔 위에 창백한 달빛이 내려앉는다. 잔을 부딪칠 이 하나 없는 고요한 밤이다. 이 나무 아래 서면 멀리 남쪽 부안에 두고 온 그리운 연인, 매창의 자태가 아른거린다. 어느 눈부신 봄밤, 만개한 하얀 목련꽃 아래서 아름다운 무희처럼 너울너울 춤을 추던 임이 다가온다.
달빛을 조명 삼아 부드럽게 흩날리던 치맛자락은 저 꽃잎보다 더 눈부셨었다. 밤공기를 가르며 번지던 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순간 그녀의 웃음소리가 어떤 독한 술보다 유희경 자신을 깊게 취하게 했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환희의 춤사위 끝에는 어김없이 다가올 이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임진년의 왜란이 조선 팔도를 피로 물들이기 전, 의병으로 붓 대신 칼을 쥐고 떠나야 할 운명을 예감이라도 했던 것일까. 헤어짐이 못내 서러웠던지 가만히 춤을 멈추었던 매창. 발끝에 툭 하고 떨어져 내린 하얀 목련꽃을 오래도록 슬프게 내려다보던 모습은 가슴을 아리게 하는 장면이다. 흙바닥에 뒹굴며 갈색으로 상처 입어가는 낙화를 바라보며 금세 눈물을 떨구던 그녀가 아닌가. 그 순간 그녀는 떨어지다 공중에 멈춘 목련꽃 같았다. 처연했던 그 눈빛을 생각하면 지금도 필자의 가슴을 시리도록 아프다.
전장의 흙먼지와 피비린내 속에서 살아남았으나, 유희경은 끝내 그 꽃다운 여인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과 달리 절정의 순간에 무거운 송이째 추락하는 목련이여! 나라를 구하겠다는 대의 뒤에 숨었던 유희경은 한 여인과의 맹세를 저버린 사내일 뿐이었다. 커다란 슬픔과 가책은 그를 기다리며 홀로 눈물지었을 매창의 슬픔에 비해 그리 작지만은 않았다.

술기운이 오르니, 바람에 흔들리는 저 하얀 꽃잎이 꼭 허공을 가르던 매창의 고운 손길 같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다시 피어나는 목련이여! 그대는 발끝을 맴돌며 서러워하던 유희경의 연인 매창이 아닌가. 하지만 유희경은 이 찬란한 계절이 다시 돌아와도 그녀를 품에 안을 길이 없어 눈물을 흘린다. 유희경은 그저 이 술잔에 봄밤의 정취와 뼈저린 후회를 반반씩 섞어 마실 뿐이다.
목련꽃이 다 지기 전에,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필자는 유희경의 못다 한 사죄와 그리움을 생각하며 입술에 술 한잔을 적시며 시 한 편을 조용히 읊조려 본다.
詩. 목련 잔(木蓮盞) – 매창을 그리며
박 정근
달빛 베어 문 하얀 꽃잎 하나
술잔에 소리 없이 내려앉네
잎사귀 하나 없이 피어난 그대처럼
예고 없이 찾아왔던 나의 봄이여
너울대던 하얀 치맛자락 멈추고
발끝에 지는 꽃잎 보며 서러워하던 그대여
충의를 향한 대의의 칼날 앞에 맹세를 품었으나
전후 그대에게 돌아가지 못한 탕아의 슬픈 변명이여
가장 찬란한 밤에
가장 무겁게 몸을 던지는 저 꽃은
차마 씻어내지 못한 사내의 아픈 가책인가
목을 축이는 건 참회의 술이요
가슴을 태우는 건 아득한 향기라
빈자리 맴도는 시린 봄바람에
오늘도 온전히 취하지 못하는 밤
흐드러진 하얀 등불 아래
다시 품지 못할 매창의 눈물을
고요히 삼키누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