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작(酬酌)과 사돈(査頓)

南台祐 교수 칼럼

 

수작(酬酌)과 사돈(査頓)

 

‘수작음주’의 극치를 보여준 한 사례가 ‘사돈(査頓)’이라는 단어와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자기의 일은 젖혀놓고 남의 일에만 참견할 때 ‘사돈 남 말 한다’라고 하고, 저와는 상관없는 일에 간섭한다는 뜻을 가진 속담으로 ‘사돈집 잔치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한다’는 말이 있으며, 남이나 다름없는 먼 친척을 ‘사돈의 팔촌’, 그리고 사돈집을 높여 ‘사돈댁’, ‘안사돈’, ‘바깥사돈’ 등처럼 ‘사돈’이라는 말을 많이사용한다.

그런데 이 ‘사돈’이라는 말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수작과 관계된다는 의미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돈(査頓)’의 ‘사’는 한자로 ‘사(査)’라고 쓰는데, 이 글자는 ‘木+且’로서 ‘차(且)’는 겹쳐 쌓는 모양 또는 늘어놓는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어서 ‘사(査)’의 뜻은 나무를 늘어놓아 묶여있는 ‘뗏목’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 뗏목이 잘 묶여져 있는지 살펴본다는 점에서 ‘조사한다’는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돈(頓)’은 한자로 ‘頓’이라고 쓰며 이 글자는 ‘頁+屯’으로, 屯(둔, 준)은 어린아이의 머리를 묶어 꾸민 모양을 본떠 ‘많은 것을 묶어 모으다’, ‘사람이 모이다’, ‘진을 치다’는 뜻이 있는데, 頁(머리 혈)과 합해져서 ‘조아리다’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뗏목(여기서는 나무 그루터기 또는 등걸을 의미함)을 나타내는 ‘査’와 절을 한다는 ‘頓’이 합해진 ‘査頓’이란 낱말이 왜 자녀의 혼인으로 맺어진 두 집안의 어버이끼리 혹은 넓게는 일가친척 간에 서로 부르는 말이 되었을까?

우리 속담에 ‘사돈(査頓)모시듯 하다’, ‘사돈 남 말 한다’, ‘사돈집과 뒷간은 멀수록 좋다’와 같은 속담이 많다. ‘사돈 남 말 한다’는 속담은 ‘자기의 잘못이나 허물은 제쳐 놓고 남의 일에만 참견한다’는 뜻의 속담이다. 사돈에게 할 말을 어려우니까 직접 못하고 제삼자에게 말하는 것처럼 나무라는데, 사돈이 눈치 없이 그 말에 맞장구를 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사돈집과 뒷간은 멀수록 좋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가깝게 지내기에는 어려운 상대가 사돈이기에 ‘멀수록 좋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돈의 팔촌’이라는 속담에서도 사돈은 남이나 다름없는 매우 먼 친척으로 대하기 어려운 관계로 보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사돈이란 너무 허물없이 대하기도 어렵고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대하기 어려운 관계라고 본 것이다.

고사(故事)에 따르면 ‘사돈(査頓)’이란 말은 중국 동진(東晋)시대부터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국가 행정을 이끌어 가는 주(朱)씨와 진(陣)씨 양가(兩家)가 대대로 혼인을 맺어 왔다. 그 중 대표적인 가문으로 주사(朱査)와 진돈(陣頓)양가를 꼽았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사돈지간(査頓之間)’이란 말이 후에 ‘사돈’이라는 보통명사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첫째는 중국고사를 살펴보면 당나라 중원 땅에 주(朱)씨 성을 가진 사람들과 진(陳)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한 마을에 수백호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공동묘지도 함께 사용하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해도 서로 다툼 없이 살아가는 우애가 대단한 군자(君子)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을 일컬어 ‘주진촌(朱陳村)’이라 하였다. 이들 중 주 씨 성을 가진 아들과 진 씨 성을 가진 딸이 한 마을에서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주 씨 성을 가진 아들의 이름이 ‘사(査)’이고, 진 씨 성을 가진 딸의 이름이‘돈(頓)’이었다. 그래서 ‘사돈(査頓)’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하는 고사이다.

당나라 천재시인 백거이가 이 같은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듣고 주진 촌을 방문하여 보니 과연 현인군자들이 사는 곳이라 감탄하여 장문(長文)의 5언 고시형 시(詩) ‘주진촌시(朱陳村詩)’를 지어 오늘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서주의 고풍 현에 주진이라는 마을이 있네. 이 마을에는 두 성밖에 없고, 그들은 대대로 서로 혼인했네.” 주진촌(朱陳村)/백낙천(白樂天)

고을이 멀어 관(官)의 일이 적고/ 사는 곳이 깊숙해 풍속이 순후하네/ 재물이 있어도 장사를 하지 않고/ 장정이 있어도 군대에 가지 않네/ 집집마다 농사일을 하면서/ 머리가 희도록 밖으로 나가지 않네/ 살아서는 주진촌 사람이요/ 죽어서도 주진촌 흙이 되네/ 밭 가운데 있는 노인과 어린이들/ 서로 쳐다보며 어찌 그리 즐거운가/ 한 마을에 오직 두 성씨가 살아/ 대대로 서로 혼인을 한다네/ 친척은 서로서로 모여서 살고/ 노인과 젊은이가 함께 노닌다네. 황계와 백주(白週)로/ 열흘이 멀다 하고 모여 즐기네/ 살아서는 멀리 이별하는 일 없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이웃에서 고르네/ 죽어서도 먼 곳에 장사하지 않아/ 옹기종기 무덤들이 마을을 둘렀네/ 이미 삶과 죽음이 편안하고/ 몸도 마음도 괴롭히지 않네/ 이런 까닭에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때로는 현손을 보는 사람도 있다네.

 

둘째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고사다. 고려 예종(睿宗, 재위1105~1122)때 명장 윤관(尹瓘~

1111)과 문신 오연총(吳延寵, 1055~1116)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1107년(예종2)에 윤관이 원수가 되고 오연총이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17만 대병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벌하였다. 이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우고 아홉 개 성을 쌓고 재침을 평정한 다음 개선하였다. 그 공로로 윤관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고 오연총은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두 사람은 지금의 길주인 웅주선(雄州城)최전선에서 생사를 같이 할 만큼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자녀를 결혼까지 시켜 사돈관계를 맺게 되었고 함께 대신의 지위에도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관직을 물러나 고령에 들어서는 시내를 가운데 두고 멀지 않은 곳에 살면서 종종만나 고생하던 회포를 주고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윤관 댁에서 술을 담갔는데 잘 익어서 오연총과 한잔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하인에게 술을 지워 오연총 집을 방문하려고 가던 중 냇가에 당도했다. 갑자기 내린 비로 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때 문득 냇물 건너편에서 오연총도 하인에게 무엇을 지워 가지고 오다가 윤관이 물가에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물었다.

“대감, 어디를 가시려는 중이오?”

윤관이 오연총을 보고 반갑게 대답했다.

“술이 잘 익어 대감과 한잔 나누려고 나섰는데 물이 많아서 이렇게 서 있는 중이오.”

오연총도 마침 잘 익은 술을 가지고 윤관을 방문하려던 뜻을 말했다.

피차 술을 가지고 오기는 했는데 그냥 돌아서기가 아쉬워 환담을 주고받다가 오연총이 윤관에게 말했다.

“잠시 정담을 나누기는 했지만 술을 한잔 나누지 못하는 것이 정말 유감이군요?”

이에 윤관이 웃으며 오연총을 향해 말했다.

“우리 이렇게 합시다. 내가 가지고 온 술은 대감이 가지고 온 술로 알고, 대감이 가지고 온 술 또한 내가 가지고 온 술로 아시고 ‘한잔 합시다’하고 권하면 역시 ‘한잔 듭시다’하면서 술을 마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오연총도 그 말에 흔쾌히 찬동했다. 이렇게 해서 나무등걸위(査)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편에서 ‘한잔 드시오’하면 한잔 들고 머리를 숙이면(頓首)저편에서 ‘잔 드시오’하고 머리를 숙이면서 반복하기를 거듭하여 가져간 술을 다 마시고 돌아 왔다.

오늘날 리모콘 건배이자 수작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일화가 이렇게 탄생한다. 이 일이 조종의 고관대작들에게 풍류화병(風流畵屛, 멋진 이야깃거리)으로 알려져서 그 후 서로 자녀를 혼인시키는 것을 우리 사돈(査頓, 나무 등거리에 앉아 머리 숙이며 술이나 마시자)맺기라는 말로 회자 되었다. 오늘날의 사돈(혼인한 집 부모가 서로 부르는 존칭)이 바로 여기에서 발원된 것이다. 두 사람은 냇가 나무 등걸에 앉아 이편에서 “한잔 드시오”하고 머리를 숙이면, 저편에서도 한잔 마시고는 “한잔 드시오”하고 머리를 숙이고 하여 가지고 간 술병이 다 비도록 권커니 작커니 했다는 이야기가<고려사> ‘열전’에 나온다. 두 사람이 벌인 ‘수작’(酬酌)이 참으로 풍류스럽다.

천년의 세월이 지나다 보니 양가의 촌수에 따라 ‘부모끼리는 맞사돈’, 아내 되는 사람은 ‘안사돈’, 더러는 ‘사부인(査夫人)’이라고도 부른다. 사돈의 부모나 형님에게는 사장(査丈)사돈의 조부모 에게는 노사장(老査丈), 노사부인(老査夫人)이라 칭한다. 이외 사돈의 사촌형제나 친척을 통칭하여 ‘곁사돈’이라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유래하여 서로 자녀를 결혼시키는 것을 ‘사돈’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서로 등걸나무에 앉아 머리를 조아린다’는 한자어‘사돈(査頓)’을 윤관과 연관시켜서 지어낸 얘기로 언어유희라고 생각된다. 사돈이란 말이 윤관과 오연총의 일화에서 나온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중국에서는 ‘사돈’을 ‘친가(親家)’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적어도 ‘사돈’이란 중국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영어에서 장모에 해당하는 말은 ‘mother-in-law’이다. 태어나면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일종의 법적계약에 의해 맺어진 어머니가 장모라는 것이다.

‘사돈’의 어원은 몽골어와 만주어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말에서 ‘사돈’은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그러나 몽골어 ‘사돈(xaдam)’은 (酬酌)일가친척을 일컫는 말이다, 몽골에서는 우리나라를 ‘사돈의 나라’라고 부른다. 이것은 칭기즈칸 시대에 몽골이 고려와 형제의 나라로 맺어진 것에서 유래한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사돈의 어원은 한자어가 아니고 몽골어를 한자로 ‘사돈(査頓)’이라고 전사한 것이다. 몽골어에서 사돈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남태우 교수:중앙대학교(교수)▸중앙대학교 대학원 문헌정보학과 박사▸2011.07~2013.07 한국도서관협회 회장 ▸2009.07 한국도서관협회 부회장▸2007.06~2009.06 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 ▸2004.01~2006.12 한국정보관리학회 회장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