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台祐 교수의 특별기고
술의 신(酒神) 디오니소스(Dionysos) 신화 이야기(18)
신과 인간의 사랑, 제우스와 세멜레
카드모스의 딸,
세멜레는 그분과 사랑으로 교합하여 당당한 아들을 많은 즐거움을 주는 디오니소스를 낳아 주셨으니 죽게 마련인 여인이 불사의 아들을 낳았다.
위의 시 내용은 헤시오도스(Hēsíodos) <신들의 계보(Theogoni)>에 기술된 반신반인인 디오니소스가 태어난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테베(Thēbai) 시의 건설자인 카드모스(Kadmos)는 죽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인간의 몸으로 그리스 신화의 조화와 일치의 여신인 하르모니아(Harmonia)와 결혼했다. 인간이 여신과 결혼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처녀 세멜레(Semele)가 태어났다. 타고나면서부터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었던 세멜레는 성숙한 처녀가 되자 많은 남신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Semele/ John Duncan
어느 날 포세이돈이 제우스 만남을 청하였다.
“제우스는 오늘 아무도 안 만날 겁니다.”
헤르메스가 포세이돈에게 말했다. 그러나 포세이돈은 고집을 꺽지않았다.
“가서 내가 왔다고 말해주시게.”
“장담하는데,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헤라와 잠자리에 들어 있는 건가?”
“아뇨. 다른 일이예요.”
헤르메스가 대답했다.
“아, 알겠다. 가니메다스(Ganymedes)와 같이 있는 게로군.”
“아뇨. 사실은 몸이 안 좋아요.”
“그거 정말 안됐군.”
자신도 모르게 흥미를 느끼며 포세이돈이 말했다.
포세이돈은 바다와 지진의 신으로 제우스의 형이었다. 둘은 여러 가지로 닮은 점이 많았다. 어지간해서는 아프지 않는다는 것도 그중 하나이다.
“원인이 뭔가? 말해보시게. 내가 자네 삼촌 아닌가? 나한테는 말을 해도 돼.”
“아기를 낳았어요.”
“우리 가문에 또 한 명의 자웅고동체가 생겨났군. 짐작도 못했는데! 임신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잖은가?”
그러자 헤르메스는 아기가 정상적인 자궁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럼 아기가 아테네처럼 그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뇨. 아기는 그의 허벅다리 안에 있었어요.”
“그의 기상천외한 능력은 언제 들어도 놀라워.”
포세이돈은 이미 그날 하루는 심심치 않을 정도로 충분히 놀란 터라 아기의 방위에 걸려있는 짧고 뭉뚝한 황소 뿔을 보지 못한 것 같다고 헤르메스는 생각했다.
“아기의 이름은 디오니소스예요. 헤라에게 들키면 안 돼요.”
“아기 엄마는 누군가?”
포세이돈의 물음에 헤르메스는 긴장을 풀며 말했다.
“이상하지 않아요? 최소한 아이 엄마는 알아야 하는 게 정상인데, 하여간 아기 엄마는 세멜레랍니다.”
“오 …… 한데 …… 그녀가 누구지?”
이상의 대화는 2세기의 풍자시 작가인 루시안(Lucian)의 기록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위와 같이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신을 그리스의 숭배자들이 일반적으로 ‘디오니소스(Dionysos)’라 부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루시안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태어날 때부터 디오니소스로 불렸다고 한다. 그리스인들이 ‘바코스(Bacchos)’를 그의 별명으로 생각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바코스는 사티로스 마에나데스(Satyros Maenades)들이 그를 기리며 주연을 벌릴 때 외쳐 되던 이름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바쿠스(Bacchus)야말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진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현대에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이름도 바쿠스다. 이제 제우스가 세멜레를 만난 로맨스와 그들의 아들 디오니소스의 임신에 이르기까지를 엮어보고자 한다.
어느 날 순백의 긴 예복을 입은 12명의 처녀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엄숙하게 제단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 행렬을 이끄는 여인은 카드모스 왕의 딸 ‘세멜레(Semele)’이다. 그녀는 튼실한 수퇘지와 하얀 황소를 제물로 가져왔다. 널리 만물을 내다보는 모든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올림포스 산에서 이 광경을 굽어보고 있었다. 제우스에게 감사를 표하거나 그의 화를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이들이 많이 있었고, 자신을 숭배하는 이들을 제우스는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제우스는 특별히 이 작은 행렬을 눈여겨보았다. 제우스는 독수리로 변신해서 테베의 하늘 위를 낮게 비행하며 이 친숙한 의식을 구경했다.
사제 한 명이 오래된 주문을 영창한 후 차례대로 두 동물의 목을 땄다. 동물들의 목에서 솟구쳐 오른 뜨거운 피가 제단 아래에 놓인 두 개의 큰 대접 속으로 고여 들었다. 사람들이 피가 가득 든 대접을 들어 처녀들의 입에 대주었다. 대접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후드득 처녀들의 예복 위로 떨어져 그녀들의 배를 적신 다음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지난밤 기이한 꿈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던 세멜레는 아버지의 예언자인 테이레시아스(Tiresias)에게 조언을 구했다. 세멜레의 이야기를 듣고 그 역시 걱정에 휩싸였다. 세멜레의 꿈에 위험을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로서는 그 위험이 피할 수 있는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수염이 허연 테이레시아스는 늙어 꼬부라진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제단에 도착했다. 제우스를 향한 찬송을 함께 부르기 위해 때맞춰 나타난 것이다. 이 찬송으로 의식은 이제 막을 내릴 터였다. 테이레시아스는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에 흐뭇해하면서 제물의 살을 가르는 사제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때 그의 시야 한끝으로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있는 독수리 한 마리가 들어왔다. 의식을 마친 처녀들은 들판을 가로질러 아소포스 강둑으로 갔다. 그녀들은 피로 얼룩진 예복을 벗어 던지고 피 묻은 세멜레의 머리를 감겨주었다. 그러고는 시원한 물의 부드러운 애무를 즐기며 수영을 즐기기 시작했다.
세계는 아직 젊었다. 인간 여인들이 낳은 자손과 여신들의 자손이 멀리 떨어져 지내지 않았으며, 신들은 여전히 대지 위를 활보하고 다녔다. 때문에 세멜레가 하녀들과 수영을 즐기는 동안 강의 세계에 사는 불멸의 존재들인 샘의 정령 나이어드스(Naiads)들도 그녀들 곁에서 수영을 하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인간의 자손처럼 나이어드스들 역시 아름답고 순진했으며 그만큼 위태로워 보였다.
세멜레의 몸속에서는 사실 신과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전쟁의 신인 아레스(Ares)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부적절한 사랑의 결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세멜레의 어머니 하르모니아(Harmonia)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멜레의 아버지는 인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방에서 온 이방인으로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테베의 왕위까지 오른 인물이다. 테베 시는 보에오티아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요새가 잘 구축된 가파른 언덕위에 서 있었다. 카드모스 왕과 하르모니아의 결혼식에는 올림포스산의 신들까지 참석했으며, 아홉 명의 뮤즈들이 결혼식 축가를 불러 주었다.
세멜레는 얼굴과 황금빛 머리칼만 물위로 내놓은 채 유연하고도 힘찬 몸짓으로 물살을 헤쳐 나갔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하면서는 더욱 힘차게 다리를 움직였다. 이 모습을 독수리로 변신한 제우스가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처녀들의 몸놀림은 너나 할 것 없이 아름다웠다. 그중에서 세멜레의 모습은 특히 돋보였다. 매끈한 피부에 미끈한 몸매, 순간 제우스는 허벅다리 위쪽으로 무언가가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그의 아들 디오니소스가 제우스의 허벅지에 탄생되는 순간의 전율의 경고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한 큐피드의 화살이 그의 가슴에 꽂혀버린 것을 느꼈다. 아직은 누구도 그 의미를 설명할 수 없지만, 화살에 긁힌 상처는 분명 하나의 징조였다. 화살촉이 누구의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사랑의 신 에로스가 겨눈 화살에 벌써 다섯 번째로 맞은 것이다. 결국 제우스는 또다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열 여자 마다하는 남자는 없다”는 속담이 있다. 남자들은 아름다운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데 사용되는 말이다. 그래서 모든 인류의 역사는 대부분 남자들이 주류인 것 같지만, 그 배경에는 여자, 특히 미인들에 의해 좌우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남자가 미인을 밝히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실상은 신들로부터 인간에게 옮겨온 것이니, 남자는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여자에게 모든 것을 걸만큼 무모함을 안고 태어난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여인이 제우스의 눈을 벗어날 리가 없었다.
은바퀴가 달린 노새 수레를 타고 세멜레가 테베로 돌아가자 제우스도 올림포스 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제우스의 머릿속은 온통 세멜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산들바람에 살랑살랑 춤추는 그녀의 머릿결과 볼그레한 살결, 그리고 섬세한 목선 제우스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밤이슬이 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사실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는 처녀총각들의 꽁무니를 뒤쫓아 다니다가 상황만 되면 환한 대낮에도 그들을 덮치곤 했다. 하지만 제우스는 안달하며 기다릴망정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태양의 신 헬리오스는 왜 서쪽으로 가는 여정을 재촉하기 위해 그의 말들에게 채찍을 휘두르지 않는 걸까? 달은 왜 이토록 늑장을 부리며 나타나지 않는 걸까?
드디어 어둠이 대지위에 몸을 일으키자 제우스는 새의 날개만큼이나 가볍게 한 줄기 생각만큼이나 빨리 한걸음으로 광대한 대기를 가로질렀다. 두 번째 걸음으로 테베시의 성문 앞에 다다르고, 세 번째 발걸음으로 카드모스 왕의 궁전 안으로 들어섰다. 궁전 문은 마치 그를 반겨주기라도 하려는 듯 고요히 열려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 제우스는 이미 세멜레의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자, 이제 신들의 왕인 제우스는 왕가의 처녀와 어떻게 사랑을 나눌까? 지금 이 순간까지도 다음날 아침 변함없이 처녀의 몸으로 깨어나리라 생각하고 있는 처녀와? 제우스는 먼저 황소의 뿔과 머리를 가진 잘생긴 청년의 모습으로 세멜레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황소의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카드모스 왕의 누이인 에우리페(Aerope)를 사로잡았던 목소리도 아마 지금처럼 부드러웠을 것이다.
에우리페는 데이지 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이 입심 좋은 동물의 목에 걸어주었다. 그리고는 황소의 입속에 꽃들을 넣어 주고는 겁도 없이 편안한 등 위에 올라탔다. 순간 제우스의 다른 목표물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다로 실려 갔다.
제우스는 사랑을 나누는 동안 여러 차례 변신을 거듭했다. 사자나 표범으로, 혹은 뱀이 되어 연인의 몸을 칭칭 감기도 했다. 그러다가는 다시 담쟁이덩굴과 포도나무 잎사귀로 머리를 장식한 당당한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의 숨결에서는 천상의 향기가 흘러나왔으며, 그의 입에서는 넥타르의 맛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제우스는 이런 변신을 그만두었다.
그들은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은 결코 평범한 연인이 아니라고 제우스가 세멜레에게 말했다. 크로노스가 자신의 아버지이며, 모든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바로 자신이라고, 또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되어 있다고…. 제우스가 말했다. “우리 아들도 신이 될 것이오. 그리고 그만의 방식으로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강렬한 신이 될 것이오. 때때로 내 위에 군림할 수도 있을 만큼 강력한 신, 그리고 당신, 나의 아름다운 세멜레여, 나는 당신을 올림포스 산으로 데려갈 것이오. 그곳에서 당신은 내 아들의 어머니, 내가 선택한 배우자로 영원히 살게 될 것이오.”
세멜레는 제우스의 말을 곰곰 곱씹어보았다. 그녀 이전에도 제우스가 사랑했던 님프나 인간은 많았다. 고모인 에우리페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제우스가 그의 법적인 아내이자 누이인 헤라와 나란히 왕좌에 앉아서 하늘과 대지를 다스리는 그 올림포스 산으로 올라간 여인은 한 명도 없었다.
제우스는 쾌활하게 말했다. “헤라와는 이혼할 생각이오. 그녀는 이제 지긋지긋해. 그녀의 자리에 당신이 앉는 거야.” 이런 제우스 앞에서 세멜레는 차마 직접적으로 의심을 드러낼 수 없었다. 대신에 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버지의 예언자가 장님이 된 사연을 들려주었다.
어느 날 우연히 뱀이 교미하는 것을 본 테이레시아스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 뱀을 죽였다. 그러자 암컷 뱀이 죽었고, 그 순간 테이레시아스는 여자가 되었다. 그 후 7년 동안은 최고의 매춘부가 되어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7년 전 같은 자리에서 또 뱀이 교미하는 것을 보자 그 자리에서 다시 뱀을 죽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자 뱀이 죽었고, 순간 테이레시아스는 다시 남자가 되었다. 그 때 올림포스 산에서는 제우스와 헤라가 다투고 있었다. 다투는 이유는‘성관계를 했을 때 누가 더 쾌락을 얻는가?’였는데, 헤라는 남자, 제우스는 여자 편을 들었다. 싸움이 끝나지 않자 제우스는 남성과 여성을 모두 경험한 테이레시아스에게 물어보자고 제안하자 헤라는 동의한다. 올림포스 산으로 불려간 테이레시아스는 ‘남자가 1을 경험할 때 여자는 그것의 열 배는 경험합니다’라고 이야기 하여 결국 제우스의 승리로 끝났다. 분노한 헤라는 테이레시아스의 눈을 멀게 하였고, 자기편을 들어주어 보답을 하고 싶었던 제우스는 예언하는 능력과 장수하는 능력을 주었다고 한다. 그 후 테이레시아스는 그리스 전체를 떠돌며 예언을 하였는데, 오이디푸스의 비밀을 알려준 것도 그였고, 알크메네의 불륜을 알려준 것도 그였다. 그리고 죽은 후 지하 세계에서도 오디세우스에게 고향에 무사히 돌아가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헤라가 테이레시아스의 대답에 그토록 화를 낸 이유가 뭐죠라고 물었다. 그거야 그녀가 논쟁에서 졌기 때문이지. 그러자 세멜레는 아뇨, 그 이상의 이유가 있을 거예요. 정말 모르겠어요? 세상 모든 진실 중에서 그녀가 비밀에 부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마도 이 한 가지뿐 일걸 요라고 자답하였다.
고대 신들의 숭배자들 사이에서 제우스의 불륜이야기는 아주 유명하다. 개중에는 자신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이런 간통의 결과로 자신의 조상이 태어났음을 발견하게 되는 이들도 있었다. 제우스의 연인들 중에서 유명한 세멜레와 제우스의 첫 만남은 500년경 그리스 서사시 시인인 논노스(Nonnos)에 의해 <디오니시아카 혹은 디어니스 이야기(Dionysiaka or The Story of Dionysos)>라는 서사시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첫날밤 이후 제우스는 자주 세멜레를 찾았다. 얼마 후 몸에 이상을 느낀 세멜레는 제우스의 예언대로 그의 아이를 가진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제우스는 헤라에게 신물이 났다며 세멜레와 약속했었다. 하지만 말로만 그럴 뿐, 그에 합당한 행동은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그저 밤마다 세멜레의 침실로 잠입했다가 동이 뜨기 전에 사라질 뿐이었다. 게다가 세멜레의 어머니인 하르모니아와 아주 가까운 친척관계에 있었으면서도 하르모니아나 카드모스에게 세멜레와의 결혼에 대해 일언반구 말고 꺼내지 않았다.
결국 임신 사실을 언제 어떤 식으로 알려야 할지는 세멜레 혼자 알아서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말을 안 하고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임신 사실이 곧 모든 이들에게 들통 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세멜레는 유모인 베로에(Beroe)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세멜레의 유모이기도 했던 베로에는 에피다우로스 출신의 노예로 세멜레를 아끼는 하녀였다. 세멜레가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뿐이었다.
세멜레는 베로에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제우스의 목소리며 얼굴 생김새, 연인다운 행동거지와 그가 한 약속까지 세세하게 들려주었다.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베로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가만히 들어주었다. 베로에의 반응에 힘을 얻은 세멜레는 언니인 오토노에(Autonoe)와 이노(Ino), 그리고 동생 아가베(Agave)에게도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신들의 왕이 자신의 연인라는 세멜레의 말에 자매 셋은 콧방귀만 꾸었다. 할 수 없이 세멜레는 부모님에게도 즉각 이 사실을 알렸다. 언니들이 먼저 부모님에게 고자질할까 봐서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세멜레의 이야기에 카드모스 왕과 하르모니아는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다소 미심쩍어 하는 것 같았다. 경험으로 볼 때 아름다운 인간 처녀들이 야밤에 나타난 신들로 인해 임신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신보다는 인간 사내들이 문제인 경우가 다 많았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심경을 숨기고 손자가 생기게 되었다면 그 작자가 누구든 애비를 만나볼 것이라고 말했다.
임신동안 세멜레는 구불구불 휘감고 올라가는 담쟁이덩굴과 덩굴손 줄기, 넓게 감싸는 포도나무 잎사귀, 도금양의 향기로운 잎사귀와 열매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녀는 자주 머리에 꽃을 꽂거나 포도나무, 도금양, 담쟁이덩굴로 화관을 만들어 썼다. 양치기의 팬파이프 소리가 들리기라도 할라치면 화관을 쓴 채 베일도 내리지 않고 궁전에서 뛰쳐나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헤매며 춤을 추곤 했다. 그렇게 춤을 추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뱃속의 아기도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발을 구르는 게 느껴지기도 했다.
인간세계의 세멜레를 연인으로 삼은 이후 자연히 그는 아내인 헤라에게 소홀했다. 그러자 질투의 화신 헤라는 제우스를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인간 세상에 있는 세멜레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제우스가 세멜레를 범했다는 의심을 했다. 헤라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제우스가 밤마다 세멜레의 집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눈치 빠른 헤라가 모를 리 없었다.
세멜레가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된 헤라는 또다시 강한 질투심에 휩싸였고, 세멜레를 처치 해버리겠다고 결단을 내렸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헤라는 머리가 하얗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 유모 베로에(Berau)로 변신해 세멜레의 방을 찾았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지팡이를 잡은 헤라의 모습은 영락없이 세멜레의 유모와 닮아 있었다. 유모로 가장한 헤라는 어렵지 않게 세멜레의 방에 들어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아가씨 댁에 오는 남자가 정말 제우스 신일까요? 요즘엔 많은 남자가 어여쁜 처녀를 꼬여내기 위해 신 행세를 한답니다. 그 사람이 자기 입으로 제우스라고 했다고 곧이곧대로 믿지 마세요. 아가씨가 욕심나서 꾸며낸 이야기일지도 몰라요. 오늘밤 한번 확인해보는 건 어때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신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말이에요.”
그러자 세멜레는 고개를 가웃하며 되물었다.
“유모, 그런데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어요?” “그야 간단해요. 만일 제우스가 아이 아빠라면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래요. 하지만 두려운 일이지요. 그러니 일단 진실을 알아야 해요. 그가 정말 제우스이라면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셰요. 사람으로 변신하지 말고 하늘에서 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휘황찬란한 차림을 하고 오도록 요구하세요. 그렇게 하면 그가 제우스인지 알 수 있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난 아이의 아빠가 제우스라고 인정할 수 없어요.”
꼬임에 넘어간 세멜레는 제우스가 찾아오자 소원을 들어달라고 청했다. 제우스는 “어떤 소원이든지 말해 보거라. 스틱스강을 걸고 소원을 들어주지”라고 답했다. 세멜레가 최고의 신 제우스의 본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하자 제우스는 뒤늦게 후회했다. 인간인 세멜레는 제우스가 뿜어내는 엄청난 광휘와 열기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고, 스틱스강을 걸고 한 맹세는 제아무리 제우스라도 함부로 깰 수 없었다.
“실은 난 당신이 제우스신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아요? 나에게 그런 행운이 있을 리 없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내가 가장 원하는 소원은 당신의 진정한 모습, 제우스신의 모습을 보는 거예요. 그만큼 나도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하늘의 왕이며, 벼락의 신으로 광채를 발하는 제우스의 모습을 보고 싶어요. 맹세한 대로 보여 주세요.”
제우스와 세멜레/ Gustave Moreau
<다음호 계속>
남태우 교수
▴문학박사/중앙대학교 명예교수▴전남대 교수▴중앙대학교 도서관장▴중앙대학교 교무처장▴중앙대학교 문과대학장▴한국정보관리학회장▴한국도서관협회장▴대통령소속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
◇ 필자 남태우 교수 경력:▴전남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중앙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중앙대학교 중앙도서관장▴중앙대학교 교무처장▴중앙대학교 문과대학장▴한국정보관리학회장▴한국오픈엑세스포럼회장▴한국 문헌정보학교수협의회장▴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한국도서관협회장▴중앙대학교 명예교수(현재)▴현재 건전한 음주문화 선도자로 활동하고 있음
◇ 음주관련 저작리스트:▴비틀거리는 술잔, 휘청거리는 술꾼이야기(1998)▴주당별곡
(1999)▴술술술, 주당들의 풍류세계(2001)▴알코올의 야누스적 문화(2002)▴음주의 유혹, 금주의 미혹(2005)▴주당들의 명정과 풍류(2007)▴홀 수배 음주법의 의식과 허식(2009)▴술잔의 미학과 해학(2013)▴은자의 명정과 청담세계(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