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別의 세월

秋別의 세월

 

임재철 칼럼니스트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늦가을이 되었다. 요즈음 산과 물을 보는 것은, 그것은 슬픔이다. 가을이 빚어낸 장관이요, 가을의 마법인 노랗고 붉은 단풍이 점차 사라지고 마른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떨어진다. 거리엔 낙엽이 이리저리 뒹굴고 晩秋의 삼라만상, 아침 기온이 떨어지고 바람이 달라졌다. 크게 춥지 않아도 바람은 차갑고 맑다. 서풍 소리가 들리고 세월이 급하다.

 

가을의 이 계절, 조금 있으면 눈발이 날리고 잎새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절이 된다. 그 누구도 막지 못하는 시간의 흐름이다. 왜 이리 세월은 표정 없이 빨리도 지나가는가. 김민환 노교수의 페북 표현을 빌리면 “오메, 저놈의 해가 또 지네.”처럼 세월이 아깝고 빠름을 느낀다. 퇴장하는 시간들의 무게가 씁쓸하고 시리다.

머무름 없이 가는 게 세월이고 인생인 것 같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물은 다 지나간다. 생각도 사상도 주의 주장도 다 변하기 마련이다. 세월 앞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라는 진실뿐이다. 이 세상에서 고정불변한 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일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이 가을이란 세월의 강도 마찬가지다.

가을 가을이 애닯다. 우리가 읽었거나 알고 있는 ‘세월’이란 경구 중 강렬한 것이 너무 많지만 현대 중국인의 정신지도자인 故 지센린(季羡林)은 아흔일곱에 내놓은 수필집 <다 지나간다>에서 무릇 “천지란 만물이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고, 세월이란 끝없이 뒤를 이어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다.”라며 유수(流水)같이 흐르는 세월이 서글펐지만 곰곰 생각해 보니 장자의 말처럼 나쁜 것들도 다 그러할 것 같아 애달프거나 슬퍼하지 않는다고 썼다.

‘세월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이란 박인환 시인의 싯구도 떠오른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우리가 어제는 생각할 수 있어도 다시 살 수는 없다. 그래서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그대의 하루하루를 그대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며 “현재를 즐겨라, 되도록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고 했을까. 도연명(陶淵明)은 ‘청춘은 다시 오지 않고(盛年不重來)…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歲月不待人)’이라는 詩도 남겼다.

힘없고 노쇠한 민초의 필자로서 짐짓 깊게 느껴지는 가을 하늘 아래 선선한 갈바람을 맞으며 인생의 덧없음과 깊은 정한(情恨)의 서정과 깊이를 다 담아낼 수 없지만, 세월의 무상함과 흘러간 시절을 후회한다. 무엇보다 아쉬운 세월의 공허함이 크지만 늘그막에 허여된 촌음을 더욱 아껴 남은 시간의 자본을 써 나가야겠다는 생각이다. 후회는 삶의 규범 같은 것이고 아쉬움은 인생의 일상이지만 말이다.

거침없이 가는 늦가을 오후 문득 깨달은 것은, 멈춰진 것처럼 보이는 모든 시간들이 영혼에 따뜻한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준 빛과 사랑의 수다들이라 할까. 가령 사계절을 번갈아 가며 주는 햇빛, 때로는 구름에 흐리고 바람 불고 가끔 비와 눈을 뿌려주고 하늘과 땅이 결코 인간의 삶과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지금 작별의 컷을 알리는 일엽(一叶) 가을도 그렇다.

우리는 또 석양이 서쪽으로 지면 그 어느 날이라도 자글거리며 세상과 호흡하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세월은 무자비하고 정답 없는 인생의 여정에서 모든 것이 녹슬고 도끼자루 썩어가고 밍밍해도 나그네는 무릇, ‘술 한 잔’ 기울이면서 지상과 우주의 삶을 이야기하면 된다. 세월의 잔을 비우고 마음의 정을 채우는 술을 받는 게 나그네의 안온한 秋別의 근성이고 정취이리라.

비록 서둘러 가는 세월을 떠나보내며 술잔 앞에 앉으면 쓸쓸함과 외로움이 스며들고, 애면글면 버겁게 삶을 열어가는 우리이지만 삶이란 길이 본디 구불구불하고 다 거기서 거기다는 걸 알기에, 도리어 속세의 근심을 멀리 보내고 다음 맑은 날을 위해 가고 싶은 곳으로 걷다 보면, 갈수록 세월이 메아리가 되어 가슴이 뛰고 삶이 탐탁해지고 생각이 웅숭깊어 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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