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宗家의 기품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성주 윤동마을

초 겨울에 떠나는 여행

 


200년 宗家의 기품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성주 윤동마을

 

 

성산가야의 옛 터전이던 성주군. 여행지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고장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고장에 비해 이름난 관광지를 품고 있지 못하다. 성주를 말하면 으레 ‘상주’를 먼저 떠올리고, 대표 특산물인 ‘참외’를 이야기해야 “아~ 성주참외!” 하는 정도다. 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돼 있지 않지만, 성주는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그 매력이란 옛 문화와 집안의 가풍을 유지하며 생활하는 전통마을에서 기인한다.

성주는 커다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이지 않고 평안을 유지해 온 몇 안 되는 지역 가운데 하나다. 사방이 산으로 가로막혀 외부와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던 자연환경은 훼손되지 않은 전통마을을 보존하게 만들었다.

성주를 대표하는 전통마을은 ‘윤동마을’과 ‘한개마을’이다.

성주군 수륜면 소재지를 지나 약 1㎞쯤 가면 윤동마을 입구에 도착한다. ‘윤동’이라고 새겨진 큰 바위 뒤로 여러 채의 기와집이 보인다. 그중에서도 마을 중앙에 유독 눈에 띄는 집 한 채가 있으니, 이곳이 ‘사우당 종가’다. 사우당은 조선 정조 18년(1794) 사우당 김관석의 후손들이 조상을 받들기 위해 건립했다. 평지에서 산 아래까지 여러 채의 건물이 길게 늘어서 있어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멋진 소나무가 정원수로 심어진 기와집이 보이고, 그 뒤로 주인이 기거하는 안채가 자리한다. 종가의 주인공격인 사우당은 안채 뒤에 별도의 담장과 문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다. 빛바랜 기둥, 처마에서 묻어나는 세월의 흔적, 아궁이에 불을 땔 때마다 묻어난 그을음이 고택(古宅)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안타까운 것은 고택임에도 사우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새롭게 단장했다는 점. 그렇지만 건물마다 마루나 처마 아래에 전통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민속품들을 배치해 놓아 체험객들이 자연스레 우리 것을 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현재 고택과 가풍을 지키며 도시인들에게 전통문화를 알려주는 이는 사우당 21대 종부 류정숙씨다. 류씨는 여행자들에게 사우당이 그저 고택 체험장으로 스쳐 지나는 장소가 아닌 다도(茶道)와 민속놀이 체험, 전통예절 배우기 등을 통해 조상들의 삶의 멋과 고택의 품격을 몸으로 체득하기를 바란다. 벽면이 다기세트로 가득한 다도 체험장에서 직접 차를 대접하며 다도를 알려주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겐 할머니처럼 친근한 목소리로 웃어른에 대해 공경할 줄 아는 예절을 일러준다. 산만한 아이들도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며 종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자신도 모르게 전통문화에 빠져든다. 사우당 뒤편에는 ‘6.25 피난굴’이라는 작은 동굴이 있다. 불도 들어오지 않고 여러 명이 들어가기에도 협소한 이 피난굴은 사우당이 종가로서 갖는 자부심을 보여준다. 6.25 전쟁이 났을 때 현 종손의 선친인 김관희씨가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문화재를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 달여에 걸쳐 대나무 숲속에 굴을 팠다. 북한군이 성주 일대에 나타나자 자녀와 일가족은 가야산 밑으로 피난을 보내고 종손과 종부는 족보, 문집, 간찰 등 종중(宗中) 유물과 함께 동굴에서 숨어 지냈다고 한다. 지금이야 대나무를 베어내고 동굴로 가는 길을 내서 그 존재를 쉽게 파악할 수 있으나, 당시에는 대나무숲이 우거져 바깥에선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윤동마을과 함께 성주 전통마을의 쌍벽을 이루는 곳이 한개마을이다. 약 560년 전인 조선 세종 때 이곳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성산이씨들이다.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가 정착해 살면서 아직까지도 동족마을을 유지하며 선조의 생활문화상을 간직하고 있다. ‘한개’라는 이름은 크다는 뜻의 ‘한’과 개울이라는 의미의 ‘개’가 합쳐진 말이다. 북쪽으로는 영취산이 좌청룡 우백호로 우뚝 솟아있고, 서남쪽으로는 흰내가 유유히 굽이치는 곳에 위치해 영남 제일의 길지(吉地)로 꼽힌다.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지어졌다. 가옥들은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대지의 특성에 따라 안채와 사랑채, 부속채 등이 배치돼 있으며 내외 공간의 구조가 다양하다. 한주종택은 영취산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사랑채와 안채의 대문이 따로 나있다. 북비고택은 조선 영조 때의 선비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사모해 북향으로 문을 내고 은거한 곳이다.

성주 땅이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을 많이 품고 있음을 증명하는 곳으로 세종대왕자태실을 들 수 있다. 월항면 인촌리 태봉 정상에 위치한 세종대왕자태실은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 사이에 조성된 19기의 태실(胎室)이 남아 있다. 수양대군을 비롯한 세종의 적서 18왕자와 왕손 단종의 탯줄과 태반을 안장했다. 예로부터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했다. 왕실에선 태가 국가와 왕실의 안녕과 관련이 있다고 믿어 더욱 소중하게 다뤘다. 그런 이유로 전국에서 풍수가 뛰어난 길지를 찾아 태를 묻어 보관했다. 태실은 조선왕조 태실의 의궤에 따라 지상에 석실을 만들고 그 속에 분청사기로 된 태항아리를 묻었다. 그 위에는 기단석, 중동석, 개첨석으로 이뤄져 있다. 전체 19기의 태실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5기는 그렇지 못하다. 이유인 즉 수양대군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을 반대한 동생 금성대군?한남군?영풍군?화의군과 계유정란 때 죽은 안평대군의 태와 장태비 등의 태실은 파헤쳐져 산 아래 던졌는데, 1975년에 기단석을 찾아서 복원했다.

전통마을과 태실이라는 다소 어려운 여행 소재를 벗어나 아이들과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면 가야산야생화식물원이 제격이다. 성주군에서 조성한 국내 유일의 군립식물원으로, 야생화를 주제로 꾸민 전문식물원이다. 1000여평 규모의 2층 야생화 학습원에는 멸종위기 2급식물인 대청부채, 울릉도에서만 자생하는 섬시호 등 희귀 야생화를 비롯해 가야산에서 자생하는 야생화 600여종이 식재돼 있다. 비록 겨울철이라 야외에서 야생화를 볼 순 없지만 대신 종합전시관과 유리온실에서 녹색의 싱그러움을 만끽할 수 있다.

식물원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심원사’라는 조용한 사찰이 있다. 등산객으로 발 디딜 틈 없는 가야산이라도 이곳만큼은 딴 세상인 양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탓에 조용히 절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다. 본래 심원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고찰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18세기 말경에 폐사돼 빈 터로 남아 있었다. 근래 들어 심원사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대웅전, 극락전, 약사전 등을 차례로 중창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

겨울이라 따끈한 아랫목을 찾게 되지만 이럴 때 과감히 몸을 움직여 성주 전통마을로 여행을 떠나보자. 오랜 세월 선조들의 삶의 흔적과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전통마을에서 우리 것을 배우고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 기다릴 것이다.<자료 제공 한국관광공사>

경북 성주군 수륜면 478-1, ☎ 성주윤동마을 010-8855-0114, 성주한개마을보존회 054-931-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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