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돈의 酒馬看山 ⑨
삶의 고락을 술과 함께 노래한 여류사인(女流詞人) 이청조
물과 불이 술이 되어 조화를 이루듯이 사람들도 그렇게 뒤섞이며 삶을 이루어간다. 그 속에서 술과 함께 불꽃같은 삶의 길을 거쳐 간 이들도 많다. 그러나 그 불꽃이 세상을 밝히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짧은 생애에서 자연과 술을 노래하면서도 애끓는 정과 불타는 예혼을 담아내어야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상을 맘껏 희롱하지 못한 회한이나 처절한 사랑의 아픔들이 술과 함께 배여 나온다. 못다 이룬 세사(歲事)가 그대로 녹아드는 셈이다. 그 절박함의 두께만큼 술이 되고 시가 되고 눈물도 되어 뭇사람들의 마음을 적시는 것이다. 봄비에도 아픔을 가누지 못하는 여류사인(女流詞人) 이청조(李淸照)의 노래는 그래서 더욱 애달프다.
이청조(1084~1151경)는 산둥 성 제남(濟南)출신으로 양송(북송과 남송)대를 살았으며, 호는 이안거사(易安居士) 또는 수옥(漱玉)이라 한다. 그녀는 편안하게 지내는 사람이라는 호(號)처럼 문명이 뛰어난 집안에서 태어났고, 당대의 명문가 출신 남편(趙明誠)과 결혼하였으니 그 유복함은 이루 말로 다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더욱이 그녀의 재능은 맑기가 샘물과 같고 미모는 한 떨기 꽃처럼 빼어났으니 여기에 무엇을 더할 수 있을까!
이청조는 ‘어가오(漁家傲)’에서 “금 술잔에 가득 찬 좋은 술을 함께 즐기니 취하기를 사양마라(共賞金尊沉綠蟻 莫辭醉)”며 남편과 봄날의 정취에 흠뻑 빠지기도 했다. 봄비에 바람이 더한다며 취흥을 이기지 못하는 부인과 이를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남편은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다. 거기에다 행복에 겨운 나머지 “자신이 평범한 꽃들과 다르다(此花不與群花比)”며 오기까지 보탠다. 결혼하자마자 정적(政敵)가문이 된 기구한 인연이지만 그 만남은 천상의 결합이요, 삶과 술이 하나가 되는 무아의 경지 그 자체였다. 서로가 금석문에 침잠하면서 술과 함께 애정을 키워가던 꿈같은 시절도 남편의 빈번한 외직 근무로 서서히 막을 내린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고 했던가? 아름다운 그 세월만큼이나 떨어져 있는 고통은 더욱 컸을 것이다. “주렴을 거두니 가을바람이 불어오는데(簾捲西風), 시들어가는 국화보다 더 야위어 가네(人比黃花瘦)”라며, 그 시름을 시에 담고 술에 취하고 깨기를 되풀이한다. 그러나 초췌해진 그녀의 모습은 술로 인한 것도 아니요(非干病酒), 쓸쓸한 가을 때문도 아니라(不是悲秋)는 이청조, 그녀의 비련은 40대 중반 남편과 사별하면서 나락으로 치닫는다. 북송이 금나라의 침략으로 수도가 함락된 후 남송에서 지방관을 맡았던 남편이 병사한 것이다.
이어 이청조에게 있어 봄날은 가고 가을 소슬바람과 겨울 한풍이 몰아치게 된다. 창가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와 사에 피눈물을 쏟아낸다. 송사(宋詞)의 백미, ‘성성만(聲聲慢)’은 노래이면서도 처절한 탄식이요, 들썩이는 어깨 너머로 눈물이 가득한 울음소리였다. “찾고 또 찾아봐도(尋尋覓覓) 차디차고 쓸쓸하고(冷冷淸淸) 처량하고 비참하고 적막하다.(凄凄慘慘戚戚)” 이보다 더 아픈 표현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 애절함이 천상에 닿을 듯하다.
남편을 여의고 전란 속에서 타향을 전전하던 그녀에게 남은 것은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고단한 삶에 대한 회한이었다. 술은 만년의 그녀에게 유일한 친구이자 동반자였다. 꽃이 피고 달이 뜬 한 밤에 이미 세상을 떠나 없는 남편과의 다정했던 옛날을 회상하면서, 계절의 변화조차도 홀로 가늠하기 힘들어 한다.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리는데(但餘雙淚), 한줄기 장맛비 같네(一似黄梅雨)”라는 그녀의 읊조림은 후반부 삶이 슬픔 그 자체임을 보여주고 있다.
삶의 무게를 술에 담아 토해내는 이청조의 노래는 ‘여몽령(如夢令)’의 잎사귀가 무성해도 붉은 꽃은 시드는 것(綠肥紅瘦)이라는 데서 압권을 이룬다. 술을 남자처럼 사랑한 중국 제일의 여류사인 이청조의 삶과 시는 너무나 가련하고 애달파서 오늘날에 더욱 아름답게 이어지는 것이다.
글쓴이 김상돈 : 물과 불을 넘나들면서 명정(酩酊) 40년을 살았고, 언론계와 국회 당, 공기업 임원 등을 두루 거친 뒤 지금은 사단법인 4월회 사무총장과 KAIMA 전무이사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