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고향의 향수를 자극하는 인심 좋은 고장 교동도

 


옛 고향의 향수를 자극하는 인심 좋은 고장 교동도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황해도 연백과 불과 2.6㎞

 

 

 

DMZ관광, ‘강화 교동도 나들길 여행’ 상품 출시

2014년 7월1일 개통된 교동대교DMZ전문여행사인 DMZ관광(대표이사 장승재)이 남·북분단 70년과 강화 교동대교 개통 1주년을 맞아 교동도의 역사, 문화, 나들길, 농촌관광을 융합한 가칭 ‘강화 교동도 나들길 여행’ 관광상품을 출시하기에 앞서 지난 26일 미디어와 사회단체, 대학교수 등을 대상으로 한 팸투어를 실시했다.

비가 내린 궂은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40여명이 참석한 팸투어는 시종일관 진지하게 이루어 졌다. 몇 사람을 제외하곤 대부분 익히 교동도를 다녀온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교동도 만이 가지고 있는 순박하고 옛것이 그대로 보존되어 온 그런 것들이 좋아서 팸투어에 참가했다고 했다.

DMZ관광이 이번 여행상품을 계획한 것도 바로 이런 분단의 역사를 간직한 채 고유 전통을 그대로 유지 보존하고 있는 강화도 교동도 일대를 돌아보는 투어 프로그램이다.여행상품은 당일코스로 진행되고, 교동도 중앙에 위치한 화개산(269.6m)을 중심으로 나들길 걷기체험, 화개산 정상에서 북한 연백평야 조망, 연산군 유배지터, 시간이 멈춘 추억어린 대룡시장, 교동향교, 강화역사박물관, 교동정미소, 지역 농특산물 시장 등을 방문하게 된다. 여행참가 가격은 현재 3만3000원(대인)으로 예상하고 있다.

 

교동도 주민에겐 교동대교 24시간 통행

교동도가 새삼 주목 받고 있는 것은 지난 해 7월 1일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3.44㎞의 교동대교가 개통되어 배를 타지 않고도 수월하게 여행을 다녀올 수 있기 때문이다.

교동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강화 창후리 선착장에서 교동도 월선포 선착장을 통해서만 교동도에 입도할 수 있었고, 배를 타기 위해선 검문이 필수였다.

교동대교가 개통되고 나서도 목적지가 어디인지(인화리, 교동도)를 밝히고 언제 나올 것인지 알려야 했다.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내면 초록색 통행증을 준다. 당일에 나온다고 하면 “6시30분까지는 나와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교동도가 민통선 지역이라는 특수성으로 두 번의 검문을 거쳐 교동도에 들어서는 불편은 교동도 주민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교동면 주민은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일반 방문객은 일출 전 30분부터 일몰 후 30분까지만 통행할 수 있는 등 이용에 많은 불편이 있었다.이 같은 불편 해소를 위해 강화군은 2억5천만 원을 투입, 하점면 이강리 소재 15검문소의 위치를 이전하고 도로를 확장해 24시간 검문검색이 원활할 수 있도록 조치하여 주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또 과속단속 카메라와 과속 방지턱을 설치해 야간 검문검색에 나서는 장병들의 안전을 확보했다.강화군은 현재의 일반 방문객들에게 적용되는 제한적인 통행의 현재의 문제점은 조속한 시일 내에 시간을 조정해 불편을 해소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교동읍성. 구본선 목사(가운데 설명하는 이)가 교동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왕족들의 유배지로 안성맞춤이었던 교동도

이번 팸투어에서 교동도를 안내한 이는 교동교회 담임목사인 구본선(51세) 씨였다. 성경공부보다 역사공부를 더 많이 하지 않았나 싶을 만큼 교동도 역사에 일가견을 가진 구 목사를 따라 교동도를 여행해보자.

교동도는 예로부터 왕족들의 유배지로 종종 선택되던 곳이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했기에 한양(漢陽)과 가까우면서도 차단된 섬은 안성맞춤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고려의 희종, 조선의 연산군과 광해군 등 왕족들이 이곳 교동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때문에 지금도 섬 곳곳에 유배지로 추정되는 증거들이 남아 있다고 구 목사는 설명했다.

교동도(喬桐島)란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였다. 이 섬에 오동나무가 많아서 교동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인데 일반적으로 향교가 있는 지역을 교동(校洞)이라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교동도는 1629년(인조 7) 화량진(花梁鎭)으로부터 수영(水營)을 교동 원권진(현 읍내리)으로 이전하면서 현을 부로 승격시키고 수군절도사 겸 부사를 두었고, 1633년 서남해의 방어를 더한층 강화하기 위하여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교동에 두었다. 삼도, 즉 경기·황해·충청의 주사(舟師)를 통괄하게 할 만큼 교동도는 그야말로 끗발이 센 지역이었지만 해가 갈수록 그 세가 약해져서 1895년 행정개편에 따라 읍을 폐하여 강화에 이속했다가 1896년 읍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강화군에 속하게 되면서, 개화·수정의 두 면을 두었다가 1934년 두 면이 교동면으로 통합되었다.

 

시간이 멈춰버려 옛 추억 떠올리게 하는 대룡시장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나와 교동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는 지광희씨가 대룡시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남북이 통일되기 전까지 교동도는 최전방이다. 황해도 연백인 북한과의 거리가 불과 2.6㎞밖에 떨어지지 않아 철조망 너머 연백 땅을 육안으로 생생히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때문에 6.25 전쟁 중에 황해도 주민들이 피난 나와 임시로 정착한 곳이 현재의 대룡시장이다.

이들은 통일이 되면 혜엄이라도 쳐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으로 대룡시장에 터를 잡고 산지 어언 6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들이 살아온 흔적들이 비록 지금은 침체돼 있지만 옛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전통시장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전설의 마녀 촬영지이기도 하다. 앞으로 ‘DMZ관광’에서는 이를 상품화 시켜 이곳 지역민들에게 작으나마 도움을 주려고 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대룡시장통에서 약방을 운영하고 있는 나의환 옹(83세)이나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는 지광희 (76세) 씨 역시 실향민으로서 죽기 전 고향땅 한 번 밟아보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지광희 씨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 일성리. 5년 전만 해도 바다 넘어 고향집이 보였는데 헐어버렸는지 요즘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또 “몇 년 전만 해도 손님들이 많아서 식사할 틈도 없을 만큼 바빴는데 요즘은 파리만 날리고 있다”면서 “관광객이라도 많이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대룡시장은 교동읍내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라 할 수 있지만 적막함을 감추지 못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골목을 돌아다니기 조차 미안할 정도다.

 

밥맛 좋기로 정평난 교동 쌀을 아시나요

교동정미소 류춘수 대표가 교동쌀이 좋다고 말한다과거 몽고 침략시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며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자 자급자족의 일환으로 간척사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교동도에 엄청난 면적의 농경지가 마련됐다.

그렇지만 물 부족으로 농사짓기가 어려웠다. 공화당 시절 당시 조시형 농림부 장관이 이곳에 들러서 동네마다 관정(管井)을 만들어 주었지만 태부족이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고구저수지와 난정저수지를 만들도록 하여 농사짓기가 수월해지면서 좋은 쌀을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교동도에서 1년 생산되는 쌀은 교동면민은 58년, 강화군민은 약 4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이 생산된다고 한다. 그래서 교동은 옛날부터 부촌이며 바다에서 나는 먹거리까지 풍부하여 남부러울 것이 없어 교동민국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고 했다.

교동여행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50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방앗간(교동정미소)이다. 류춘수(69세) 대표가 정미소를 맡아 운영한지도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했다. 고향 순천보다 먹고 살기가 넉넉하여 이제는 이곳 교동사람이 돼 버렸다고 했다. 하루 250가마의 벼를 정미하여 20㎏ 짜리 2천500포의 쌀을 생산한다.

교동도의 자립도는 11.1%에 지나지 않는데 교동정미소도 한몫 단단히 하는 모양이다.

 

교동도는 가슴으로 느끼는 여행지

교동도에는 여타 관광지처럼 절경은 없다. 눈(目)으로 풍광을 찾지 말고 가슴으로 느껴야 교동도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1629년에 축조된 교동 읍성지(邑城址), 1173년경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는 화개산성지 역시 지금은 흔적뿐이지 이렇다 할 비주얼이 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당시의 모습을 눈을 감고 가슴으로 느껴 보면 새로운 감흥이 떠오른다.

우리나라에 처음 세운 향교가 교동향교다.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화개산 북쪽에 지었으나, 조선 영조 17년(1741)에 조호신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66년에 수리하였다.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모셨다고 전하며, 이후 서울의 각 읍에 조상이나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를 설치했다고 전해진다.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제사공간을 형성하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다. 이외에도 내삼문·외삼문과 제기고 등이 있다. 방문했을 때는 보수 공사가 한창이어서 아쉬움이 많았다.

교동도에서는 10수년 전만 해도 유교문화가 활발했었는데 요즘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유교문화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웃해서 조용한 화개사가 있다.

 

화개산 정상의 정자
교동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화개산 정상

교동도는 바다와 접해 있어 고도가 매우 낮은 섬으로 높이 0∼10m의 지역이 섬의 3분의 2를 이루고 있다. 섬은 평야로 이루어져 있고, 가장 높은 산은 화개산(華蓋山, 259.6m)으로 이 섬의 주산을 이루고 있다. 그밖에 봉황산(75m), 율두산(89m), 고양이산(35m), 수정산(75m) 등 모두 100m 이하의 낮은 구릉들이 있다.

화개산을 오르다 보면 길섶에 산딸기들이 지천으로 열려있다그렇지만 해발이 바로 바다와 접해 있는 관계로 얕잡아 봐서는 안 된다. 교동도 전체를 조망하고 인근 석모 도나 황해도 연백까지 보고 싶다면 화개산 등정은 필수 코스. 산을 오르다 보면 조선시대에 지은 한증막도 볼 수 있고, 길섶에 손 타지 않은 산딸기들이 이방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산이 좋아 산으로 가네/ 숲이 좋아 숲으로 가네, 이 길을 걷다보면/ 산 노루 맑은 눈에 구름이 흘러가고/ 산새도 지지지 노랠 부르네 <중략> 오늘도 이 길을 걷는 사람아.

화개산 초입에 걸려 있는 石泉 시인의 ‘다음 새길’이란 시다.

비록 산 노루는 만나지 못할망정 밤꽃 향기 진동하고 새빨간 산딸리로 목마름을 해결하면서 정상에 오르면 교동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관을 맞본다. 손수건이 펑하게 젖도록 땀 흘린 보람이 여기에 있다.

구 목사도 힘들기는 매 한가지겠지만 한 가지라도 더 알려줘야 소임을 다하는 양 열심히 산 아래 펼쳐지는 섬이며 지명에 대해 설명한다.

화개산도 그 옛날에는 바다였으리라. 개화산 중턱에서 화석이 된 조개껍질이나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화개산 정산에서 인증샷하루 교동도를 둘러보고 교동도를 평하긴 어렵겠지만 잊었던 고향을 찾은 기분이랄까.

가뭄 끝에 찔끔 내린 비로 축축해진 밭에 서리태를 심던 할머니가 “일주일만 늦게 오시지 그랬어요, 그 때 쯤이면 실하게 영근 옥수수가 맛있을 텐데요…”

언젠가부터 교동도에는 옥수수, 고구마, 땅콩 같은 작물을 심어 소출이 쏠쏠하다고 한다. 교동대교가 개통되었어도 아직은 개발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살아 있는 섬이자, 60~70년대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모습이 진정 교동도의 참 여행은 아닐까.

<교동도 현지에서 글·사진 김원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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