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불타는 아스팔트 위에 벌거벗고 서 있는 것”

 


미담아줌마의 전통주 입문기 1편

 

 

생각합니다. 우리의 전통주에 대하여….

일제 강점기에 주세령이 내려지고 주세령의 강제집행이 시작되면서 많은 설움과 사연과 아픔을 안고 거의 100년 만에 부활해 우리 앞에 섰지만 잊혀진 세월이 너무 길어 일본의 ‘사케’에 우리의 ‘청주’자리를 고스란히 내어주고 와인, 양주 등 외국 술에 밀려 자기자리를 찾지 못하고 “한여름 불타는 아스팔트 위에 벌거벗고 서 있는 것”이 우리의 술입니다.

제가 너무 심하게 표현했을까요?

 

2000년 한 대학가 먹자골목에서 ‘해물파전 동그랑땡’ 이라는 막걸리 전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물론 다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장수막걸리도 있었고 지방이나 서울근교에서 밀주를 빚어서 1말(18L)들이 말통 막걸리가 유통되기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정상적인 주조장에서 나오는 술이 많았겠지만 지금처럼 활발하게 유통이 덜되던 시절이었고 막걸리를 갖다 주는 삼촌들이 오히려 말통막걸리를 더 권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업주 입장에서도 시골에서 빚어온 맛있는 막걸리라고 옹기항아리에 담아놓고 퍼서 팔면 손님들이 더 좋아했습니다.

팔기도 수월하고 이문도 더 많이 남았으니, 예나 지금이나 시골에서 빚어 전통의 술맛이다 하면 관심을 가져주니까요.

지금도 기억나는 술중의 하나가 ‘조껍데기 막걸리’입니다.

색도 독특했고 향도 특이했으며 걸쭉한 것이 좁쌀 같은 것이 떠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맛도 좋았습니다. 많이 팔렸고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좋았었지만 그 작은 조, 그것도 껍데기에서 무슨 술이 나왔겠습니까?

맛과 향을 내기 위한 첨가제 덩어리였겠지요.

 

아무튼 그런 세월 한 10년을 지나 막걸리 가게를 접고 우연한 기회에 ‘전통주 만들기 동호회’라는 다음카페에 가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2009년도 1월이었습니다.


가입을 하자마자 전통주 빚기 실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4주간 매주 금요일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2시간 진행되는 것이었고 전통주의 아픈 역사와 2번의 단양주 빚기 1번의 소주 내리기 시연으로 교육은 끝났지만, 저의 전통 우리 술에 대한 궁금증이 시작되었습니다.

카페지기의 우리 술에 대한 설명이 양에 차지 않아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고 실습 때 내가 배운 대로 빚은 술이 너무 맛이 없었습니다.

전통주라는데 왜 이리 맛이 없을까, 우리 조상님 네들이 이렇게 맛없는 술을 마셨을 리 없는데 그렇다면 잘못 빚어 맛이 없는 거라면 제대로 빚어서 조상님 네들이 드셨던 술맛을 한번 내보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배우려면 전문적으로 술 빚기를 가르쳐주는 기관보다 우리 할머님들, 시골이나 산골에서 술 잘 빚는 분들, 혹은 술을 빚어왔었던 분들을 만나보고 싶어졌습니다.

그 분들이야말로 우리 술을 전통 그대로 살리어 보듬고 계시는 산증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기도를 시작으로 각 군마다 연락을 했습니다.

제 소개를 하고 우리 전통술을 옛 방식대로 빚고 계시는 분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하지만 이미 알려진 명인 명주는 빼고 해달라고 했습니다.

연락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2009년 4월부터 1년 동안 저의 술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중년의 내 인생의 행복한 한 자락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간단히 술맛도 괜찮고 인상 깊었던 곳 몇 군데만 얘기하자면

경기도 용문산 뒤 연수리 보릿고개마을 노할머니댁, 석산리 이장님댁, 이 댁은 옥수수로 엿탁주를 빚는데 1박2일로 엿고우기부터 술안치기까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충청도 증평 삽사리마을 이장님댁, 이 댁에서는 그해 6~7월 보리누룩을 시작으로 누룩 딛기를 두어 번 더 했고요 그때 딛은 보리누룩으로 담은 술향기는 지금도 생각납니다. 이장님 댁과는 지금도 자주 연락하며 지냅니다.

전북 순창 산내들 마을 노할머님, 예전에 주막을 오래 하시고 술 잘 빚는 분을 소개받아 주막에서 빚는 술을 드디어 알수 있겠구나하고 기대에 부풀어 연락을 드렸더니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얘기에 너무 아쉬웠던 적도 있고, 무주군 설천면의 노할머님댁, 소아마비로 다리를 심하게 저시는데 본인도 7순이시면서 9순의 시아버지를 모시고 삼시세끼 따순밥으로 봉양하셔 마음 따뜻한 할머님이셨습니다.

남원 운봉면의 지리산 구 일주도로 옆 산장지기 주막의 노할머님, 술(막걸리)맛이 너무 좋아 배우고 싶어서 3년을 찾아갔지만 결국 배우지 못하고 마지막 갔을 때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는 나에게 해주신 한마디 “술은 뜨겁게 띄우는 것이여” 그런데 3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남원의 지인에게 들었는데 며느리가 물려받아 빚고 있지만 그 술맛이 아니라고 합니다.

전남 진도의 ‘진도 홍주 기능보유자’ 허화자 명인,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이분도 80의 노할머님이셨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소주 내리시면서 무겁고 뜨거운 옹기 소줏고리를 손으로 못들이고 팔뚝으로 들어 올리다 보니 팔뚝에 굳은살이 열기에 익어서 시커멓게 박혀있습니다.

하룻밤 재워주시면서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며 해주셨던 많은 이야기들, 아침에 북엇국 끓여 먹이시고 보자기에 홍주 1병을 싸주시며 잘 가라시던 모습이 지급도 눈에 선합니다.

그 외에 많은 곳을 방문했지만 예상보다 실망이 더 컸습니다.

모두가 시장에서 파는 정체모를 누룩에다가 ‘오뚜기 이스트’ 많이 넣고 (각기 양은 다르지만 많은 양을 넣습니다) 물도 대중없이 많이 넣고 적당히 발효시켜 열흘 안에 먹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실상을 보고나니 너무나 실망스러웠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대중들에게 편하게 다가갈 수가 없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제대로 된 술을 빚어서 많은 일반인들과 우리 술 전통주를 소통해야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잊혀진 전통과 맛을 살려 널리 알리고 싶었습니다.

아픈 역사와 함께 굴곡진 우리 술, 그래서 제대로 된 술빚기 알기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조미담은 서울 토박이다. 58년 개띠 생으로 서울여고를 나와 직장 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 전통주에 빠져 버렸다. 2001년 건대 앞에서 ‘나들목’이란 막걸리 전문점도 운영했다. 차제에 2012년에는 농민주 양조장인 ‘미담(美淡)’을 설립하여 자신의 이름을 상표로 내걸고 술을 빚는다. 술안주를 직접 개발하다보니 요리를 하는 것은 기본, 글래서 2013년에는 ’우리술 우리음식협동조합‘ 이사장도 맡아서 운영했다. 앞으로 삶과술 지면에서는 그녀가 걸어온 술 인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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