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조 예술> 정회철 대표
상호부터 酒名까지 예술 감각 물신…누가 지었드레요
두메나 산골, 물 좋고 산 좋은 곳에서 술빚는 헌법학자
삼복더위 끝자락 말복(末伏). 친구들이 복달임이나 하자는 청을 거절하고 홍천의 ‘예술’을 찾아 길을 떠났다. 거기엔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 술들이 있기 때문이다.
유난히도 더위가 심했던 탓일까 아니면 여름이 빨리 갔으면 하는 바람이었을까. 말복이란 말만 들어도 마음 한편엔 서늘한 바람결의 느낌이 드는데 전통주를 빚는 ‘예술’이 터 잡고 있는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마을은 에어컨 없이도 살만큼 시원하다.
한 마디로 산 좋고 물 좋으면 천하의 명당 아니겠는가.
“이렇게 좋은 경관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어 정 사장님은 휴가 따로 안 가셔도 되겠네요?”라고 수인사를 건네자 “그래도 우리는 다른 곳으로 휴가를 갑니다”고 한다.
정 사장과는 구면이다. 삶과술은 지난 해 3월 25일자(204호)에 ‘잘 나가던 憲法학자가 전통주 빚는 匠人 되다’라는 제하로 ‘예술’을 소개 한바 있다.
그런데 취재차 찾은 예술은 때 마침 새로운 누룩을 개발 중이라 6개월간(16년 3월~8월) 술빚기 및 판매를 일시 중단하고 있을 때였다.
하여 정 사장의 술에 관한 철학(?)과 생각들만 듣고 차후 본격적으로 술을 빚을 때 다시 방문하기로 했던 것이다.
톡톡 터지듯 은은한 잣잎향이 입안에 퍼진 ‘無作 53’
서울서 예술을 찾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양양까지 개통된 고속도로상 내촌IC로 빠져나가면 과거 홍천을 거쳐서 갈 때보다 20여분은 단축된 느낌이다. 또한 동창교에서 예술까지 포장이 되어서 편한 여행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정 사장은 지난 해 만났을 때보다 좀 더 술쟁이로 변한 것 같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전통주에 대한 열정과 패기가 철철 넘쳐흘렀는데 이제는 완숙미가 엿보인다.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에서 맛있는 술이 떠오른다.
“지난 해 6개월 동안 양조장 문을 닫고 누룩 개발에 몰두했던 것이 잃은 것도 있었지만 얻은 것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내놓은 술이 증류식 소주 53도짜리 ‘무작(無作)’이 였다.
“‘무작’이라! 주명(酒名)이 독특한데 무슨 뜻인가요?”
“화엄경에 인연에 따르되 억지로 만들지 말라는 ‘수연무작(隨緣無作)’이란 말이 있습니다. 제가 좌우명처럼 좋아하는 구절인데요, 여기서 ‘무작’을 차용한 것입니다. ‘무작 53’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소주인 ‘적선소주(謫仙燒酒)’를 원류로 하는 한국의 정통 증류식 소주입니다. 적선(謫仙)이란 인간세계에 내려온 신선, 또는 이백(李白)을 칭송하여 부르는 말이기도 하고요, 무작은 ‘지음이 없다’는 뜻으로, 단순히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조화로 태어난 술이라는 의미이고, 아무 것도 더하지 않은 순수함을 뜻합니다”
“보아하니 꽤 비싸 보이는데요, 얼마에 판매합니까?”
“우리 술은 거의 택배나 방문객에게만 판매하고 있는데요, 500㎖ ‘무작 53’은 현재 판매가가 20만원입니다. 비싼 술이죠, 그런데도 1년여 동안 300여병이나 판매된 것을 보면 이제 진짜 우리 술을 사랑하는 애주가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작 53’은 단식증류기로 2회에 걸쳐 증류하고, 상압식의 간접가열 방식을 사용했으며, 2년 이상의 숙성과정을 거쳐서 완성된 증류식 소주다.
‘무작 53’은 높은 알코올 도수임에도 목넘김이 아주 부드럽고, 먹고 난 후에 꽃봉오리가 톡톡 터지듯 은은한 잔향이 입안 전체에 퍼진다.
그런데 ‘무작 53’은 정 사장이 디자인해서 만든 전용술잔에 따라 마시면 더욱 운치를 느낄 수 있다.
노인들의 보양식으로도 손색없는 ‘배꽃 필 무렵’
정 사장이 다음으로 내놓은 술은 ‘배꽃 필 무렵’ 이화주였다. 이화주는 ‘배꽃 필 때 빚는다’ 하여 이화주(梨花酒)라고 불리는 술인데 빛깔이 희고 된죽과 같아 숟가락으로 떠먹는 술이다.
아직 일반 대중들에게 떠먹는 술은 익숙지 않은 술이지만 과거에 이화주는 부유층이나 사대부가에서 노인들의 보양식이나 갓 젖을 뗀 어린 아이들의 간식으로 곧 잘 이용되었던 술이라고 한다.
정 사장은 “‘배꽃 필 무렵’은 잣잎 추출물로 구멍 떡을 반죽해서 빚은 술인데요, 잣잎은 한방에서 백엽(柏葉)이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건강에 좋아 환을 만들어 먹거나 차로 음용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3월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동경식품박람회’에 ‘배꽃 필 무렵’을 출품했었는데 일본 여성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끌었단다. 때문에 ‘배꽃 필 무렵’은 금명간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 것으로 정 사장은 기대하고 있다.
‘배꽃 필 무렵’은 식사 전에 식욕을 돋우기 위한 애피타이저(appetizer)나 식사 후의 디저트(dessert)로 활용해도 좋고 취침전 1팩정도 먹고 자면 숙면을 취할 수도 있다는 것이 정 사장의 설명이다.
‘배꽃 필 무렵’은 약간의 레몬즙과 소금, 후추를 섞어 소스로도 활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1팩에 20ml짜리 소포장 8개가 들어가 있어 먹기에 편하다. 알코올도수는 14%이고 가격은 1만원이다.
예술은 호기성 발효를 통해 빚고 있는 이화주를 쌀 말고도 딸기나 블루베리 등을 넣어 다양한 이화주를 개발하고 있다고 했다.
황진이가 임 못지않게 그리워 할만한 ‘동짓달 기나긴 밤’
“이런 복분자 들어 보셨나요?”
무작 53, 배꽃 필 무렵, 만강에 미친달, 홍천강 탁주, 약주 동몽 등은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택배로 받을 수 있지만 유독 이 술만은 직접 예술을 방문한 방문객에게만 판매하는 술이 있다. 바로 ‘동짓달 기나긴 밤’이란 복분자 술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 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조선의 명기 황진이가 임을 그리며 읊은 시조에서 주명을 따온 술 ‘동짓달 기나긴 밤’은 알코올 도수가 16%(500ml)로 4만원이다.
여니 복분자 술은 그렇게 복분자 양이 많이 들어가지 않지만 ‘동짓달 기나긴 밤’은 무게로 따져서 쌀 10㎏일 때 18%의 복분자 즙을 첨가하여 이양주 기법으로 담근 술이다. 발효와 숙성기간이 4개월 정도 되어야 맛있는 복분자술을 얻을 수 있는 귀한 술이다.
황진이가 지금 살아 있다면 임 못지않게 그리워 할 술이 아닐까.
同夢·만강에 비친 달·홍천강 탁주 애주가들로부터 사랑받아
예술은 4년 전 술도가로 문을 열면서 ‘같은 꿈을 꾼다’, 즉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동몽(同夢)’을 출시했다. 홍천 찹쌀과 미니 단 호박, 전통누룩을 원료로 하고, 백암산자락 지하암반수를 이용하여 빚어 옹기에서 150일 가량 발효․숙성시킨 이양주(두 번 빚은 술)인데 알코올 도수 17%의 청주다.
서양의 와인이나 일본의 사케보다도 그 맛이 뛰어나 선물로도 제격인데 3만원에 판매한다.
정 사장이 학자여서인가 회사명부터 주명이 모두 멋스럽다. 그 중에 기자가 가장 멋스럽게 생각하는 주명이 ‘만강에 비친 달’이다.
‘만개의 강에 달이 비친다’는 의미로, 사랑과 평등 개념을 형상화한 것이라곤 하지만 강과 달은 주당들에게는 술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단 호박에서 나온 노오란 술 빛깔이 마치 달빛과 같아서 지어진 이름이기도 하다는데 ‘만강에 비친 달’은 찹쌀을 주원료 한 탁주(막걸리)로서, 110일 가량 발효․숙성시킨 이양주로 알코올 도수는 10%다.
‘동몽’과 마찬가지로 감칠맛과 향이 뛰어난 것이 특징. “우리 전통주에 이런 맛이 있었나”하고 의심할 정도로 한번 먹어본 주당들은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하는 술이다. 판매가 12,000원.
‘홍천강 탁주’는 홍천강의 청정한 이미지를 그대로 살리기 위해 이름 붙여진 술이다. 홍천 강은 주변에 공장지대가 없고,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로 이루어져, 우리나라의 깨끗한 물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홍천 찹쌀과 멥쌀, 전통누룩을 원료로 하고 백암산자락 지하암반수를 이용하여 빚고 옹기에서 110일 가량 발효․숙성시킨 이양주다.
알코올 도수는 11%다. ‘만강에 비친 달’이 찹쌀을 주원료로 한 반면 ‘홍천강 탁주’는 찹쌀과 멥쌀을 3:1 비율로 섞어 빚은 술로서, 멥쌀 술의 담백하고 드라이한 맛을 즐길 수 있다. 판매가 10,000원.
술이란 취하려고 먹는 것이 아니라 맛있기 때문에 먹는다
대화를 하다가 잠시 틈을 내자고 했다. 2시에 택배차량이 오는데 그 때까지 오늘 발송할 물량을 포장해야 한단다. 정 사장이 직접 스티로풀 박스에 술을 포장한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학생들 앞에서 강의하는 것과 지금 술 빚는 것 하고 어느 쪽이 더 재미있냐?”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둘 다 재미있습니다. 강의하는 재미도 좋지만 술 빚는데 맛을 들이면 빼기 힘듭니다.”
“술이란 취하려고 먹는 것이 아니라 맛있기 때문에 먹는다”는 것을 우리 술을 통해 처음 알았다는 정 사장은 “전통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헌법 학자에서 술빚어 파는 양온소(예술에서는 양조장을 양온소라 한다) 대표가 되고 나서 마음은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다고 정 사장은 말한다.
문을 연지 불과 4년여 동안 대한민국 관광 양조장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는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농림부로부터 선정되었고, 6가지의 술을 개발하여 출시하므로 써 전통주 업계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정 사장은 헌법학자답게 모든 것을 원칙대로 한다.
잘 꾸며진 게스트하우스는 호텔 같은 분위기다. 술 빚기 체험도하고 좋은 술도 마시며 공기 좋은 곳에서 별을 세며 하루를 보낸다는 것, 그것이 바로 힐링이 아니겠는가.
예술이 문을 연 역사가 일천한데도 세인들로부터 관심을 받아 때론 질시를 받기도 하지만 주말이면 체험 객들이 몰려온다.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된 양조장들이 체험 객이 전무한 곳도 있지만 한 달 평균 100여명이 이 두메산골로 찾는 이유는 뭘까?
글·사진 김원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