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수밀도형 술잔 이야기⑫

南台祐 교수의 특별기고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수밀도형 술잔 이야기⑫

쿠페잔 탄생의 일화(上)

오늘날 와인 잔(wine glass)은 와인 문화의 중요한 에티켓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 일반화돼 있는 와인 잔은 유리가 발명된 선사시대보다 훨씬 후인 17세기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현재의 와인 잔은 몸통(bowl), 줄기(stem), 밑받침(foot or base)으로 정형화되었는데, 와인의 종류나 스타일에 따라 각기 외형을 달리한다.

비록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지만 와인 잔의 모양에 따라 와인의 향기나 맛을 좀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시음을 통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주인 백세주를 투박한 도자기 잔 대신 화이트 와인 잔에 마셨을 경우 은은한 황금 빛깔과 함께 저온 숙성한 쌀과 누룩의 향을 좀 더 섬세하게 느낄 수 있다.

샴페인 잔은 몸체의 입구(rim)가 좁고 줄기가 긴 플루트(Flute)형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결혼식이나 축제, 살롱에서는 입구가 넓고 둥그스름한 쿠페(Coupe) 잔을 선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치 여성의 유방처럼 볼륨감 있고 아름다운 쿠페 잔의 탄생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절세미인 헬레네부터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 나폴레옹의 첫 번째 부인 조세핀, 루이 15세의 정부 퐁파두르 후작까지 그녀들의 아름다운 가슴을 본떠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진속의 1은 잔의 보디 중간에 꺾인 부분이 와인의 적정선을 표시하는 잔으로 넓적한 보디가 와인의 맛과 향을 최대로 담아낸다. 2는 스템 없이 디자인한 와인 잔도 글라스 테이스팅을 통해 탄생했다. 결국 스템보다 와인 잔 보디의 모양에 집중하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1663년 영국에서 디자인되었다는 문헌상의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쿠페 잔이 여성의 유방처럼 아름답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로 보는 게 옳은 것 같다. 쿠페 잔은 1930년대부터 하나의 패션으로 각광받는다. 기포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데는 쿠페 잔보다는 플루트 잔이 더 적합하겠지만, 어떤 잔이든 끝없이 피어오르는 하얀 거품과 황금색 샴페인의 귀족적인 풍류를 즐기는 데는 분명 이 아름다운 샴페인 잔이 한 몫 하지 않았을까?

 

 

 

달의 여신 다이아나로서 푸아티에

16세기 프랑스의 왕 앙리 II세(Henri II, 1519~1559)도 자신의 애인인 디안 드 푸아티에(Diane de Poitiers, 1499~1566)의 유방을 본 떠 자신의 전용 술잔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림에서처럼 그녀의 수밀도는 단연 돋보이고 있다. 이를 탐해 술잔으로 변형시킬만하다. 그녀는 16세기 프랑스 절세미인으로서 ‘달의 여신 다이아나’로 비유되기도 했다. 디안 드 푸아티에는 그의 생전에는 물론이고 그 후로도 몇 세대 동안이나 ‘달의 여신 다이아나’의 살아 있는 화신으로 대우 받았다. ‘달의 여신’은 그리스 신화에서 아르테미스이며 로마 신화에서 다이아나(Diana)이다. 그 외에도 셀레네 등이 알려져 있다. 일찍이 달의 여신은 삼위일체였는데, 이는 생명의 선회(旋回), 즉 성장, 소멸, 반복을 상징한다. 달의 신 셀레네와 밤과 마술사 신 헤카테와도 동일시되며 그를 초승달의 신, 나머지 두 신이 각각 보름달 그리고 그믐달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드물게는 새벽의 신 에오스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이명으로 킨티아라고도 한다. 림네아(Limnea), 림나티스(Limnatis)라는 이명도 가지고 있다. 각각 ‘호수의 숙녀’, ‘동물들의 주인’을 뜻하는 이명이다. 상징 동물은 사슴, 곰, 메추라기, 토끼 등, 상징 식물은 삼나무와 야자나무 등이다. ‘달의 여신 다이아나’의 살아 있는 화신은 바로 로마 신화속의 다이아나를 말한다.

헨리 2세의 궁정에서는 다른 많은 프랑스 시인과 화가들이 헨리의 애인 디안 드 푸아티에라는 인물 속에서 16세기 중엽을 풍미했던 그들의 뮤즈를 발견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1세기 전의 샤를 7세의 정부 아그네스 소렐(Agnès Sorel)의 이야기 이상으로 거의 신화적인 수준으로까지 고양된 성과 예술과 정치의 융합을 보여 주었다.

 

 

 

 

Diane de Poitiers/ 프랑수아 클루에

유방의 미를 예술적으로 보이기 위해 마리아를 이용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예는 쟝 푸케(Jean Fouquet)가 1450년 샤를 7세의 애첩 아그네스 소렐을 그린 초상화로 이 그림 속에는 예수를 무릅 위에 안고 유방의 아름다움을 노출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바로 소렐의 모습이다. 한쪽 가슴을 드러낸 것은 아름다운 형태를 자랑하기 위함이고…. 소렐은 당시 사교계에서 ‘미인 중의 미인’이라고 불렀는데, 그녀는 프랑스 역사를 방탕으로 흐르게 만든 풀발점이기도 했다. 그해 낭시에서 열린 호화로운 궁전 축제에서 왕은 소렐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매혹됐으며 그 이후 그녀는 죽을 때까지 왕의 사랑을 받았다.
그녀의 미모에 눈이 먼 왕은 소렐에게 엄청난 재산과 땅을 하사했고, 나아가 왕비의 지위와 명예까지 부여했다. 국왕이 정부(情婦)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프랑스에서 처음 있는 일로 이후 프랑스 국왕이나 귀족들은 정부를 두었다. 그렇지만 이 조치는 국민을 분개시켰고 질시와 음모를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소렐이 넷째 아이를 낳은 직후에 이질에 걸려 급사하자 독살이라는 추측이 나돌기도 하였다.

 

 

 

 

Agnes Sorel(circa 1422-50) Favourite of Charles VII(1403-61)/ Jean Fouquet
성모자(聖母子)/ Jean Fouquet

샤를르 7세의 후궁인 아네스 소렐(Agnes Sorel)을 모델로 그린 작품이다. 프랑스에서 최초의 공식적 후궁이었다고 한다. 샤를르 7세 시대에 역사에 남은 두 명의 여인이 있다. 한 명은 잔 다르크, 다른 한 명이 아네스 소렐이다. 방식은 다르지만 둘 다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성녀와 마녀 사이를 오가며 화형 당해 죽거나, 왕의 ‘애첩’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다가 독살당하거나, 마지막의 운명도 비슷하다. 푸케가 그린 그림 속 아네스 소렐의 머리가 민머리다. 당시에는 저렇게 앞머리를 밀어내는 방식이 나름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속 오른쪽 가슴을 보라. 터질 듯 한껏 부풀어 올라와 있다. 달덩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를 본떠 와인 잔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감싸 안듯 와인 잔을  마시는 남성들의 속내를 알 듯도 하다.

샤를 7세의 아버지였던 샤를 6세는 정신병 환자였고, 어머니였던 이자보는 자신의 친아들인 샤를 7세에 대한 모성애가 없던 여인으로 자신의 아들을 무시했고, 영국 왕 앙리 5세에 대한 편애가 심해 프랑스 왕권의 지위를 주려했던 여인이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샤를 7세는 변덕이 심하고, 질투가 강했다고 한다.
불운한 가족사와 역사로 샤를 7세는 세상을 등지고 루아르 계곡에서 지내다, 잔 다르크의 도움으로 오를레앙에서 승리했고, 로슈 성의 접견실에서 잔 다르크의 설득으로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루며 정식 왕이 되었다. 왕이 된 샤를 7세는 어머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아네스 소렐에게서 찾았다. 아네스 소렐은 군인의 딸로, 로레인 공박 부인의 시녀였다. 당시 왕족의 시녀로 일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었다.
아네스 로렐이 20세일 때 샤를 7세를 만났고, 샤를 7세는 그녀의 미모와 재기에 반해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줄 정도로 사랑했다. 아네스 소렐은 샤를 7세의 후광으로 궁정에서 왕비처럼 행동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며 정치에도 관여했다. 이때부터 왕의 애첩이 정치에 관여하는 일이 프랑스 대혁명 전까지 이어졌다. 샤를 7세와 아네스 소렐 사이에는 3명의 딸이 태어나고 넷째를 임신한 아네스는 겨울에 원정길에 따라 나섰다가 28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2005년 프랑스 과학 팀은 그녀의 시신을 부검했고, 그녀의 사망 원인은 수은 중독으로 밝혀졌다. 그녀의 죽음에 관련하여서는 샤를 7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루이 11세가 부친에게 영향력이 큰 아네스를 죽였을 것이라는 의심과 함께 수은은 그 당시에 화장품의 주원료였기 때문에 암살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아네스 소렐이 죽었을 때, 그녀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샤를 7세의 슬픔도 그만큼 깊어 그는 아네스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그녀가 좋아했던 로슈 성으로 옮겨와 생 우르스(Saint Ours) 예배당에 매장했다.

디안 드 푸아티에의 전기 작가인 필리프 에르랑제(Philippe Erlanger)는 푸아티에를 당시의 시인과 화가들이 그녀의 얼굴과 몸매를 토대로 그렸다는 넘쳐날 정도로 많은 작품들을 논하면서, 비록 그런 작품들 가운데 실제 그녀의 모습을 그렸다고 믿어지는 것은 한 줌밖에 안 되지만 그녀는 그녀의 훤칠한 이마와 뾰족한 코, 가는 입술로 미의 이상적인 전형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헨리 2세가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연상인 애인에게 공개적으로 표시했던 애정은 동시대의 쑥덕공론과 사후의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예술과 문학에 영감을 주어, 지금도 그들의 밀통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과 그들로 인해 생긴 전설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디안을 아는 데는 그녀가 누구의 말을 들어봐도 눈에 띄게 아름다운데다가 격조 높은 품격과 풍취를 지닌 아주 지적인 여성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디안의 매력 가운데는 그녀의 가슴보다 더 중요한 요소들이 많이 있었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그녀의 작은 유방은 동시대의 이상형과 일치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회에는 두 가지 종류의 유방, 즉 남성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아담한 크기의 ‘상층 계급의’ 유방과 자기 자식과 그들의 부유한 고용주의 자식에게 젖을 먹이는 여성들이 갖고 있던, 수유를 위한 풍만한 ‘하층 계급의’ 유방이 있었다. 앙리 4세의 총애를 받았던 <가브리엘 데스트레의 초상화(Gabrielle d’Estrees and one of her sisters)>는 이러한 위계질서를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가브리엘은 고급문화를 자랑하며 ‘벽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미인들의 초상화’를 전시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화랑에 자신의 누드화를 더해준 마지막 왕의 애인이었다.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 자매(Gabrielle d’Estrees et sa Soeur(1590)>/ anonymous artist)

디안 드 푸아티에처럼 가브리엘 데스트레(Gabrielle d’Estrees)도 뛰어난 미모와 왕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앙리 2세보다 20살이나 연상이었던 디안의 대중들의 상상력 속에서 거의 여신에 가까운 지위로까지 격상되었지만 이에 반해 앙리 4세보다 20살이나 어렸던 가브리엘은 서민들의 미움을 받았으며, 그들은 그녀가 고급 창녀나 다름없다고 보았다. 역대 프랑스 왕 중 가장 많은 정부를 거느린 것으로 유명한 앙리 4세이다. 가브리엘 데스테레는 많은 종부 중 그가 가장 아끼던 정부였다.

가브리엘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새 애인이 출현 했다는 사실로, 어떤 예술 비평가들은 허리까지 벌거벗은 가브리엘 데스테레가 그녀의 유방을 두 손가락으로 집고 있는 그녀의 자매와 함께 있는 유명한 그림을 재해석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에 따르면, 오른쪽에 있는 금발의 여인은 실제로 가브리엘이지만 왼쪽에 있는 갈색 머리의 여성은 다름 아닌 새로운 애인인 앙리에트 뎅그라그(Henriette d’Engragues)라는 것이다. 그녀는 왕의 침대를 물려받은 후임자임을 상징하는 몸짓으로 가브리엘의 유두를 꼬집고 있는 것이다. 즉 새 애인은 욕망의 응어리인 유두를 마치 성애의 상징물이라도 되는 양 그녀의 전임자에서 빼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평가로는 가브리엘의 유두를 만지는 것으로 임신을 암시한 그림으로 보기도 한다. 가브리엘이 왼손에 들고 있고 있는 반지는 앙리 4와의 혼인을 암시한 것이다.

디안은 15살 때, 자신보다 39살이나 많은 아네의 영주이자 노르망디 지사였던 루이 드 브레제(Louis de Brézé)의 생존시부터 디안은 클로드 드 프랑스(Claude de France, 프랑수아 1세의 첫 왕비)의 시녀로 일하며 궁전을 출입했고, 클로드가 죽은 후에는 루이즈 드 사부아(Louise de Savoie,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를 모셨고, 그 다음 엘레오노르 도트릿슈(프랑수아 1세의 2번째 왕비)의 시녀가 되었다. 그러다 디안은 프랑수아 1세의 명에 의해 12살이 된 앙리 2세의 가정교사로 가깝게 지냈으며, 후에는 19살이 된 앙리 2세와 39살이 된 디안은 연인사이가 되어 디안은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서게 된다.

1525년, 전쟁을 벌이던 앙리 2세의 아버지인 프랑수아 1세가 스페인 측에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교환용 인질로 앙리 2세와 그 동생은 스페인으로 끌려가게 된다. 당시 여섯 살인데다 어머니까지 여의었던 앙리 2세는 의지할 곳 없는 낯선 나라로 끌려가는데 정신적으로 큰 혼란이 있었다. 이 때 스페인으로 떠나는 왕자를 배웅해주며 애틋하게 작별의 키스를 해준 26세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부인이 바로 디안이었다. 어려서나 나이 들어서나 자신이 훌륭한 기사도의 사나이라고 생각했던 앙리 2세는 아마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내 인생의 레이디’를 발견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디안을 아는 데는 그녀가 누구의 말을 들어봐도 눈에 띄게 아름다운데다가 격조 높은 품격과 풍취를 지닌 아주 지적인 여성이었다는 것을 우선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디안 드 푸아티에의 매력 가운데는 그녀의 가슴보다 더 중요한 요소들이 많이 있었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그녀의 작은 유방은 동시대의 이상형과 일치했다. 헨리 2세가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연상인 애인에게 공개적으로 표시했던 애정은 동시대의 쑥덕공론과 사후의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예술과 문학에 영감을 주어, 지금도 그들의 밀통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과 그들로 인해 생긴 전설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디안을 모델로 그린 달의 여신 다이아나)

디안은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미모를 가꾸는데 꽤 능숙한 여인이었다. 이름이 디안(=다이아나=아르테미스)인 점을 이용하여 말을 타고 사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마치 여신의 현신이라도 된 것처럼 이미지 메이킹을 했다. 덕분에 기사도라면 껌뻑 죽는 앙리 2세의 레이디에 대한 환상도 충족시켜 주었다. 그 외에도 미모 유지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서 찬물로 목욕을 하고 노화를 방지하기 위해 금을 복용하는 등 갖은 정성을 기울였다고 한다. 과장이 좀 섞였겠지만 중년 이후에도 마치 10대 소녀와 같은 피부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새벽에 찬물로 샤워할 수 없는 우리 같은 나약한 인간들은 미모를 가질 자격이 없는 게지.”라고 감상을 표했다.

남태우 교수

▴문학박사/중앙대학교 명예교수▴전남대 교수▴중앙대학교 도서관장▴중앙대학교 교무처장▴중앙대학교 문과대학장▴한국정보관리학회장▴한국도서관협회장▴대통령소속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

◇ 필자 남태우 교수 경력:▴전남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중앙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중앙대학교 중앙도서관장▴중앙대학교 교무처장▴중앙대학교 문과대학장▴한국정보관리학회장▴한국오픈엑세스포럼회장▴한국 문헌정보학교수협의회장▴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한국도서관협회장▴중앙대학교 명예교수(현재)▴현재 건전한 음주문화 선도자로 활동하고 있음

◇ 음주관련 저작리스트:▴비틀거리는 술잔, 휘청거리는 술꾼이야기(1998)▴주당별곡

(1999)▴술술술, 주당들의 풍류세계(2001)▴알코올의 야누스적 문화(2002)▴음주의 유혹, 금주의 미혹(2005)▴주당들의 명정과 풍류(2007)▴홀 수배 음주법의 의식과 허식(2009)▴술잔의 미학과 해학(2013)▴은자의 명정과 청담세계(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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