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이 없으면 여자도 없다
이 영 식
학여울역에 정차했던 전동차가 출발하고 내 왼쪽 빈자리로 한 여자가 다가와 앉았다
난장이를 겨우 면한 듯 보이는 중년의 그녀는 앉자마자 잔주름이 많은 악어무늬 핸드백 속에서 손거울과 립스틱을 꺼내 들었다
체리핑크 색으로 꽃 입술을 그리기 시작하는 여자의 손가락이 나무뿌리처럼 뒤틀려 있다
나무가 뿌리를 부끄러워하지 않듯 여자는 구부러져 펼 수도 없는 손가락으로 체리핑크빛 꽃 입술을 당당하게 피워 올렸다
손거울 속으로 들어가 꽃잎을 빨고 있는 여자의 양미간 주름이 만개한 목단 꽃 이파리처럼 활짝 펼쳐졌다
세상에 거울이 없었으면 여자도 없었다는 듯 홍학 한 마리가 푸드덕 날개를 쳤다.
♧ 여자에게 거울은 무엇일까요? 전철좌석 바로 내 옆 자리에 앉은 여자가 손거울을 꺼내들고 화장을 합니다. 가만히 보니 양손가락이 모두 비틀려 보기에도 딱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불구의 몸에도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의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는 모습이 너무도 당당했습니다. 세상에 거울이 없으면 여자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영식 시인
경기 이천 출생. 2000년「문학사상」등단.
2011년 한국시문학상 수상.
2012년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 수상(문학부문).
2012년 전국시낭송대회 최우수상 수상.
시집:「휴」,「희망온도」,「공갈빵이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