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台祐 교수의 특별기고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수밀도형 술잔 이야기(16)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中)
그녀는 18세에 가게의 점원으로 일하면서 고급 창녀로도 일하고 있었다. 당시 여점원들은 공공연히 창녀 노릇을 함께 하였으므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늘씬한 키와 빼어난 용모로 인해 많은 남성들이 그녀의 가게를 들락거렸고, 그녀는 이윽고 뒤바리 자작의 정부가 되어 그의 잠자리를 만족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잔느 랑송은 마담 뒤바리이다.
피부가 하얗고 얼굴이 아름다운 창녀 잔느 랑송에게 마음이 빼앗긴 뒤바리 자작은 둘만의 사랑을 위해 그녀를 집으로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자작의 정부가 된 그녀의 운명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그 당시엔 미모에는 자신이 있으나 신분이 낮았던 많은 여자들이 고관대작의 정부가 됨으로써 출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때였다. 아무튼 18세 나이에 자작의 애첩이 된 그녀는 어느 날 자신의 운명을 바꾸게 될 일생일대의 중요한 전기를 만나게 된다. 운명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다가오는 것인지 모른다. 창녀의 길에 들어선 그녀에게 이미 얼마쯤의 계산은 있었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왕의 아내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루이 15세 왕비는 원래 세무장이의 아내였다. 그런데 루이 15세가 후작 자리를 무기 삼아 그의 아내를 빼앗았던 것이다. 그 당시는 왕이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는 시대였으므로 그 일을 두고 왕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고관대작들은 자신의 애첩이나 딸, 심지어는 아내까지 왕에게 바치는 형국이었으므로 당시의 성적 타락상이 어느 정도까지 이르렀는지 잘 알 수 있다. 아무튼 그녀는 최고 권력자의 아내로서 무능한 루이 15세를 마음대로 조종하며 정치에 사사건건 간섭했을 정도로 똑똑한 여자였다. 루이 15세는 그녀에게 모든 정사를 맡기고 사치와 애욕으로 시간을 죽였다.
이런 왕의 눈에 뒤바리의 애첩이 들어온 것이다. 여자에 굶주린 늑대의 먹이로 색의 끼가 줄줄 흐르는 뒤바리 부인은 안성맞춤이었다. 그녀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고아원에서 자란 그녀였고, 살아남기 위해 얼굴과 몸 하나로 온갖 세파를 헤쳐 온 그녀였다. “음, 처음 보는 여인이야.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루이 15세는 그녀의 얼굴과 인어처럼 잘 빠진 몸매를 감상하다 입맛을 다셨다. “내가 찾던 여자다. 뒤바리의 애인이라 했겠다?”
그녀는 색마의 요정으로 걸맞은 최고의 요부였다. 뭇 사내들의 품을 전전하며 나비처럼 살아온 그녀의 몸은 눈부시게 색정을 발하는 바람난 암고양이 그대로였다. 흡사 색광 증에 걸린 환자처럼 애욕으로 날을 지새우는 사람이 비단 왕 뿐만은 아니었다. 상류계급의 사람들은 모두 정부를 여럿 두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향락적인 생활에 빠져 살았다. 이를 두고 백성들은 비난을 퍼부었지만 그들은 민중의 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프랑스 인구 9할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나머지 1할은 포식으로 죽어간다며 비난이 쏟아졌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서서히 파멸의 순간으로 가고 있었으며, 당장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었다. 그런데도 루이 15세는 기껏 창녀의 매력에 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할 생각을 하니 침이 절로 넘어갔다. 무도회는 수많은 고관대작들의 애인들이 아주 야한 차림으로 온갖 교태를 부리며 춤을 추고 있었지만, 뒤바리의 애인처럼 색정이 무르익은 여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시민들은 모이면 창녀 이야기로 날을 지새웠다. 길거리 창녀가 왕의 부인, 즉 국모가 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왕이 저 지경이니 그 아랫놈들은 어떠하겠어?” 시민들의 분노는 점점 루이 15세와 창녀 출신의 그녀에게 모아졌다. 루이 15세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그녀를 자작의 부인으로 만들어놓았던 것이지만, 그런 식의 얄팍한 속임으로 백성들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루이 15세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뒤바리 부인이 왕비가 될 것이라고…. 이렇게 해서 궁중에 들어간 그녀는 본래의 창녀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천박한 말과 행동을 일삼았다. 왕실의 법과 절도를 무시한 채 밤이고 낮이고 루이 15세의 성욕만 만족시켜주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구입할 여력이 있는 곳은 왕실 밖에 없어서였는데, 루이 15세가 죽고 나니 목걸이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1778년 어렵게 접근한 루이 16세는 2,800캐럿의 목걸이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아름다운 앙투아네트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 했다. 앙투아네트는 내심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록상으로는 그녀는 목걸이 구매에 부정적인 의견을 표한다. 당시 23세에 불과했지만 앙투아네트가 2,800캐럿 목걸이는 거절한 이유는 “목걸이 착용하는 일이 기껏해야 1년에 너댓번 정도일 것이고 차라리 그만한 돈이 있으면 군함건조에 쓰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뵈머는 새 국왕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이 목걸이를 사달라고 간청했지만, 프랑스의 재정 상태를 알고 있던 앙투아네트는 이 목걸이가 너무 비싸다며 거절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녀가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스카프 같다고 평했다는 말도 있다.
뵈머와 바상주는 목걸이 판매를 위하여 모조 보석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유럽 내 여러 왕국으로 보내어 보았지만, 목걸이를 사겠다고 나서는 왕궁이 없었다. 다급해진 두 사람은 1779년 구매조건을 완화하여 프랑스 왕궁과 다시 접촉한다. 일부를 할부로 하고 나머지는 종신연금 형식으로 갖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때도 앙투아네트는 비싼 목걸이를 목에 건 이유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781년 황태자 루이 조셉(louis Joseph, 1781~1789)이 태어나자 뵈머와 바상주는 한 번 더 왕궁에 접근하지만 역시 실패한다.
그런데, 사기사건은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하고 그럴듯한 한경이 조성될 때 발생하기 십상이다. 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사기꾼의 표적이 되었다. 그 중심에 쟌 드 라 모트(Jeanne de la Motte, 1756~1791)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본명은 쟌 드 발르와 생 레미(Jeanne de Valois saint Remy)로 발르와 왕조의 앙리 2세(Henri ⅱ, 1547~1559)의 후손이었다. 비록 왕족의 후손이긴 했지만 200년의 시점이 지난 당시에는 그녀는 가난을 면치 못했다. 그녀는 1780년 헌병장교인 마르크 앙투안 니콜라 드 라 모트(Marc Antoine Nicolas de La Motte)와 결혼하였다. 쟌 드 라 모트는 스스로를 백작부인이라 칭하며 이름도 ‘마리 앙투아네트 드 프랑스 드 생 레미 발르’라 칭하며 교묘히 왕비 이름을 사칭하며 없는 돈에도 호화스런 생황을 영위하였다.
그녀는 돈이 시급했고 부와 권력을 위하여 왕실에 접근하지만, 사람들로 부터 그녀의 행각에 대하여 들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와의 접견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권력집단에 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을 하였다. 그 방편으로 로한(Rohan)이라는 당시 추기경과 교류를 트기 시작한다. 잔 드 라 모트 자신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의중을 대신할 수 있다는 거짓 믿음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로한 추기경은 앙투아네트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주교 로한은 앙투아네트의 신뢰를 얻고자 동분서주했는데 앙투아네트는 이 타락한 대주교를 싫어했다. 이유인즉슨 로한이 오스트리아에 프랑스 대사로 와있으면서 온갖 스캔들과 사치한 생활을 일삼았었고, 이후 여제의 험담을 일삼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다.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에 시집 온 후 로한 대주교를 멀리하고 어머니의 부탁으로 로한 추기경(Cardinal de Rohan)을 프랑스로 소환시켜 버렸다. 로한의 입장에선 앙투아네트의 마음을 잡지 못하면 출세길이 막힐 위기였다.
이런 정황들을 알고 접근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잔느 드 발루아 라 모트(Jeanne de Saint-Remy de Valois) 백작 부인이었다. 부르봉 이전의 프랑스 왕조인 발루아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던 이 여자는 로한 대주교에게 접근했고 앙투아네트의 신임을 받는 신하라고 로한을 속이는데 성공했다. 잔느는 로한 대주교에게 앙투아네트가 루이 15세가 주문한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고 싶어 한다면서, 그 목걸이를 사다가 바치면 왕비의 환심을 얻을 것이라고 꾀여내는데 성공했다.
로한 추기경은 앙투아네트와 접촉을 시도하였다. 앙투아네트에게 자신의 충성과 헌신을 담은 편지를 잔 드 라 모트를 통하여 왕실로 보냈다. 아주 당연하게도 다정한 답장을 받게 된다. 그의 편지는 앙투아네트에게 보내진 적이 없었고 답장은 잔 드 라 모트 부부가 조작한 것 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루즈로 만들어낸 서명이 있었고 편지도 감쪽같아서 남을 속이기에 충분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던 로한 추기경은 앙투아네트와 자신의 은밀한 만남을 쟌 드 라 모트에게 요청한다. 그리고는 1784년 3월 으슥한 밤에 마리 앙투아네트와 로한의 랑데뷰는 이루어진다. 그러나 로한이 만난 여자는 프랑스 왕비 마리가 아니라 그녀를 닮은 밤거리 여인이었다. 로한은 그걸 몰랐다. 그녀를 마리로 믿었던 것이다. 그 사이 쟌 드 라 모트는 로한 추기경으로 부터 전적인 도움도 받고 막대한 빚도 지게 된다. 그녀는 그 돈으로 상류사회의 모임에 참석하면서 상류사회로의 진입에 성공한다.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팔기 위해 상류 인사들의 모임을 기웃거리던 뵈머와 바상주도 그녀를 알게 된다. 그들은 쟌 드 라 모트에게 마리 앙투아네트를 설득하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해주겠냐는 제의를 한다. 모트부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중간에서 빼돌릴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1785년 1월 21일 모트 부부는 앙투아네트 명의의 위조문서를 만들어 추기경 로한에게 보낸다. 그 내용은 국가재정이 원활치 않으므로 로한이 중개자로 그 목걸이를 비밀리에 대신 구매해 달라는 것 이었다. 물론 로한은 목걸이를 할부조건으로 구매를 한다.
1785년 2월 1일 세기의 사기극이 벌어진다. 그날 추기경은 뵈머에게 목걸이를 자신의 집으로 가져오라고 한다. 그들이 도착하자 추기경은 ‘마리 앙투아네트 드 프랑스’라는 서명이 들어간 계약서를 보여주고 안심을 시키고 그들을 돌려보낸다. 다음 날 추기경은 쟌 드 라 모트의 집을 방문한다. 모트부부는 추기경을 비밀 공간 알코브가 있는 방으로 안내를 한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던 중 밖에서 ‘왕비마마의 심부름입니다.’라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도착한다. 모트부부는 추기경을 알코브로 숨기고 거기서 추기경은 심부름꾼이 목걸이를 받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짐작하시겠지만 심부름꾼은 리토드비예트라는 사람이었다. 라모트 부부와 같이 시기 극을 벌린 사람이다. 그들은 즉시 목걸이의 다이아몬드를 해체하여 리토가 프랑스 전역에 팔러 다녔다. 그러다가, 1785년 2월 15일 다이아몬드 40개를 4만 리브에 오늘날 돈으로 6억 5천만 원 정도에 팔려다가 신고에 의해 경찰에 잡힌다. 그러나 분실신고가 없었고, 라모트 백작부인의 것이라고 해서 풀려난다. 이후 라모트 부부는 다이아몬드를 영국에서 파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영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영국에서 24만 리브르 이상의 다이아몬드를 팔았다. 이때에도 장물을 의심하여 영국에서 프랑스 대사관 쪽으로 확인을 하였으나 도난신고가 없다는 이유로 무사히 지나간다. 이후에도 라모트 부부는 프랑스 내에서도 5만 리브로 이상의 다이아몬드를 판매한다. 판매한 돈으로 마차도 사고 하인도 고용하고 돈을 펑펑 쓰고 지낸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로한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서 잔느에게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자 결국 용기를 내서 앙투아네트에게 자신이 산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어떻게 했느냐고 묻게 되었다. 그러나 전혀 그런 사실이 없던 앙투아네트는 분개하며 의회에서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게 했다. 결국 로한은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자신은 그저 속았을 뿐이라고 주장하여 무죄 판결로 풀려났고 설상가상으로 엄청난 금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세간에 알려지면서 민심을 잃고 있던 앙투아네트는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잔느는 사기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지만 혁명세력에 의해 탈옥하여 영국으로 도망친 후, <잔느 발루아 회고록>이라는 책을 내 앙투아네트가 사치하고 방탕하며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식의 이야기들을 퍼뜨렸고 그것으로도 짭짤한 수입을 거두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결국 앙투아네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실제로 프랑스 혁명 이후, 혁명정부는 앙투아네트를 심문하면서 잔느와의 관계 및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에 대해서 심문을 받았다. 앙투아네트는 당연하게도 결백했지만 민중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하고 앙투아네트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잔느도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한 후 파리에서 빚쟁이들을 피해 투신자살하여 죽었다.
1785년 8월 들어 로한 추기경이 전 날 궁내에서 체포됨과 동시에 다른 나라로 피신했던 나머지 범인들도 다 잡히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도 라모트는 영국으로 달아난다. 잡힌 사람들은 재판에 넘겨졌다. 여기서 역사적인 아이러니가 일어나게 된다. 민중들은 이 사건을 왕비 앙투아네트가 실제로 연루된 사건으로 다른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내세워 왕비의 탐욕을 피해가기 위한 것으로 수군거렸다. 그런데, 사실은 알려진 바와 달리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는 인권과 편화를 사랑하는 인간성을 가지고 있었다. 피고인의 인권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왕실에서는 이 사건을 공개재판에 넘겨졌다.
<다음호 계속>
남태우 교수:중앙대학교(교수)▸중앙대학교 대학원 문헌정보학과 박사▸2011.07~2013.07 한국도서관협회 회장 ▸2009.07 한국도서관협회 부회장▸2007.06~2009.06 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 ▸2004.01~2006.12 한국정보관리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