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천만칸 집을 지을꼬(2)

차동영의 唐詩 시리즈 ② 詩聖 杜甫

언제나 천만칸 집을 지을꼬(2)

 

◈ 당시(唐詩)

중국 당나라 시대의 시풍이다.

당시(唐詩)는 중국 당나라 때 지어진 시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송시(宋詩)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이후에는 당나라 때 지어진 시뿐 아니라, 당나라 때의 시풍(詩風)을 이어받은 작품을 통틀어 일컫는다.

당시는 그 시풍의 변화에 따라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으로 나눈다.

◇ 내용 및 특징

당시는 일반적으로 송나라 때 지어진 송시와 대비되어 그 특징이 부각된다. 당시는 가슴으로 쓴 시이다. 이는 서정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의미로, 웃음과 눈물을 통해 마음으로 전해지는 인간적인 체취가 가득하다.

이에 비해 송시는 인생에 대한 깊고 담담한 관조(觀照)와 조망(眺望)이 돋보인다. 생각에 잠기고 이치를 따지는 유현(幽玄)한 맛을 풍기는 것이 송시의 특징이다. 당시를 흔히 중국 고전 시가의 꽃이라고 표현한다. 계절로 비유하자면 당시는 봄이고, 송시는 가을이다. 봄꽃이 만발한 정원을 거닐며 거나한 흥취에 젖어드는 정취가 당시라면, 국화 핀 가을 들판에서 사색에 잠겨 보는 것이 송시의 세계이다.

이처럼 당시는 묘사적이고 서정적인 경향을 특징으로 하지만, 송시는 사변적이고 설리적(說理的)인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당시는 시인의 의도를 단지 이미지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배가 시키지만, 송시는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메시지의 전달에 주안점을 두므로 시인의 의도를 직접 작품에 밝히는 경향이 짙다.

선조 시기 조선에 온 중국 사신의 시를 당시풍이라며 직접 언급한 내용도 나온다(《선조실록》 39년 1월 23일).

◇ 변천

당시는 시풍에 따라 초당, 성당, 중당, 만당으로 구분한다.

초당의 시인들은 대부분 관리로, 상관의(上官儀)로 대표되는 궁정(宮廷) 시인이 다수였다. 이후 초당사걸(初唐四傑), 즉 왕발(王勃)·노조린(盧照隣)·양형(楊炯)·낙빈왕(駱賓王)이 명성을 떨쳤다. 초당 후기를 대변하는 작가로는 유미주의(唯美主義) 시풍을 계승하면서 궁정 시인으로서 율시를 완성하는 데 후원자 역할을 했던 최융(崔融)·이교(李嶠)·소미도(蘇味道)·두심언(杜審言) 등을 꼽을 수 있다. 이후 심전기(沈佺期)·송지문(宋之問)이 근체시인 율시의 격률을 완성하였다.

초당 말엽에는 진자앙(陳子昻)이 궁체(宮體)를 반대하고 개성적인 생명과 감정을 담은 시를 주장했다. 성당 초기에 개성적인 시풍으로 성당의 기틀을 마련한 작가들이 나왔는데, 장구령(張九齡)·하지장(賀知章)·장열(張說)·소정(蘇頲) 등이 대표적이다. 그 뒤 도잠(陶潛)·사령운(謝靈運)·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 등이 등장하여 산수의 아름다움과 전원의 한적한 생활을 구가하는 자연시를 추구하였다. 또한 잠삼(岑參)·고적(高適)·왕창령(王昌齡) 등은 옛 악부(樂府)의 자유로운 형식과 기풍을 계승하여 변새시파(邊塞詩派)를 형성하였다. 시선(詩仙)이라 불린 이백(李白)은 산수시(山水詩)의 정취와 악부시의 풍격을 흡수하여 낭만주의 시풍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중당은 민중의 생활과 감정에 접근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풍은 두보(杜甫)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면서도 개성적인 표현으로 성당과는 다른 새로운 시풍을 개척했다.

백거이(白居易)와 원진(元稹)은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을 전개했고, 한유(韓愈)와 맹교(孟郊)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내용과 표현을 추구했다. 그 밖에도 유장경(劉長卿)·위응물(韋應物)·유우석(劉禹錫)·유종원(柳宗元)·이하(李賀) 등의 시인이 이 시기에 활약하였다.

만당의 개성적인 표현을 추구한 시인으로는 두목(杜牧)과 이상은(李商隱)을 들 수 있다. 또한 고통 받는 민중의 아픔을 노래한 피일휴(皮日休)·섭이중(聶夷中)·두순학(杜荀鶴) 등도 유명하다.

◇ 위수강운(渭樹江雲)

위수(渭水)의 나무와 강동(江東)의 구름을 의미하는데, 먼 곳에 있는 벗을 생각하는 정이 간절한 표현이다. 한 사람 두보(杜甫)는 위수의 북쪽 장안(長安)에, 한 사람 이백(李白)은 고소(枯蘇)에서 유랑하며 강의 동쪽에 있어 서로 떨어져 있음을 나타낸 것으로, 모운춘수(暮雲春樹) 운수지회(雲樹之懷)라고도 표현한다.

두보는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에서 渭北春天樹江東日暮雲(위북춘천수 강동일모운:위수의 북쪽 여기는 봄 나무들 한창 싱그러운데, 강동 그쪽은 해 저무는 날 구름이 마음 설레게 하리)라고 읊기도 했다.

◈ 조선의 두보 시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불교문화는 융성한 꽃을 피웠다. 운문문학에서는 향가를 통해 정신세계와 민족 정서를 표현하였다. ‘숭유억불’을 주창한 조선 시대는 고려 말부터 이어진 시조와 더불어 평민가사문학이 사랑받았다. 유교의 전통이 강한 시대적 경향에 의해 두시언해본이 간행된다.

두보의 시는 충군애민의 이념 등에서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 시대 양반들의 정서에 부합하여 널리 향유되었으며, 언해를 통해 널리 보급되었다.

두보의 시가 언해된 것은 가난과 병 등으로 불우하게 살았으면서도 항상 우국충정의 심정으로 시를 썼기 때문이다.

두보와 이백은 동시대를 살다간 당나라 최고의 시인이었으나 그들의 시풍은 서로 달랐다. 두보는 충군애민의 유교적 사상에 바탕을 둔 애국자요 인도주의자였으며, 당시의 사회 부정에 대해서는 비판과 개탄을 보냈다. 반면에 이백은 천성이 낭만적이고 호방하며 자유자재하여 탈세속적인 삶을 살았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유교적인 사상에 입각하여 두보의 시를 언해하였다.

차동영의 학력및 경력:▴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중어중문학과▴서강대학교 대학원 중국어과▴삼성 배우기 최고가상품 개발▴DMZ종주상품 및 태권도방한관광상품 개발▴CITM(중국국제여유대전)한국관 최우수관 선정 및 수상

*편집자주:본지는 저자의 양해를 받아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중에서 술과 직접 관련이 있는 대표시를 연제한다. 삽화및 관련 사진은 청어사가 제공했다.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