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친구의 행복 함수

박정근 칼럼

술과 친구의 행복 함수

 

애주가의 행복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친구나 술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속물적인 사람들은 돈과 권력으로 물질적인 행복을 추구한다. 대조적으로 영적인 사람들은 물질보다 종교 나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행복을 느낀다. 그렇다면 소박한 애주가는 무엇에서 행복을 느낄까. 아마도 물질과 영성 사이에 있는 정서적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연인과의 사랑이나 친구와의 우정 같은 감정들이 행복을 만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랑과 우정이 싹트는 데 술을 곁들이면서 금상첨화의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다.

 약간 모호한 느낌이 들지만 그것을 인간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평생 술을 사랑했던 천상병 시인은 그 곁에 친구를 두고 살았다. 아마도 친구와 술중에 어느 쪽을 더 가까이 했는지 모를 정도로 친구가 있으면 술이 있고, 술을 마시려면 친구를 찾는 막상막하의 관계였던 것 같다. 특히 그가 생각하는 친구는 세속의 인간들이 가지는 얄팍한 계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친구와 술을 마시면서 술값 계산을

하려면 신발 끈을 매는 체하는 자가 있다면 그를 어찌 친구의 반열에 둘 수 있겠는가.

천상병의 술과 친구에 대한 생각은 〈광화문 근처의 행복〉이란 시에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그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로 소설가 오상원이 있었으며 시인이 만나길 원하면 언제든지 달려 나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고 오상원은 그저 술에만 빠져 사는 인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투쟁에 앞서 나가는 정의파였다. 그러나 그는 가난에 허덕이는 시인 천상병을 평생의 친구로 알고 지냈다고 한다.

천상병은 그의 시에서 “광화문에,/옛 이승만 독재와/과감하게 투쟁했던 신문사/그 신문사의 논설위원인/소설가 오상원은 나의 다정한 친구”라고 친구를 호명한다. 그리고 그가 친구인 까닭은 천상병이 만나고 싶어 전화를 하면 아무런 사설도 없이 뛰쳐나와 우정을 함께 나누어 주기 때문이다. 시인은 오상원에게 신세를 진 것이 미안하여 모처럼 돈이 있다며 그가 내미는 용돈을 거절하려고 한다. 하지만 오상원은 친구의 주머니 사정을 미리 간파하고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한다.

친구란 세속적인 계산을 뛰어넘는 존재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인간적 감정이 우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천상병은 그들의 우정이 어린 극적인 장면을 이 시에서 구체적으로 재현한다.

“어쩌다 만나고픈 생각에/전화 걸면/기어코 나의 단골인/’아리랑’ 다방에 찾아온 그,/모월 모일, 또/와서는 내 찻값을 내고/그리고 천 원짜리 두 개를 주는데…/나는 그 때 “오늘만은 나도 이렇게 있다”고/포켓에서 이천 원을 끄집어내어/명백히 보였는데도,/”귀찮아! 귀찮아!”하면서/자기 단골 맥주 집으로의 길을 가던 사나이!” 결국 오상원은 친구가 모처럼 원고료나 나와야 즐길 수 있는 맥주를 사기 위해 그를 술집으로 이끄는 것이다.

천상병 시인에게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행복은 결코 명품을 소유하고 호화로운 집에서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가 술을 좋아한다고 술독에 빠져서 예쁜 여자들을 거느리고 육욕을 채우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오상원 같은 친구와 소박하게 술을 마시며 우정을 나누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었다. 그는 순수한 장면에 등장하는 순간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 단골집은/얼마 안 떨어진 곳인데/자유당 때 휴간(休刊)당하기도 했던/신문사의 부장 지낸 양반이/경영하는 집으로/셋이서/그리고 내 마누라까지 참석케 해서/자유와 행복의 봄을…/꽃동산을…/이룬 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저와 같은 버러지에게/어찌 그런 시간이 있게 했습니까?”(〈광화문 근처의 행복〉 부분)

천상병은 친구와 함께 파안대소를 하며 술을 한잔 나누는 시절이 바로 “자유와 행복의 봄”이요, 우정을 나누는 곳이 곧 “꽃동산”이라고 감히 정의하고 있다. 시인은 친구인 오상원과 술을 마실 때 아내와 동석한 시간과 공간을 행복의 절정으로 노래하고자 한다. 그리고 왜 신이 그에게 그런 행복을 허락하는지 감격해 한다. 단지 술에 취하기 위해 친구와 아내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가 술을 마시며 친구를 부르고 아내와 함께 하는 것을 바로 그가 행복하기 위한 유일한 전략으로 여긴 것이다.

천상병의 행복은 결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자기중심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행복은 개인의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친구나 아내가 함께 함으로써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친구와 아내는 행복 만들기의 공동체이고 이를 위해 촉매제가 되는 것이 술이라고 본다. 이런 결과를 생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는 겸양이 필수적이다. 그는 신 앞에 자신을 ‘버러지’라고 낮추고 타인의 행복의 밀알이 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박정근 교수

대진대교수, 소설가, 시인, 윌더니스문학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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