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녕하 칼럼
인간의 조건
권녕하 (시인, 문화평론가 <한강문학> 발행인)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일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수 삼년 째 정치 문제나 정국 돌아가는 이야기 또는 국가발전, 민족, 역사 등의 용어를 쓰거나 했더니, 어느덧 ‘정치적 문인’ 이라는 닉네임이 붙어버렸다.
그러던 차에 2020년 봄, 부정선거 논란이 일어나자, 대화중에 관심 없는 척 하던 사람들에게서 전화가 오더니, 지금도 별 관심 없다면서 묻는 말이 부정선거 진위여부와 향후 전개될 정국 상황에 대하여 캐묻는 것 아니겠는가. ‘정 알고 싶다’기에 “그 사랑에 성장하고 그 무관심에 시드는 여린 꽃잎”이라고 대답해줬다. 네가 네 속을 감추는데, 내가 내 속을 보일 줄 알았더냐? 중도 좋아하네!
본래 ‘자유’, ‘평화’는 자연계에서 허상(虛像)일 뿐이다. 자연은 본래 냉혹하다. 정말 자연 상태에서 생존하려면, 내적으로는 자기 방어에 투철해야 하고 외적으로는 정복적이고 개척적이어야 유리하다. 순간순간 닥쳐오는 외부상황 변화에 대한 판단은 야멸찰 정도로 이기적이어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산다. 생존에 관한 한 오직 자신의 유익에 충실하고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사자, 호랑이, 뱀도 새, 들쥐, 토끼도 마찬가지다.
‘자연에 순응해야 좋다’는 말의 진정한 뜻은 생태계의 생존경쟁에서 슬기롭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지, 도가(道家)에서 하는 철학적 용어가 절대 아니다. 생존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고대 인류가 농경을 통해 좀 살만해지니까, 인간 종족끼리의 쟁탈과 살육과 정복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웃을 죽이고 죽고 반복해서는 미래가 암울했겠다.
그래서 안전하게 살아갈 방책을 마련하고, 삶을 즐기고 싶은 욕망이 팽배해졌겠다. 그래서 적(敵) 또는 경쟁 집단들과 절충한 결과, 출현한 용어가 바로! ‘자유’, ‘평화’ 같은 뜬구름 잡는 용어가 탄생했겠다. 따라서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진정 깨달아야 될 말(言)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言)이 정답이다. 그런데 이걸 인류가 깨달은 시점이 이미 많이 늦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19세기부터, 사람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벌어진 현상이 대량학살로 이어진 세계대전이겠다. 20세기 들어와서 또 한 번 이 짓을 반복하더니 연맹, 연합 등을 블록 별로 결성하며 생존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점점 살기 편해진 이 세상에서 인구는 급작스럽게 불어나더니 언제부턴가 한 가정에 한 자녀만 낳으라고 산아제한을 권장했겠다. 그럼에도 한 편에서는 ‘국력은 결국 총인구와 비례’한다는 점을 간파한 국가들이 있었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인구증가를 국가경제로 감당하기 힘들어지자, 첫째 아이 빼고는 법(法)으로 막는 국가가 생겨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런 결정을 한 그 나라의 상황을 토픽 뉴스를 통해 남의 나라 일 정도로 치부했다. 그랬는데 첫째 아이 이후로 태어난 그 아이들이, 호적에 벌금내고 등록했거나 출생신고도 못했던 그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가면서 성인으로 성장해버렸다.
무등록 잉여 인간이 되어버린 그 아이들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이 일파만파로 벌어지자 또 한 번 토픽 뉴스가 나왔다. 무호적 자녀들을 ‘이젠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그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 아이들이 기존의 제도권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생존방법이 필요했을까. ‘잉여 인간(剩餘人間)’ 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면서 아연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쓰잘 데 없는 과잉반응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맡겨두면 될 터인데. 돌연, 전생(前生)의 기억 중 한 토막이 되살아난다. 장진호 전투에서 죽어갈 때였다.
“인간들이!/ 결국 일을 저질렀어/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사람들도 꽤 있지만/ 난, 그럴 줄 몰랐어/ 정말 몰랐어!/ 사람이란 종족이 이렇게까지 미련할 줄 몰랐던 거지// 이러다 죽는 거구나!/ 죽음이 와, 있었어 냉정하게/ 웅크린 시선 아래, 있었어 발 끝에/ 깨진 탁구공처럼, 보였어 죽음이/ 쪼그리고 있었어, 냉동시신이/ 백마처럼 눈밭을 내달렸어, 단기필마로/ 달리고 달렸어, 무작정/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어, 스스로/ 그래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게 다야!/ 하얀 개활지를 내달린 기억.”
-권녕하 〈하얀 개활지를 내달린 기억〉 全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