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맛

애주가가 아닌 이상 술에도 맛이 있다고 말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술에 무슨 맛이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를 일이다. 술에 따라 향(香)은 있을지 몰라도 맛이 있다는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일반적으로 술의 종류에 따라 향기가 있다는 말에는 동감을 해도 맛이 있다는 말에는 고개를 젓기 십상이다.

우리 주위에는 외국 여행을 떠나면서 다른 짐은 못 챙겨도 소주나 혹은 막걸리를 챙겨 가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회귀어종이 물맛을 기억하고 제가 태어난 곳을 찾아오듯 술맛을 기억하는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들 나름대로 술맛을 아는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나 역시 술맛에 대해 말해보라 하면 양주보다는 소주가 좋고, 소주보다는 막걸리가 더 좋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술을 대한지 30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된 것이니,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이야 어찌 이 말을 이해하겠는가. 나에게 술맛에 대해 말해보라고 다시 한번 묻는다면,

술이 지닌 독특한 맛도 나름대로 다르지만 그 보다는 누구하고 어떤 자리에서 어느 분위기에 마시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말할 것이다.

무슨 목적을 갖고 접대차 마시는술, 기분이 좋거나 언짢아 마시는 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격의 없이 마시는 술의 맛은 천차만별일것이다. 사업차 마시는 술은 나보다는 접대 받는 사람의 기분을 살려주기 위해, 혹은 상대방 눈치를 살피며 마셔야 되니 술맛을 느낄 리 없고, 기분이 좋지 않아 마시는 술은 취하기 위해, 혹은 나쁜 기억을 잊기 위해 마시니 취하기 위함이요, 기분이 좋거나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 마시는 술은 마셔도 취하지 않을 뿐더러 맛이 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술맛 하면 작고 문인 중의 애주가 한 분이 생각난다. 누구라고 하면 다 알만한 문인이다. 이분에게 술맛을 물은 적이 있다. 이 분의 대답인 즉, 술은 술의 종류에 따라 다른것이 아니라, 누구와 어떤 분위기에서 먹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말을 했다. 그 시인은 목적을 갖고 먹어야 하는 술자리는 사양할뿐더러, 술맛이 없다고 했다. 시세말로 코드가 맞는 친구와 마시는 술맛은 꿀맛이라고 했다. 통행금지가 있었던 60년대의 이야기다. 시골에서 친구가 찾아오면 처자와 같이 주거하는 단 칸방에서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집근처 술집을 찾아가 주모를 앉히고 술을 먹다가, 통금이 임박하면술 몇 병과 안주를 챙겨 근처 산으로 간다고 했다. 시인이 살던 미아리 근처에는 자그마한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그 곳에 촛불을 켜놓고 밤새 술을 마셔도 누구 하나 간섭하는 사람이 없고 고즈넉해서 술맛이 제법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방에 사는 시인들은 그분을 만나면 당연히 공동묘지에서 술을 마셔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지만 아무리 고성방가를 하며 술을 마셔도 거기까지 찾아와 통금위반이라 탓할 리 없으니 그 술맛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그렇다. 술맛은 좋은 술, 값이 비싼 술이 좋은 것이 아니라 누구와 마시느냐, 혹은 어떤 마음으로 마시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지천명을 넘어서니, 새삼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술벗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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