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자락에 보리를 심다
지난 가을 정읍의 들녘에 나가 보리와 밀을 심었습니다. 만추(晩秋)에 심은 보리와 밀은 누룩 등에 쓰이는 훌륭한 원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맥주를 만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료입니다. 지난 1년 동안 맥주를 연구했습니다. 제가 설립한 동문거리양조장에 양조설비를 들이고 종종 맥주를 빚었습니다. 아니 설비를 완비하고 술을 빚기 시작한 지난 1년뿐만 아니라 3~4년을 맥주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효모에 따라 맥주 맛은 어떻게 달라지고, 당도 변화와 호프의 종류에 따라 맥주는 어떻게 변화하는지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또한 곡물(보리, 밀)의 배합 비에 따른 맛의 차이도 심도 있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국산원료와 수입 원료를 비교평가하며, 저는 수입재료에 때때로 경탄을 했습니다.
맥주를 만드는 원료는 맥아(엿기름)입니다.
맥아는 보리를 싹틔운 것을 말합니다. 보리나 밀 등의 곡물은 뿌리와 싹을 틔우면서 아밀라아제라는 효소를 분비합니다. 이 효소가 곡물 내부에 있는 전분을 당분으로 바꿔서 성장할 수 있는 양분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활용하여 엿기름을 틔워 식혜나 엿을 만듭니다. 서양에서는 맥주를 만들었지요.
맥주를 만드는 맥아는 여러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밀이나 보리 등으로 만들 수도 있고 귀리 등의 잡곡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커피처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볶느냐(로스팅)에 따라 다양한 풍미를 가집니다. 많이 볶으면 흑맥주를 만들 수 있고 적당하게 볶으면 황금색 맥주를 만들 수 있는 것이지요.
제가 수입맥아에 경탄을 한 것은 그들 농업의 힘 때문입니다. 동일한 발효 온도와 환경만 주어지면 수입 원료는 편차가 거의 나지 않는 맥주 맛을 선사했습니다. 이는 곡물을 재배하는 농업기술이 발달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균일한 맥주를 만들 수 있도록 로스팅 등의 1차 가공 기술이 표준화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 보리로 맥주를 만들려면 가장 먼저 걸림돌이 되는 것이 맥아를 만들 수 있는 시설에 막대한 투자비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맥아는 전통술로 비교하면 누룩과 쌀을 합친 것만큼 중요한 구성요소입니다. 물론 대기업은 자체적인 제맥공장(맥아를 만드는 공장)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소규모 맥주양조장이 제맥을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맥아의 로스팅이나 다른 연구들도 초보 단계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맥주를 하지 말고 전통주를 하지?
물론 저도 전통주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니 언젠가는 해야 할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미 많은 분들이 막걸리와 약주 그리고 증류식 소주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장은 전체 주류시장의 1%나 될까요? 그러나 지역의 농업과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에 불과하지만 농업과 문화의 파생효과는 엄청납니다. 이강주나 송화백일주 혹은 복분자술, 죽력고가 없는 전라북도를 상상해보면 그 저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맥주는 우리나라 주류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출고량 기준으로는 80%이며, 출고액 기준으로는 50% 이상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술의 80%가 맥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원료는 대부분 수입입니다. FTA(자유무역협정)는 결국 남도와 제주 지역의 맥주보리농업을 붕괴시키고 있습니다. 농업이 빠진 주류산업은 문화가 자랄 수 없습니다. 이에 우리의 농업이 자리한 맥주를 만드는 것은 저에게 큰 숙제이자 해결해야 할 화두가 되었습니다.
일본 술과 후쿠시마를 생각하다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나라 술뿐만 아니라 외국 술들도 관심 있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일본의 사케나 증류주, 위스키, 맥주를 보며 참 많은 것들을 배워 왔습니다.
일본은 스코틀랜드, 영국, 미국 등의 위스키 강국과 어깨를 겨루는 세계 5대 위스키 생산국입니다. 이는 20세기 초반 위스키의 본국인 스코틀랜드의 선진기술을 배워오고 그것을 계승 발전시킨 결과입니다.
그런데 또한 일본은 고구마나 쌀 그리고 깨 등의 자국산 원료를 사용한 소주가 유행하는 나라입니다.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희석식 소주가 온 나라를 점령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희석식 소주를 갑류소주라 부르며 자국산 농산물을 증류한 것을 을류소주라 부릅니다. 일본을 지배하던 희석석소주(갑류소주)는 1980년대에 지역의 증류식 소주에 판매 1위 자리를 내주고 맙니다.
이처럼 지역과 농업 그리고 문화에 기초한 일본식 소주는 물론이고 와인과 지역맥주(지비루)는 일본의 특색 있는 술과 문화를 만듭니다.
제가 맥주를 하며 조금 힘든 부분이 보리농업과 부수적으로 따르는 1차가공의 한계입니다. 일본의 술 만드는 사람들도 이러한 문제들에 봉착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와 다양한 접근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보기에 부엉이맥주 혹은 지역의 농산물을 활용한 맥주 등은 분명 전통적인 맥주가 아니지만 굳이 유럽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이는 맥주의 본 고장 유럽의 농업을 따라갈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인정하면서 자연스럽게 본연의 맥주와는 다르면서도 지역의 특산물을 술에 반영한 결과입니다. 이는 다양한 발포주의 융성과 복숭아맥주, 포도맥주 등 과실과 결합한 이색적인 맥주를 탄생시켰습니다.
이는 맥주뿐만 아니라 당도가 떨어지고 과실의 품질이 양조에 적합하지 않은 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농업과 술의 창조성을 끊임없이 모색했던 일본 술도 최근의 후쿠시마 원전소식을 접하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원전의 괴담이 자꾸 현실이 되고 한국사회도 자꾸 닮아가는 요상하게 보수화되는 일본의 정치가 못미더워서이지 결코 일본 술과 그 술을 만드는 장인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또한 지하수의 오염이 술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거라는 불안감이 가장 크죠.
좋은 술은 시대와 사회가 함께 만든다는 것을 후쿠시마를 보며 깨닫게 됩니다.
맥주도 ‘詩’를 찾은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
최고의 마케팅과 영업은 세월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막대한 광고비나 블로그 등의 홍보를 통해 바로 시장에 진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술은 농업이 있어야 하며, 그에 따르는 술로의 가공이 있어야 하고, 분위기에 맞는 술집이 있어야 하는 매우 고지식하면서도 모던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주전통술박물관에서 매년 해오던 한옥마을 술축제가 지난 가을에 열렸습니다. 주신(酒神)에게 올해의 술을 바치고 무탈과 안녕을 고하며 시작된 이 행사는 가양주의 맛과 멋을 알리는 매우 뜻 깊은 행사입니다. 참으로 맛난 가양주들이 나왔고 제 맥주도 ‘시’를 찾은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습니다.
또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 저는 제 이름이 주신제의 말석에 오르기를 희망합니다. 이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제가 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소지(燒紙)하는 것과 같은 일반적인 제례입니다. 저뿐이 아니라 술박물관을 이끌던 사람들과 전주의 가양주를 빚던 사람들이 그 대상일 것입니다.
세월은 그렇게 쌓이는 것이고, 그 향을 사르는 사람들은 제 아들이거나 후배들이겠죠.
술은 무릇 그렇게 세월을 견뎌야 하는 음식입니다.
* 제목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빚는다’ 는 시인 박남준의 시집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에서 차용했음을 밝힙니다.
유상우
이 글을 쓴 유상우씨는 전주동문거리에서 동문거리양조장을 운영하며 맥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창작소극장 앞 2층의 ‘시’에 가면 유상우씨가 만든 맥주를 즐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