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음주문화와 알코올 정책(中)

주류산업과 정책이야기(37)

이탈리아의 음주문화와 알코올 정책(中)

조성기(아우르연구소 대표/경제학박사)

 

이탈리아 포도재배의 역사

포도는 기원전 3,000년부터 지중해 연안에서 재배하기 시작되었고 메소포타미아지방에서도 경작되었다.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시(Gilgamesh))의 서사시에 보면 와인은 신성에 접근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기원전 2,000년경 미노안(Minoan) 시대에 이미 와인 저장탱크가 사용된 흔적이 있다. 시라큐스 근방의 고대의 무덤에서 그 탱크가 발견되었다. 시실리 섬에서의 와인생산은 그리스인들이 에게 해를 건너 그 섬을 식민지화하기 이전부터 일반적이었다. 시실리 섬의 뜻이 바로 ‘풍요의 땅(land of fertility)’이다. 이탈리아 연구자들은 시실리를 아예 와인의 땅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시실리에 설치된 그리스의 식민지와 남부이탈리아 지방가 포도의 주산지다. 기원전 800년 경 포도재배법이 로마로 전파될 때 그 곳으로 우선 집중 되었다고 한다. 북부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인들도 로마시대 이전부터 와인재배법을 알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지금 투스카니와 라지오라고 불리는 지방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주로 자가소비를 위해서 와인을 생산했고 남은 와인을 북부이탈리아와 동부 프랑스 지방인 갈리아로 수출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다방면에서 로마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는 포도(vinum)이라는 단어가 에트루리아어 비노(vino)에서 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에트루리아인들과는 달리 초기의 로마인들은 와인 음주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공화국의 도덕기준에 따르면 음주가 로마시민의 존엄을 낮추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기원전 500년경의 법에서는 임신여성의 음주가 태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금지하였다. 현대에 태아알코올증후군에 대한 예방행위가 이미 로마시대에 있었던 것이다.

음주에 대한 태도가 크게 변화한 것은 카르타고를 패배시킨 이후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잡은 이후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작가인 카토(Cato)는 유명한 농업서적에서 다른 곡물 보다 포도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이탈리아에서 와인은 부유한 사람들의 식탁에서 값진 음료로 사용되었고 포도재배농가는 이윤이 제법 남는 기업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품질 좋은 와인이 생산되게 된 것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였다. 포도주 가격이 좋아지자 로마와 나폴리 사이에 포도산지가 집중되었고 폼페이와 오스티아가 주요 수출 항구로 사용되었다.

이 시대에 이탈리아에서 와인생산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큰 재난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기 79년에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하여 폼페이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폼페이 시민 대부분이 죽었고 그 주변의 포도밭은 잿더미가 되었던 것이다.

로마의 와인공급이 크게 감소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밀 경작지를 급히 포도밭으로 바꾸었다. 그러자 20년이 지나지 않아 포도가 과잉 생산 되었고 이젠 밀과 다른 곡물이 다시 부족해졌다. 그러자 황제는 새 포도밭을 만드는 것을 금지했고 변경의 포도밭 절반을 갈아엎을 것을 명했다. 황제가 포도가격이 싸져 수입이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인지 민중들이 먹을 다른 곡물이 부족했기 때문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로마인들은 와인을 상징이나 신비적 측면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는 그리스인들과 달리 실용적이었다. 로마인들은 주로 와인의 경제적 의미를 강조했다. 그리고 나서 종교, 문학, 예술 측면의 와인을 다루었다. 로마인들도 와인을 종교적 공물의 하나이고, 문학작품이나 조형물들에서 음주의 신성한 기쁨을 표현했다. 이때 경제를 우선시 한 것이 훗날 사회주의의 작품에서 발견된다고 평하는 학자들도 있다.

로마제국이 번창해지자 와인이 전 유럽으로 파급되었다. 현대에 와서 위스키, 맥주, 와인이 전 세계의 주요 주류시장을 장악한 이유와도 유사하다. 서구인들이 동양과 아프리카, 중남미 등을 장악하자 서양의 술이 전파된 것 말이다. 술은 기호품이고 삶에 꼭 필요한 필수품은 아니다. 결국 기호품의 문화, 강한 국가의 음주문화가 후발국으로 수출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전통소주의 품질이 위스키나 보드카에 뒤지지 않지만 한국 술이 해외로 수출되는 양은 크지 않다. 그 이유는 한국이 제국으로 발전하지 못했던 데에 가장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로마인들은 북아프리카, 스페인, 포르투갈, 남부 프랑스 등 식민지역에 가서 포도밭을 경작하였다. 로마제국이 기울자 포도경작 역시 기울었던 것은 당연지사다.

로마가 바바리아인이 침입으로 군사적 압력을 받거나 정치적 행정적 혼란이 발생하여 쇠락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라의 힘이 쇠하자 포도 경기가 쇠락하고 통치재원이 부족하게 되어 세금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로마 멸망의 민원은 포도산업의 쇠락에서 시작된 것이다.

정부의 세율 증대에 저항하는 지주들은 세금을 덜 내려고 포도재배를 줄였다. 나중에 프랑스에서 포도주에 세금을 많이 붙이자 이를 피하려고 코냑을 개발하고, 스코틀랜드에서 주세를 안내려고 술을 산 속에 숨긴 것과도 같은 이유다. 주세를 피하기 위해 주류산업은 그제나 이제나 큰 노력을 한다.

서기 300년 경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를 반전해 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 포도밭을 파괴한 자들을 사형에 처하기도 하여 국세를 유지하려고 갖은 노력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폭정은 일시적인 버팀목이 되었을 뿐이었다. 주세는 그때 이래로 각국의 국가재정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소위 농업에서 부가가치가 큰 가공파트가 어느 나라에서든 주류산업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이후 포도밭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중세에 와인이 다시 이탈리아 문화와 사회의 중심이 된다. 와인은 성찬식 등 기독교의 의식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수도원에서 교회에서 사용할 포도를 직접 경작하는 경우도 많았다. 수도원이 유럽 전역에 포도재배 기술을 확산하는 중심이 되기도 했다. 종교와 와인이 함께 움직이는 풍경도 연출되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도심의 거리나 길의 명칭에 포도의 의미가 들어간 곳이 매우 많다. 비그노찌, 비노지, 비나조리, 비노제티, 비그나, 베치아, 젤라 비그나 누오바 등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와인의 위상은 다른 나라의 술 보다 매우 컸던 것이다.

알코올에 대한 부정적 ‘문제제기’의 시작

기원전 1750년 함무라비 법전에서 술의 부정적인 영향을 잘 다루고 있다. 주로 술의 가격, 제공하는 술의 량에 대한 속임수, 수녀의 음주 등에 대한 것들이었다. 술 문제에 대한 관심내용은 현대와 달랐다.

1800년대 후반까지 음주로 인한 알코올 문제가 이탈리아 일반인들의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아주 제한적 수준이었지만 1700년대 말에 알코올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기는 하다.

1774년에 학자들이 과음의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 경고를 한 바 있다. 즉, 태아에 미치는 영향, 신생아나 노인들에 대한 위험이 그것이었다. 학자들은 항상 그제나 이제나 돌발적이다. 그렇지만 문제가 일반화된 것은 1800대 후반에 와서다.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알코올 소비와 알코올 남용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 때 술이 문제라는 생각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과세를 통해 술 수요를 줄이자는 정책적 아이디어가 서자 알코올은 소금과 밀가루처럼 과세의 대상이 되었다. 1880년 경 증류주에 과세하여 걷은 수입이 국가의 연간 과세총액의 10%가 넘게 되었다.

1880년대가 되자 의사와 법학자들이 알코올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술 문제에 대한 정책적 지향점을 근본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의사는 건강의 문제를 제기하고, 법학자들은 알코올 남용을 안녕과 질서를 잡기위해 다루어야 만 하는 정책 과제로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 정부는 특히 음주와 건강의 관계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특히 품질이 낮은 와인의 유해성에 대해 더 관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학계의 관심은 빈곤과 건강, 도덕적 타락과 관련된 것 등 다양했다. 오히려 건강보다 그 부분이 더 우선적 과제라고 생각했다.

정부는 주세를 걷는 주체로서의 책임성에 관심을 가졌고, 민간부문에서는 종합적인 사회문제와의 관련성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정치적 감각차이였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사회과학자들은 술을 범죄, 도덕적 문제와 관련지어 생각했지 알코올 의존증과 관련이 크다는 사실에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았다. 즉 술과 관련된 논쟁은 술 문제가 ‘도덕적 결함이 있는 사람들의 문제인가? 술 자체가 문제인가?’라는 데 대한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이탈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81년 이탈리아의 형법에서는 만취를 범죄시하였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는 알코올 남용에 대한 보건적 측면에 더 관심이 커졌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개선되면서 술과 빈곤이나 범죄와의 관계를 따지는 일이 줄었다. 오히려 과음과 건강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한 때 밀라노를 중심으로 진행된 절주운동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그렇지만 결과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 정치인들이 술문제에 개입을 했고 1913년에 알코올 통제법을 통과시켰다. 그렇지만 주류에 대한 접근성이 크게 줄어들지는 않았다.

판매점 허가제와 구매 연령제한 등 몇 가지 음주통제가 가해졌다. 그러나 소매점들이 전국적으로 강력히 반발하였다. 그 이후 이탈이아에서 술을 법적으로 통제를 하려는 별다른 시도는 없었다. 현장 소매상들의 입김은 정치권을 움직였다. 민생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 문제였던 것이다. 소매점들의 반발이 정치적 힘을 갖는 것은 우리나라나 이탈리아나 비슷하다.

정치가 이탈리아 음주 통제정책에 큰 영향을 미친 재미있는 사례가 있다. 파시즘이 집권을 했을 때 큰 변화가 있었다. 이 때 알코올 남용과 범죄의 문제가 중점적으로 거론되었다. 우리나라도 주취자 보호법이 불거질 때와 유사성이 있다. 파시즘 시대에 주취 난동자 문제를 법으로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불거졌다.

무솔리니의 주요 관심사가 정치적인 것이지 알코올 그 자체가 아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동자들이 술집에서 체제에 도전하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독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술집은 당시 실업자들 사이에 직업을 구하는 문제나 스트레스를 푸는 장소였다. 다분히 정치적 집회 장소였던 것이다. 술집 문을 닫아버리면 정부전복 활동을 줄이거나 없애는데 가장 효과가 크다는 참모들의 제안이 통했다. 정치가들이 술집이나 광장을 없애는 이유는 대부분 같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모였을 때 생물적 바이러스도 문제가 되지만 정치적 바이러스도 큰 전염력을 가진다.

조성기(趙聖基, Surnggie Cho, PhD. of Economics. MPH.)

한국대학생알코올문제예방협회, 회장

원주한살림, 이사장

살림농산, 대표이사

아우르연구소, 대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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