酒量은 고무줄 같은 것
며칠 전 보험회사와 통화 중 “酒量이 얼마나 되세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생명보험에 추가로 보험을 들면 80세까지 보장되는 보험이라며 가입을 강추하면서 던진 질문이다.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과연 나의 주량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풋술을 마실 때는 누가 술 마시자는 이야기만 하면 천릿길을 마다 않고 달려가곤 했었고, 중·장년이 돼서는 술 마시는 노하우를 어느 정도 터득한지라 상대방이 떨어질 때까지 마셔도 다음날 거뜬했었다. 풋영감 소리를 들을 나이가 돼서는 함께 술 마실 수 있는 술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술 마시는 횟수가 줄어들고 주량도 눈에 띠게 줄어든다.
그러니 나의 주량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 선뜻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끔 연예프로에서 출연한 배우들에게 “주량이 얼마나 되세요?”라는 질문에 “소주 한 병 정도”라고 대답을 하는 연예인들을 보면서 참으로 거짓말도 잘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는데 내가 바로 그런 입장에 놓였던 것이다.
아마 이 세상에서 싱거운 질문 중에 하나가 주량을 묻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답을 대는 사람보단 오답이나 은폐형 대답으로 대신 할 것이다. 굳이 정답을 찾자면 “그때그때 다른데, 오늘은 한 잔도 마시기 싫다. 혹은, 오늘은 한 병 마시고 다섯 병 더 마시죠! 기분 좋은데…”
그러면 ‘고무줄 주량’.
주당들은 때론 乞神들린듯 미친 듯이 마신다. 때론 세상을 비판하며 정치꾼들을 안주삼아 술을 마신다. 직장 상사는 밑반찬이 된지 오래고, 직장 내 경쟁자는 벌써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해서 내 팽겨 쳐져 버렸다. 술판이 꼭 욕하고 비판만 하는가! 때로는 기분 좋아 마시고, 노래도 부른다.
이런 주당들에게 “당신의 주량은 얼마나 되세요?”라고 물어서 무슨 답을 받아낼 것이가.
사전적 의미에서 ‘酒量’은 ‘술을 마실 수 있는 한계치’라고 정의 하고 있다. 더 정확한 정의는 ‘마신 후 다음날 아침 평소처럼 일어나 생활할 수 있는 양’이 주량이라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한테 민폐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취하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양. 즉, 자신이 행동이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까지 마실 수 있는 주량을 지키는 사람보단 지키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음주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산업 디자인계의 거장 김영세 씨가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대학생 시절엔 정말 무식하게 마셨어요. 막걸리, 맥주, 소주 등등. 그때는 누가 사주면 ‘땡큐’ 하고 마셨죠.” 주량은 “고무줄과 같다”고 했다.
연예인들의 주량은 방송 멘토와 달리 실전에서는 세게 나온다. 개그맨 김원효의 주량은 소주 5병. 그는 동료 개그맨들과 술자리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폭탄주를 즐기는 손창민의 폭탄주는 양주 9에 맥주 1의 비율인데 이에 대해 손창민은 “양주만 마시면 너무 진할 것 같아 약간의 맥주로 희석한다”며 너스레를 떤다.
정준호는 ‘30-30클럽’의 멤버다. 한 자리에서 폭탄주 30잔과 양주 스트레이트 30잔을 마신다는 의미로, 어마어마한 음주량을 나타낸다.
이처럼 연예인가운데 자신의 주량을 모르는 두주불사 형이 많다. 이들 대부분은 음주에 관한 좌우명으로 ‘술자리에서 중간에 일어나는 건 죄악’이라고 여길 정도다.
여자 연예인 가운데서도 심은진은 소주 9병, 7병의 신지가 막상막하의 실력을 뽐내고, 소주 광고 모델인 애프터스쿨 유이는 위스키 20잔.화려한 면모와는 달리 연예인들 가운데는 주당 파들이 의외로 많은데 이들이 공식적인 주량은 소주 한 병정도라고 말한다.
언젠가 기상캐스터 출신 방송인 안혜경이 방송에서 자신의 주량을 밝힌 적이 있는데 주량이 얼마냐는 MC들의 질문에 “한 병에서 한 상자 사이”라고 답해 눈길을 끌었다.
아마 가장 정확한 대답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주당들의 주량은 고물줄 같다는 것이 정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