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를 마신다… 위스키 브랜드 스토리


歷史를 마신다… 위스키 브랜드 스토리

모든 위스키에는 이야기가 있다

 

무심코 한 잔을 마신다. 오늘따라 유난히 맛에 홀린다. 곧 병을 집어 든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잘 보이지 않았던 라벨이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살피니 그림과 문양이 있고 알듯 말듯한 글과 숫자도 눈에 띈다. 과연 이 술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좋은 술은 입만 즐겁게 하지 않는다. 코와 눈과 귀도 만족시키고, 급기야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전율까지 얹어준다. 결국에는 알면 알수록, 혹은 점점 익숙해질수록 그 술이 갖고 있는 이야기에 빠져버린다.

모든 위스키에는 이야기가 있다. 예외는 없다. 일부러 만든 건 아니다. 수백 년의 역사를 품고 있다 보니 자연 얘깃거리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브랜드 스토리’라고 부른다.

이제 술은 맛으로만 평가받지 않는다. 그 술에 입혀진 스토리텔링으로 먹고사는 시대다.

자료·사진제공 글렌리벳·글렌피딕·발베니·페르노리카코리아·맥캘란·디아지오코리아

 

少年이 만들어낸 성공

‘조니 워커’ 스토리

 

조니 워커의 창립자는 존 워커(John Walker)다. 그는 1805년 스코틀랜드 킬마넉(Kilmarnock) 근처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다. 14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농장을 매각해 그 돈으로 운영 중인 식료품가게에 투자하고, 1820년 정식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조니 워커의 시작은 이때부터다.

조니워커 브루 리뉴얼조니워커 블르 리뉴얼존은 블렌딩(blending) 솜씨가 좋았다. 초창기 그가 주로 블렌딩한 건 위스키가 아니라 차(茶)였다. 직접 운영한 식료품가게에는 여러 종류의 차가 있었는데, 이를 고객들의 취향에 맞게 블렌딩해줬다. 존은 이와 함께 인근 증류소에서 만든 자극적이고 스모키(smoky)한 몰트위스키도 팔았다. 하지만 제품마다 품질의 차(差)가 심해 종종 말썽이 됐다. 이에 존은 그만의 블렌딩 기술을 이용해 고객들을 위한 특정 레시피를 만들었고, 이것이 대히트를 쳤다. 이후 매년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는 하우스 블렌디드위스키를 만들면서 성공의 역사가 시작됐다.

병 라벨에 그려진 ‘스트라이딩 맨(striding man)’은 조니 워커의 상징이다. 이 그림을 그려준 사람은 유명 만화가인 톰 브라운(Tom Browne)이다. 조니 워커 레드라벨과 블랙라벨이 막 출시됐을 무렵인 1909년, 존의 손자인 조지 워커와 점심식사를 하던 톰이 냅킨 뒷면에 스트라이딩 맨을 그려줬다. 조지는 이 그림에 ‘1820년에 탄생해 아직도 계속 가고 있음(Born 1820 going striding)’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스트라이딩 맨이 조니 워커의 상징이라면 브랜드 모토는 ‘킵 워킹(Keep Walking)’이다. ‘계속 걸어간다’는 의미로 끊임없는 도전과 발전을 상징한다. 10대 중반에 불과한 존이 집안을 돕기 위해 시작한 작은 식료품가게는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킵 워킹 정신을 통해 세계 최고 위스키 브랜드인 조니 워커로 거듭났다. 지금도 정상의 자리를 지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역시 킵 워킹 정신이다.

 

맥캘란 증류소농사꾼이 세운 증류기

맥캘란 스토리

 

 

전 세계 싱글몰트위스키를 대표하는 맥캘란(The Macallan)의 역사는 1824년 시작됐다. 알렉산더 레이드(Alexander Reid)가 설립 당시 지금 모습의 증류소를 세웠고, 1892년 로데릭 켐프(Roderick Kemp)가 소유권을 사들였다. 농사꾼이었던 레이드는 품질 좋은 위스키를 만들어 인정받았고, 경영에 일가견이 있던 맥캘란 18년산맥캘란 12년 산켐프는 맥캘란을 스코틀랜드 밖에서도 유명하게 만들었다. 맥캘란이라는 이름은 두 단어의 게일어(語)가 조합된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비옥한 땅이라는 뜻의 ‘맥(Magh)’과 아일랜드 출신의 사제(司祭) 성 필란(St. Fillan)을 의미하는 ‘엘란(Ellan)’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설립부터 지금까지 소규모 가족사업 형태로 운영 중인 맥캘란은 수백 년간 전통 방식 그대로 위스키를 생산하고 있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물과 보리, 이스트(yeast), 제조법, 셰리오크통을 사용한다. 그 결과를 잘 보여주는 예가 있다. 맥캘란은 지금까지 열린 주류 경매에서 최고가(最高價)를 기록한 톱 10 브랜드 가운데 9개에 그 이름을 올려놓았다.

스페이사이드(Speyside)에 위치한 맥캘란 증류소에서 주목할 것 중 하나는 증류기다. 스코틀랜드에선 가장 작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과거의 전통과 장인정신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보통의 증류기와 달리 모양이 독특한데, 2차 증류액 전체의 맛과 향을 집중시켜 최고의 증류액을 만들어낸다. 맥캘란 증류기는 스코틀랜드 10파운드 지폐에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맥캘란은 셰리오크통을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셰리오크통은 스카치위스키를 숙성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생산량이 적고 값이 무척 비싸다. 이 때문에 현재 영국에선 최고급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용도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맥캘란을 얘기할 때 ‘이스터 엘키스 하우스(Easter Elchies House)’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본사 겸 방문객 센터로 사용하고 있다. 300년 넘도록 맥캘란과 함께 하고 있는 이곳은 맥캘란의 정신적 고향이자 상징이다. 맥캘란의 메인 로고로도 활용중이다.

 

형제가 이뤄낸 성공신화

시바스리갈 스토리

  

1801년 존 시바스(John Chivas)와 제임스 시바스(James Chivas) 형제는 스코틀랜드 동북부 지역의 애버딘(Aberdeen)에 식료품가게를 열었다. 장사 수완이 좋았던 시바스 형제는 전 세계에서 사들인 고급식품을 귀족들에게 대량으로 공급하면서 회사를 번창시켰다. 그러시바스 리갈는 가운데 최상급 제품과 몰트위스키로 명성을 쌓아갔다.

급기야 1843년 시바스 브라더스사(社)는 영국 왕실로부터 ‘로열 워런트(Royal Warrant)’를 수여받고, 빅토리아 여왕이 먹을 식품들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로열 워런트는 왕족․귀족의 물품이나 의상 등을 공급하고 담당하는 곳을 인정하는 인정서를 말한다.

마침내 시바스 형제는 1840년대에 품질 좋은 스카치위스키를 캐스크(cask․통)에 담아 숙성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들은 여러 종류의 몰트위스키와 그레인위스키를 블렌딩하면 풍성하고 미묘한 맛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850년대 들어선 순한 그레인위스키와 강렬한 몰트위스키를 절묘하게 조합해 부드러운 맛의 블렌디드 스카치위스키를 만들어냈다. 입맛이 까다로운 고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전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블렌디드위스키는 1860년 주류법(Spirit Art)에 의거해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됐다.

1880년대 필록세라(phylloxera)균이 프랑스 포도원에 창궐하면서 포도나무가 죽어나가자 곧 와인, 브랜디가 위기를 맞았다. 대체품을 찾던 와인애호가들은 위스키 쪽으로 눈을 돌렸고, 이런 요구에 발맞춰 시바스 브라더스사는 1909년에 25년의 결실인 프리미엄 스카치위스키 시바스리갈(Chivas Regal)을 세상에 선보였다. 시바스리갈은 ‘시바스 가문의 왕’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금주법이 공포(公布)되자 시바스리갈 25년은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하게 됐다. 그렇지만 1950년 시바스 브라더스사는 최소 12년 숙성과정을 거친 위스키만을 혼합한 시바스리갈 12년을 만들어냈다. 이 제품은 곧 미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인기를 되찾아왔다.

 

최초로 증류면허 취득

더 글렌리벳 스토리

 

1800년대 초 스코틀랜드에는 불법 증류가 성행했다. 그러는 가운데 더 글렌리벳의 설립자 조지 스미스(George Smith)는 1824년 스코틀랜드에서 최초로 합법적인 증류 면허를 취득했다. 더 글렌리벳의 품질이 소문나자 다른 증류소에선 그들의 브랜드 이름에 글렌리벳이라는 단어를 더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그러자 조지는 1884년 글렌리벳이라는 이름 앞에 ‘유일(唯一)’이라는 의미로 정관사 ‘더(The)’를 붙여 법원으로부터 상표등록인증을 받았다. 유명 위스키 평론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은 “스페이사이드의 위스키들에게 글렌리벳 지역은 코냑에서의 그랑드 샹파뉴와 같다”며 “위스키 중 유일하게 ‘더 글렌리벳’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유명한 스페이사이드 몰트위스키”라고 말했다.

더 글렌리벳은 스코틀랜드 하이랜드(Highland) 북동쪽에 있는 글렌리벳 지역에서 시작됐다. 해발 900피트의 이곳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다. 일년 내내 일정한 기온을 유지하기 때문에 위스키를 숙성시키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다.

1840년대 이르러 더 글렌리벳은 영국 런던에 진출했다. 그곳에서 영국 전역의 주류 전문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스카치위스키로 인정받았다. 이에 탄력을 받은 더 글렌리벳은 미국 시장에도 진출했다. 결과는 대성공. 그 결과 현재 미국 싱글몰트위스키 시장에서 최고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더 글렌리벳의 품질은 3대 요인이 결정적이다. 광천수(鑛泉水), 증류기, 숙성과정이 그것이다. ‘위스키의 젖줄’로 불리는 스페이(Spey)강 유역에 자리한 증류소 안에는 ‘조시(Josie)’라는 우물이 있다. 보통의 지하수와는 달리 풍부한 미네랄을 함유하고 있는데, 이는 보리에서 당분을 추출하는 ‘매싱(mashing)’ 과정을 촉진시킨다. 또 조지는 몸통이 넓고 목이 긴 형태의 증류기를 개발했는데, 증류 과정에서 넓은 몸통은 효모간의 상호작용을 촉진시켜 풍부한 과일 아로마를 추출해내고 긴 목을 통해서는 불순물과 잡맛이 제거된다.

 

온가족이 이뤄낸 희망

글렌피딕 증류소

 

최고(最高)의 위스키를 만드는 게 꿈이자 목표였던 윌리엄 그랜트(William Grant). 그는 1886년 가을, 100파운드가량의 연봉을 모아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피딕(Fiddich)강 근처의 스페이사이드 땅을 구입했다. 이곳에서 윌리엄 부부는 7명의 아들, 두 딸과 함께 직접 땅을 파고 돌을 옮겨 글렌피딕(Glenfiddich) 증류소를 세웠다. 그리곤 1887년 크리스마스에 마침내 글렌피딕 최초의 증류액을 생산해냈다. 윌리엄이 꿈꿔온 ‘The best drama of the valley’(계곡의 최고 드라마)가 현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첫 증류를 시작한 초창기에는 낮은 인지도 때문에 판매가 수월치 않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 하나가 빛이 돼 주었다. 어느 날 글렌리벳의 증류업자였던 존 고든 스미스(John Gordon Smith)의 증류소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거래처의 주문량을 채우지 못하자 존은 고객들에게 글렌피딕의 위스키를 권유했고, 그 후 품질에 만족한 고객들 덕분에 글렌피딕의 인지도는 조금씩 상승했다. 이를 계기로 글렌피딕은 여러 블렌디드위스키 증류소에 몰트 원액을 공급하는 업체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고, 1893년에는 프리미엄 수제(手製) 싱글몰트위스키 ‘발베니’의 증류소까지 설립했다. 1963년에는 전 세계 최초로 싱글몰트위스키 원액 자체만으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윌리엄 그랜트 가문은 다른 증류소가 경영난과 거대 자본의 유입으로 인수합병을 거듭하는 상황에서도 가족경영 체제를 유지해 왔다. 지금까지 5대(代)에 걸쳐 차곡차곡 그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글렌피딕이라는 이름은 ‘사슴 계곡’, ‘사슴이 있는 계곡’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켈트어(語)로 ‘글렌(Glen)’은 계곡, ‘피딕(Fiddich)’은 사슴이다. 이런 이유로 수사슴의 머리를 이용한 로고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삼각형 병 디자인은 1957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글렌피딕의 또 다른 상징이 됐다.

 

손끝에서 나오는 名品

발베니 스토리

 

바로 지금, 옷은 물론 시계, 가방, 구두 등의 명품(名品)을 떠올려 보자. 어떤 품목이라도 이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제품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한 마디로 ‘수제품(手製品)’이다. 장인(匠人)의 손끝에서 나오는 미학이 상품의 가치를 더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발베니(The Balvenie)는 위스키의 명품이다. 수제 프리미엄 싱글몰트위스키 발베니는 120여년 전의 위스키 제조방식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다.

500년 전 스코틀랜드 동북부를 지키던 철옹성(鐵甕城) 발베니 캐슬에 세워진 증류소에선 1892년 첫 증류 이래 지금까지 전통 수제방식을 고집하며 발베니를 만들고 있다. 그러니까 보리 경작에서부터 몰팅(malting), 병입, 라벨링(labeling)까지 위스키의 전 과정이 사람의 손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다. 물론, 그 손의 주인공은 45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장인들이다. 이들이 각 과정을 책임진다. 100% 손으로 만들다 보니 생산량은 적을 수밖에 없고 효율성도 낮지만, 술맛은 가히 최상품이다. 그런 까닭에 전 세계에서 판매되고 있는 위스키 가운데 가격대가 가장 높다. 영국 본토에서도 소수 상위 클래스만을 위한 프리미엄 싱글몰트위스키로 알려져 있다.

발베니의 경쟁력은 일류 몰트 마스터(malt master)의 존재에 있다. 몰트 마스터는 수 만개의 오크통에 담긴 원액들의 미묘한 맛과 향의 차이를 잡아내 위스키 품질을 고르게 유지하는 사람이다. 발베니의 몰트 마스터 데이비드 스튜어트(David Stewart)는 유명 위스키 평론가인 짐 머레이(Jim Murray)가 ‘위스키의 신(神)’이라고 칭송한 인물이다. 그의 실험정신과 위스키에 대한 뛰어난 감각이 발베니의 신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발베니는 해마다 적은 양을 생산한다. 이는 자체 농장에서 재배한 고품질 보리로 만들기 때문인데, 이 보리의 수확량에 따라 생산량이 결정된다. 다시 말해 고품질 보리의 수확량이 많은 해에는 생산량이 조금 많아지겠지만, 그 해 흉년이면 생산량이 적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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