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문학의 거장 류이창의 대표작 『술꾼』
몽롱한 시선에 비친 ‘이주자의 도시’ 홍콩
홍콩을 대표하는 작가 류이창의 장편소설『술꾼』이 국내 초역되었다. 이 작품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시도한 중국어권 최초의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으면서 인민문학출판사 등이 주관한 ‘100년 100종 우수 중국문학도서’, 홍콩 『아주주간(亞洲週刊)』이 주관한 ‘20세기 중문소설 베스트 100’, 홍콩 펜클럽이 주관한 ‘20세기 홍콩소설 베스트 100’ 등에 선정된 바 있다.
작가 류이창은 1918년 상하이에서 태어나 서른살이 되던 1948년에 홍콩으로 가서 여러 신문과 잡지의 문예면 편집일을 하였다. 그는 싱가포르에서 체류한 몇년간을 제외하고는 60여년간 홍콩에서 작품활동을 해왔는데 작품은 이런 그의 자전적인 측면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중국권 모더니즘 문학에 한획을 그은 작품
장편 『술꾼』의 화자는 단신으로 고향 상하이를 떠나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홍콩에 도착한 이주자로서 생활을 위해 신문에 무협소설을 연재하긴 하지만 중국의 고전문학과 현대문학뿐만 아니라 서양문학에 대해서도 풍부한 식견을 가지고 있다.
화자는 무엇보다도 문학의 예술적 가치와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는 인물로, 금전만능적 사회인 홍콩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순문학 잡지를 창간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화자는 잡지 편집일을 하면 할수록 생활이 곤궁해져 나중에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황색소설’을 쓰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그는 홍콩에서 순문학 잡지를 발행하는 것에 회의적인 생각이 들게 된다. 그는 현실 적응과 이상 추구 사이에서 갈등하며 술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서 여급들에게 싸구려 사랑을 사곤 한다.
이런 화자를 따뜻하게 대해준 사람이 바로 세 들어 사는 집의 정신이상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화자를 오래전 일본군의 폭격에 죽은 자신의 아들로 생각해 음식을 차려주거나 술을 마시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급기야 화자가 현실에 절망해 자살을 시도하자 거금의 돈까지 주며 현실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소설에서 화자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홍콩의 기존 거주자들과 홍콩에 와서 달라진 이주자들을 바라보면서 자본주의화된 홍콩사회를 비판하지만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무협소설, 황색소설을 쓸 수밖에 없게 되고 술을 마시거나 싸구려 사랑을 사는 것으로 현실을 잊으려 하다가 급기야는 데톨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한다. 화자가 자살을 시도한 것은 통속소설에서 순문학 작품으로, 타향에서 고향으로, 홍콩에서 대륙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갈망이기도 하다.
『술꾼』에는 상당히 리얼한 내용과 묘사가 포함된다. 예를 들어 수시로 술 마실 핑계를 찾고, 술을 마시기 위해 돈을 꾸고, 거짓말을 하고, 허세를 부리고, 환각에 시달리고, 주정을 부리고, 폭력에 휘말리고, 술을 끊으려고 애쓰고, 금단현상에 시달리고, 다시 술을 마시는 등 술꾼의 갖가지 행동이 작품에서 잘 그려져 있다. 또 화자가 경험한 20세기 전반 중국의 사회적 격변, 특히 전쟁 중에 겪은 개인적인 체험이 아주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문학사적 가치는 중국권 최초로 ‘의식의 흐름’ 기법 시도라는 모더니즘적인 실험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해냈으며, 이를 통해 작중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는 화자의 사고 및 행동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낸 데 있다.
창비세계문학 38 『술꾼』
원제 酒徒∥류이창(劉以鬯) 지음∥김혜준 옮김∥창비∥2014년 10월 30일 발행
신국판 변형∥312면∥값 12,000원∥ISBN 978-89-364-6438-7 03820
‖ 책 속에서
한잔. 두잔. 석잔. 넉잔. 다섯잔.
나는 취했다. 머릿속에는 고체의 웃음뿐이다.(15면)
현실은 여전히 잔혹한 것이어서 나는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었다. 술이 나의 우울을 잊어버리게 할 수 있다면 몇잔 더 마신들 어떠랴. 이성은 절름발이다. 깊은 산의 짙은 구름 속에서 길을 잃어 어디로 갈지 모른다. 누군가는 봄날을 빌리지 못하여 감정의 호수 속으로 뛰어든다.(42면)
나는 모진 마음을 먹고 단호하게 문예와 관계를 끊어야 한다.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자신을 글 쓰는 기계로 간주해야 한다.
이건 그리 잘못된 것이 아니다. 최소한 나는 방세를 못 낼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고, 술을 못 살까봐 걱정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비록 더이상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인식할 도리가 없기는 하지만.
나는 기생충이 되었다.(198면)
홍콩인의 행복은 모두 종이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이로 만든 사랑을 진실하다고 여기고 싶어한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지, 사람들이 지옥이라고 부르는 곳에 어찌 이렇게도 웃음소리가 넘쳐나는지?(210면)
‖ 저자의 말 ―류이창
이 작품 『술꾼』은 이 고뇌의 시대 속에서 마음이 아주 온전하지만은 않은 어느 지식인이 어떻게 자기학대의 방식으로 생존을 계속 추구해가는지를 쓴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이 소설을 읽고서 불안을 느낀다면 그것은 당연히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다.
‖ 역자의 말 ―김혜준
『술꾼』은 중국권 문학에서 ‘의식의 흐름’ 기법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성공작으로, 홍콩과 타이완의 모더니즘 문학과, 1980년대 중국 대륙에서의 모더니즘 등장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술꾼』을 비롯한 류이창의 작품에는 홍콩의 지명, 거리 풍경, 음식점, 사회상, 뉴스 등이 수시로 등장하는데, 이처럼 홍콩의 도시적 면모를 이미지화하는 방식은 시시(西西), 예쓰(也斯) 등 많은 후배 작가뿐 아니라, 왕자웨이 같은 영화감독에게도 이어져 「화양연화」 「2046」등을 낳았다.
‖ 지은이 류이창(劉以鬯, 1918~ )
홍콩을 대표하는 작가. 1918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으며 1941년 상하이의 쎄인트존스 대학을 졸업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충칭으로 피난해 『국민공보』 문예면을 맡게 되면서 이후 줄곧 신문·잡지의 문예 편집에 종사한다. 고등학생 때인 1936년에 이미 단편소설을 발표한 바 있으며, 1945년부터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 상하이에서 출판사를 운영했으나 폐업 상태에 이르자 1948년 홍콩으로 건너가 여러 신문과 잡지의 문예면을 맡았다. 싱가포르에서 체류하던 시기(1952~57)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홍콩에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술꾼』(1963), 중단편소설집『절 안』(1977) 『1997』(1984), 장·단편소설집『교차』(2000), 문학평론집『돤무훙량론』(1977) 등이 있다. 특히『술꾼』은 ‘의식의 흐름’을 시도한 중국권 최초의 성공작으로, 인민문학출판사 등이 주관한 ‘100년 100종 우수 중국문학도서’,『아주주간』선정 ‘20세기 중문소설 베스트 100’, 홍콩 펜클럽 선정 ‘20세기 홍콩소설 베스트 100’ 등으로 꼽힌 바 있다.
‖ 옮긴이 김혜준
고려대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부산대 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중국 현대문학의 ‘민족 형식 논쟁’』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중국 현대산문론 1949∼1996』『중국의 여성주의 문학비평』『하늘가 바다끝』 『쿤룬 산에 달이 높거든』『사람을 찾습니다』(공역)『나의 도시』『뱀 선생』(공역)『포스트식민 음식과 사랑』(공역)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화인화문문학(華人華文文學) 연구를 위한 시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