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衍의 불의 노래, 이욱의 以淚洗面

김상돈의 酒馬看山(15)

 

王衍의 불의 노래, 이욱의 以淚洗面

 

술이 이루어내는 세계는 천태만상(千態萬象)이다. 천상의 영혼이 아름다운 선율로 세상을 노래하게 하는가 하면, 상스럽기 그지없는 악마의 얼굴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얼마나 마시느냐에 따라 갖가지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혹자는 주취(酒醉)의 정도를 단계별로 이름 짓는다. 각자의 주량(酒量)에 빗대어 급수를 정하기도 한다. 인간사에서 술은 뺄 수 없는 얘깃거리가 되었고 수많은 전설을 낳기도 했다. 이처럼 술이 신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온 이후 한 목소리로 받들어 찬미하면서도, 경계하며 두려워하는 시선 또한 거두지 않는다.

물과 불의 만남으로 비롯된 술이 그려내는 세사(世事)는 기기묘묘하다. 아니 기묘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인생살이도 그러하지만, 술이라는 물건이 거기에 더해 변화와 반전을 이끌고 있어 오묘함을 더해준다. 술로써 패망(敗亡)의 길을 걸은 이들의 불의 노래는 물의 노래만큼 드라마틱하다. 술 속의 불을 온전히 다스리지 못해 스스로를 태워버린 그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지금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술이 있는데 취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고 못난 짓”이라며 호기를 부린 이가 있다. 술고래를 자처하며 소시 적부터 술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唐)왕조가 무너지고 5대(五代)10국(十國)시대가 전개되었을 당시, 10국의 하나인 전촉(前蜀)의 후주 순정공(順正公) 왕연(王衍, 899~926)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전촉(前蜀) 초기에는 고조 왕건(王建)이 정사(政事)에 힘씀으로써 경제와 문화, 군사력이 크게 신장되어 강국으로 자리 잡는다. 918년 제위(帝位)를 막내아들 왕연이 계승하였으나, 부친 왕건의 치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오로지 연회(宴會)와 술독에 빠져 든다. 환관 송광사(宋光嗣)에게 조정 일을 모두 맡긴 채, 성도(成都) 주변의 군명산(郡名山)에서 술 마시고 시 짓는 일로 여념이 없었다. 낮밤 가리지 않고 주연(酒宴)에 몰두하니 국고가 비게 되고 국력이 쇠락해 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거기에다 여염의 여자를 취해 내궁(內宮)에 두고 음욕을 채우기도 한다. 밤에 몰래 술집이나 창가(娼家)를 찾아다니면서, 궁녀들과 함께 취해 연가(戀歌)를 부르고 음탕한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는데, 그 상스러움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사서(史書)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찬수한 사마광(司馬光)은 “이것이 촉주(蜀主)의 생활이자 유일한 즐거움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나라를 세우기는 지극히 어렵지만 망치게 하는 것은 쉬운 법이다. 왕연이 제위에 오른 지 불과 7년 만에 전촉(前蜀)은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 그가 술 속의 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니 사리분별조차 희미하다. 늘 취한 상태에서 충언(忠言)과 간언(奸言)을 가리지도 못한다. 가왕(嘉王) 왕종수(王宗壽)가 눈물을 흘리며 “계속 이렇게 가다가는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언을 하는데도, 유객(遊客) 간신배들이 “이 사람은 술에 취하면 울먹이며 헛소리한다”며 되레 핀잔을 주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왕연이 주색에서 헤어나지 못하자 후당(後唐)의 장종(庄宗) 이존욱(李存勖)이 공격을 하게 된다. 여기에 제대로 대항도 못하고 내부반란까지 겹쳐 전촉(前蜀)은 쉽사리 무너져 버린다. 당시 왕연은 흰 옷을 입고 머리에 새끼줄을 두른 채 맨발로 관을 메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쩌랴? 그와 수천 명의 일가족이 무참히 살해되는 것은 반복되는 역사의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5대10국 가운데 남당(南唐)의 마지막 군주인 후주(後主) 이욱(李煜, 937~978)도 같은 길을 걷는다. 그는 저명한 시인으로 시사(詩詞), 서화, 음악 등에는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정사(政事)가 무엇인지 가늠치도 못하고 늘 음주가무에 빠져 있었다. 송(宋)나라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이 천하통일을 꿈꾸며 소국들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마침내 남당(南唐)을 치게 된다. 장강(長江)에 부교(浮橋)를 띄워 쳐들어오는 급박한 상황이 빚어지고 있는데도 후주는 술에 취해 그 심각성을 깨치지 못했다. 도성 금릉성(金陵城)이 함락되자 궁 안에 장작을 쌓아 불을 지른 뒤, 뛰어들어 자살하려 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대신들을 데리고 나와 투항했다. 후주(後主) 이욱은 포로가 되어 3년 동안이나 눈물로 얼굴을 씻는(以淚洗面)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의 사(詞)이자 절명시(絶命詩) ‘우미인(虞美人)’에 그 비애(悲哀)와 회한(悔恨)이 절절이 박혀있다. “묻나니 그 시름 얼마나 되오? 마치 장강의 봄물이 동으로 흐르듯 하오”(問君能有幾多愁, 恰似一江春水向東流). 이렇듯 아픈 불후(不朽)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주색에 빠져 망국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복되는 불의 노래는 끊이질 않고, 되돌아 흐느끼는 어깨 너머로 다시금 흘러 이어진다.

 

글쓴이 김상돈 : 물과 불을 넘나들면서 명정(酩酊) 40년을 살았고, 언론계와 국회 당, 공기업 임원 등을 두루 거친 뒤 지금은 사단법인 4월회 사무총장과 KAIMA 전무이사로 있다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