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심과 술심이 주는 얘기를 그려보며
임재철 칼럼니스트
우수 경칩이 지나자 바람 끝에 칼날이 지워졌다. 먼 산은 먹빛으로 아른거린다. 동창을 열면 바람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따뜻한 봄이 우리들 가슴에도 오고 있다. 차지 않은 바깥 공기가 정겹다. 꽃이 피어나고 만물이 새로워지는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인지 얼기설기 세상의 얼음 같은 미움, 편견과 집착, 오욕이 모두 녹아 온 땅이 자유의 바다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항상 시간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변화시킨 것은 시간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시간 속에서 겪은 일들, 만난 사람들, 걸어온 길들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지나간 시간은 바람을 타고 모든 것을 희석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찾는 것 아닐까 싶다. 그렇게 달려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스토리가 있는 사람이 되면 더욱 좋을 거다.
어느 봄밤 이백(李白, 701~762)은 ‘月下獨酌’이라는 시를 남겼다. 달 아래 혼자 술을 마시지만 달이 떠 있고, 그달이 만들어주는 이백 자신의 그림자가 있어 시인은 외롭지 않고 봄날을 마음껏 즐긴다. 그렇듯 우리가 시인은 아니어도 새봄에 정취 있는 노래와 글 등 풍류를 즐기며, 마실 수 있는 매력적인 술을 만나다 보면 거침없는 세월이 쓰디쓸 지언정 달콤하지 않을까.
혹자는 예전에 젊었을 때는 말이 없었던 터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머릿속이 텅 비고, 표현을 하고 싶어도 그 표현을 못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술이 모티브가 되어 ‘이 대목에서 한잔’하며 현실적인 얘기와 일상의 스토리를 쏟아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술꾼의 몽롱한 주사일 수도 있지만, ‘삶과 술 신문’의 대표 칼럼 ‘취중진담’ 이란 말처럼 평소에 나누기 어려운 속마음을 술의 힘을 빌려 털어낸 것을 보여준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만남은 길에서도 많지만,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며,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데 술자리는 때때로 우리를 이야기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그 얘기는 결국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와 스스로를 소화하는 법을 배우게 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술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지만,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한 것이 술이기도 하다. 과해서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채근담에서 이르기를 “꽃은 반만 피었을 때 가장 아름답고, 술은 조금 취기가 오르려 할 때 참다운 멋이 있다.”고 했다. 조금 더 들어가 보면 “꽃이 활짝 핀 것처럼 술에 만취하면 결국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되니, 가득 찬 자리에 있는 사람은 마땅히 이를 생각해야 한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공자의 말씀과 같은 가르침이다.

필자 역시 애주가는 아니어서 몸 사리지 않고 마신 술 때문에 크고 작은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그런데도 술 마시는 일을 그만두지 않고 있다. 그것은 중국을 여행하며 중국 술의 넓고 깊은 인문학적 역사와 함께, 술잔을 앞에 놓고 중국 친구들의 몸에 배어 있는 예의와 명주에 녹아 있는 심오한 향과 맛, 그리고 애주문화 때문이라 하겠다. 아마 지금도 관성처럼 옆구리에 늘 중국 술동이를 끼고 사는 이유이리라.
이왕 바이주(白酒)가 나왔으니, 지난해 11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만찬주로 등장하며 주목받은 술이 중국 측에서 준비했던 ‘멍쯔란(夢之藍)’이었다. 이는 중국 장쑤(江蘇)성에서 생산되는 고급 바이주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즐겨 마시는 술로 알려진 브랜드다. 이름에서부터 ‘꿈속의 남색’ 즉, 술을 마시는 사람은 마땅히 꿈꾸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는 술인데, 최근 내국의 2030세대가 선호하는 주류가 됐다고 한다.

이렇듯 술은 다양한 문화적 행사와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술에는 시대적 애환과 풍류가 있다. 그래서 술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참 좋은 친구다. 아첨하는 관료보다, 시대 정신이 없는 권력보다 더 우월하고, 더 깨끗하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술이다. 그렇지만 혼자 창가에 앉아 월하독작 하는 그것보다는 좋은 동반자와 함께 멋과 맛이 어우러진 술자리가 금상첨화다.
오늘도 진한 중국 술 냄새와 귀인의 바가지가 그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