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唐詩)로 대륙 중국을 헤아려보자(2)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당시(唐詩)로 대륙 중국을 헤아려보자(2)

 

중국 개관

당시를 들여다보기 전에 시대적인 배경이 되는 중국과 당나라, 그리고 이백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실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중국의 개관은 뻔한 것 같지만 때론 놀랍기도 하고 경이로운 부분들이 많기 때문인데, 이 책이 중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문화 및 다양한 분야에 대한 동기 부여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중국 개관에 이어 당나라를, 그리고 이백에 대해 살펴보겠다.

세계 최대의 인구, 광대한 국토를 지닌 중국의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이다. 국토는 남북 5,500㎞, 동서로 우수리강과 헤이룽강의 합류점에서부터 파미르 고원까지 5,200㎞에 달한다. 북동쪽으로는 한반도와 러시아연방이,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아프가니스탄이,남서쪽으로는 인도·파키스탄·네팔·부탄, 남쪽으로는 미얀마·베트남·라오스, 북쪽으로는 몽골·러시아연방과 각각 국경을 이루고 있다. 행정구역은 간쑤·광둥·구이저우·랴오닝·산둥·산시(山西)·산시(陝西)·쓰촨·안후이·윈난·장시·장쑤·저장·지린·칭하이·푸젠·하이난·허난·허베이·헤이룽장·후난·후베이·타이완 등 23개 성과 광시장족·네이멍구·닝샤후이족·시짱(티베트)·신장웨이우얼 등 5개 자치구, 베이징·상하이·충칭·톈진 등 4개 직할시, 마카오·홍콩 등 2개 특별행정구로 이뤄져 있는데 실질적으로 타이완과는 국가적인 면에서 우호적이기도 때론 적대적이기도 하지만 크게 보면 한 울타리 안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문화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문화가 유일한 것으로 여기는 중화사상의 요체가 여기에 근거한다. 역사적으로 이들 중국은 주위의 민족을 오랑캐로 생각하여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으로 부르며 멸시 하였다. 이로 인해 체면을 존중하고 강한 자존의식을 갖춘 민족성이 생겼다고 추측된다. 또한 중국인들은 현실 또는 실속에 매우 발 빠른 민족으로 평가되는데 실제 이들 중국인들에게 모든 사물의 판단 준거는 현실적 유용성이다. 현대 문명에 들어선 중국의 개방 및 개혁의 과정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이익이 된다면 그들의 정체성인 사회주의 이념도 희생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중국의 민족은 최대 민족인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 인구의 92%를 차지하는 한족은 독자적 문화를 창조하며 한족 외의 민족을 동화시켜왔으나 소수민족은 지금까지도 민족 고유의 전통을 고수해오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중국은 공산혁명 이후에도 소수민족의 전통에 대한 보호책으로 자치구나 자치주를 설정해 각 민족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정책을 고수해왔는데, 이러한 정책은 또 한편으로는 이들 민족을 일정한 지역에 한정시킴으로써 한족의 지배권을 공고히 한다는 양자의 성격을 지녔다. 소수민족들은 지역적으로 일정한 분포 양상을 보이는데 대표적인 소수민족으로서는 좡족·만족·후이족·먀오족·위구르족·이족·투자족·몽골족 등이 있고 한민족인 조선족은 약 192만 명으로 14번째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소수민족의 2.6%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된다. 주로 둥베이 3성인 지린성·헤이룽장성·랴오닝성 등에 분포한다.

 

당나라 개관

618년 이연이 건국해 907년 애제 때 후량 주전충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해 통치됐다. 중국의 통일제국으로는 한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를 이뤄 당에서 발달한 문물 및 정비된 제도는 한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그 주변 민족이 정치·문화적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한국의 경우 삼국체제(고구려·백제·신라)가 붕괴되고 정치세력 판도가 크게 바뀌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중기 안녹산의 난 이후 이민족의 세력이 왕성해지고 국내 지배체제의 모순이 드러나 중앙집권체제의 동요는 물론 사회 및 경제적으로도 불안이 가중되어 쇠퇴의 길을 밟은 나라가 당나라다.

 

당의 문화

당대의 유학에서는 공영달이 태종의 명을 받아 고전에 관한 주석을 정리·종합해서『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였다. 역사에 있어서도『주서(周書)』,『북제서(北齊書)』,『양서(梁書)』,『진서(陳書)』,『수서(隋書)』,『진서(晉書)』및『남북사(南北史)』와 같은 전대(前代)의 왕조사가 편찬되었다. 중기에 이르러 유학의 독자성을 고양하고 여기에 불교 종파 중 선종의 학설을 도입한 한유·이고의 고문운동(古文運動)은 후대의 송학을 앞지르는 선구적인 사상을 내포한 것이었다.

당대의 문학은 귀족문학으로서 시·문 모두 현저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문학사에서는 초당(初唐:국초에서 예종까지 약 100년간)·성당(盛唐:현종~숙종 50년간)·중당(中唐:대종~문종 60년간)·만당(晩唐:문종~당나라 말 80년간)의 4기로 나누고 있다. 문장에 있어서는 중당기에 한유·유종원이 출현, 고문(古文)을 부흥하여 종전에 형식미만을 추구하였던 변려체를 배제하자는 고문운동이 일어났으며,『유선굴(遊仙窟)』,『회진기(會眞記)』,『이혼기(離魂記)』,『이왜전(李娃傳)』등 문어체 소설이 나타나 문장의 묘미를 보여주었다.

특히 관리를 임용하는 선거에서 시 짓기를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시는 공전절후(空前絶後) 의 성황을 이루어 5언 및 7언의 절구와 율시의 형식이 완성되어 성당기에 이백·두보의 2대 시성을 비롯하여 시화일치의 묘미를 보여준 왕유, 전원과 자연을 읊은 맹호연, 정로이별을 읊은 고적·왕창령 등이 나오고, 중당기에는 백거이·원진, 만당기에는 두목·이상은·온정균이 나왔다. 산문 분야에서는 수나라 때의 괴기전설을 원류로 하는 전기소설이 많이 나왔다.

음악분야에서는 한나라 이래의 아악(雅樂:궁중음악)·속악(俗樂:민간음악) 및 호악(胡樂:서역음악)이 정착되고 특히 호악이 번성하였으나 말기에 가서는 서역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호악도 쇠퇴하였다. 또한 음악 연주도 궁중에서 민간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있어 신속악조(新俗樂調)라고 하는 음악이 흥성하였다. 서화·조각 등의 미술에 있어서도 수나라의 전통을 이어 발전시켰으나, 중기 이후 크게 변모한 면도 있다.

종교에서는 특히 불교가 발전하여 수나라 이래의 천태종과 화엄종이 종래의 여러 교의를 집대성하고, 현장 법사는 인도에서 가지고 온 방대한 경전의 번역 사업을 일으켜 법상종을 확립하였으며, 당과 인도 사이에 승려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불교 교리의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천태·화엄·법상 외에 지론·섭론·구사·성실·삼론·진언·삼계 등 다수의 종파가 분립하여 황실과 귀족의 호응을 얻어 불교는 전성기를 맞았다. 이 밖에 정토교와 선종이 개종되어, 특히 선종은 말기에 다른 종파가 모두 쇠퇴된 뒤에도 홀로 번영하여 중국 불교로 완성되었고 송학에도 다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도교는 노자의 성(姓)이 황실과 같은 이씨(李氏)였던 관계로 황실의 호응을 크게 얻어 현종은『도덕경(道德經)』을 집집마다 비치하게 할 정도였다. 이 밖에 동서 간의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마니교, 아랍의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일파인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派) 등의 외래 종교도 들어와 이들의 사원이 여러 곳에 세워졌다.

 

당시

당나라 때는 중국 서정시의 최전성기였고 그 시는 중국문학뿐 아니라 인류의 문학에도 위대한 유산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당시의 원류를 이루는 것은 위·진 이후 귀족사회에서 발달되어 온 육조(六朝)의 시지만 그것이 이 시대에 원숙한 예술로서 결실을 보게 된 밑바닥에는 일어서기 시작한 상공업자·농민의 굳센 생활 및 결집력은 물론 이민족과의 접촉으로 인한 세계의 확대가 있었다.

육조의 시가 인간을 불안정한 것으로 보고 인생의 절망을 주로 노래한 데 대해 당나라의 시인들이 이 절망을 극복하고 적극적인 인생 태도를 시의 골격으로 삼은 것은 시대의 흐름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는 일반적으로 초당·성당·중당·만당의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초당의 대표적 시인으로는 사걸로 불린 왕발·양형·노조린·낙빈왕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시는 외형의 미를 다루는 남조시풍(南朝詩風)의 계승 면이 강하고 시의 운율을 다듬어 근체시의 시형을 완성시켜 다음 대의 성운(盛運)에 앞장선 공적이 매우 크다.

성당, 즉 시문학이 융성한 때는 현종의 치세에 해당되며 당의 국력이 최고에 달한 시기였는데 이 시기는 대시인이 속출한 문학의 최성기이다. 대표적 시인으로서는 이 시기 전반에 활약한 이백과 후반에 활약한 두보를 들 수 있다.

이백은 이 시기 전반의 화려한 세태를 반영해 낙천적이고 호방한 기풍을 노래하는 시를 특색으로 하고 초당의 진자앙의 주장을 이어받아 한위문학(韓魏文學)의 기골을 부흥시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아왔다.

또 두보는 전란에 휩쓸린 후반의 어두운 세태를 반영하여 날카로운 우수의 노래를 특색으로 했으며 장편의 고시(古詩)에서는 민중을 대신하여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항의의 노래를 지었고 율시에서는 세밀한 감정을 정밀한 시의 틀 안에 주입시켜 이 시 형식의 실질적인 완성자가 됐다. 그 밖에도 이름난 시인으로 맹호연·왕유·고적·잠삼·왕창령·왕지환 등을 들 수 있다.

중당의 시인으로는 한유와 백거이를 들 수 있다. 한유는 기험·호방하다는 장대한 미를 사랑했고, 백거이는 평이하고 찬찬한 표현으로「장한가(長恨歌)」,「비파행(琵琶行)」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신악부(新樂府)라고 하는 사회시를 창시해 당대를 통해 최다수의 독자를 얻었다. 이 외에 유종원·이하가 있다.

만당을 대표하는 시인으로는 이상은·두목·온정균을 들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 시기의 시는 감상적·퇴폐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당나라의 모든 시인들의 전 작품을 수록한 것은 청나라 때 강희제의 칙명으로 편찬된『전당시(全唐詩)』(900권)인데 거기에는 대강 2,200명의 시 48,000여 수가 실려있다.

<다음호 계속>

 

차동영의 학력및 경력:▴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중어중문학과▴서강대학교 대학원 중국어과▴삼성 배우기 최고가상품 개발▴DMZ종주상품 및 태권도방한관광상품 개발▴CITM(중국국제여유대전)한국관 최우수관 선정 및 수상

*편집자주:본지는 저자의 양해를 받아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중에서 술과 직접 관련이 있는 대표시를 연제한다. 삽화및 관련 사진은 청어사가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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