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唐詩)로 대륙 중국을 헤아려보자(3)

당시(唐詩)로 대륙 중국을 헤아려보자(3)

 

중국 李白 詩 해설집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이태백

이미 성인이 된, 혹은 현재 학창생활을 하는 젊은이들의 대부분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때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인 정도로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을 이태백. 이 책을 통해서 중국 당나라의 유명 시인이라는 것만 알아도 사실 이미 충분히 좋은 정보를 얻었다고 할 수도 있을 그를 언급해보고자 한다.

자는 태백(太白)이며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인 이태백. 두보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의 대표 시인인 이태백은 시선(詩仙)이라 불리기도 한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하지만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현재까지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 성 룽시현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의 호상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 성인 촉나라의 장밍현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이태백은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장강을 따라서 장난·산둥·산시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는데 이태백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했다. 안릉·남릉·동로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지만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던 것으로 기록된다. 맹호연·원단구·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했으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방대하기만 하다.

이백 즉 이태백은 당시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자신의 정치적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바랐다. 그가 43세 되던 해인 742년 현종의 부름을 받아 장안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이라는 관직을 하사받았다. 도사 오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했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만 지어 올렸다. 그의「청평조사(淸平調詞)」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과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 평한 하지장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역사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장안을 떠나게 됐다. 장안을 떠난 그는 허난으로 향해 뤄양·카이펑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허베이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해 광릉·금릉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가고 그의 황자 영왕 인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됐으나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과 대립해 싸움에 패하게 되고 이로 인해 이백도 심양의 옥중에 갇혔다. 뒤이어 야랑으로 유배됐으나 도중에서 곽자의에 의해 구명, 사면됐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쉬안청 사이를 방랑했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의 친척 이양빙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곳에서 병사했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해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쓰촨 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하기도 했으며 민산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해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했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반해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했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까지도 그것을 혼돈화해 그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했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 수단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해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구하는 데 반해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이다. 두보의 오언율시에 대해 이백은 악부 칠언절구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 이백은 인간·시대·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와 자부에 불탔다. 하지만 동시에 전제와 독재 아래 부패하고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항하며 ‘만고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나라 대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나라 대 소사빈의『분류보주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나라 대 왕기의『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등이 있다.

이처럼 위대한 시인으로 표상되는 이태백의 시 몇 구 정도는 이해하는 것을 권한다. 대중들이 깊이 있게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쉽게나마 이해하고 풀이할 수 있다면 삶의 해법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생의 기본과 정도(正道)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호 계속>

 

차동영의 학력및 경력:▴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중어중문학과▴서강대학교 대학원 중국어과▴삼성 배우기 최고가상품 개발▴DMZ종주상품 및 태권도방한관광상품 개발▴CITM(중국국제여유대전)한국관 최우수관 선정 및 수상

*편집자 주:본지는 저자의 양해를 받아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중에서 술과 직접 관련이 있는 대표시를 연제한다. 삽화및 관련 사진은 청어사가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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