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杜甫)의 술 노래〈손님 오시다〉

박정근 칼럼

두보(杜甫)의 술 노래〈손님 오시다〉

박정근 (대진대 교수, 윌더니스 문학 주간, 소설가, 시인)

 

두보(杜甫:712-770)는 이백과 더불어 중국의 최고의 시인이다. 그는 천부적인 시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낮은 관직에 머물러 관복을 누리지 못하였다.

이백이 자유분방한 낭만성에 보여주는 것에 반해서 전쟁과 난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어려운 삶을 그리는 사실주의적 시각으로 세상을 노래했다.

그는 당시 사회모순을 인식하고 민중들의 고난을 안타까워하는〈시경(詩經)〉의 풍유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풍유정신의 전통은 중국 시의 주류가 되었고 백거이와 원진이 두보의 시풍을 존중하여 따르고 있다.

두보의 문학사적 의미는 안사의 난 이후의 현실주의적 시풍을 열었다는 것이며 북송의 왕안석, 소식, 황정견에게 최고 반열의 민중시인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평가의 배경은 여러 차례 고통스러운 유랑생활을 하였지만 시기에 따라 시풍의 변화를 가져오는 문학적 노력을 했다는 점이다. 그의 치열한 작업은 엄격한 정신을 가지고 세상사와 인간적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로 드러났다.

두보가 술과 함께 하는 인간의 삶에 대해서 잔잔한 감정으로 노래하는 시는〈손님 오시다〉이다. 두보는 이 시에서 이백의〈장진주〉처럼 대단히 호탕하거나 낭만적이지 않다.

친구를 불러서 주지육림(酒池肉林)하는 탐미적인 분위기가 아니다. ‘안사의 난’ 등 끊임없는 전쟁으로 피폐한 삶을 피할 수 없었던 가난한 민중으로 수 없이 유랑의 길을 떠도는 신세였던 두보였다.

꽃이 피는 봄이 왔지만 사회적인 상황은 삭막한 느낌을 주고 있다. 천지가 봄물이 올라오면 파릇파릇 싹이 돋아나 생기가 돌아 겨울 동안 깔려있던 죽음의 이미지들을 떨쳐버릴 시기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마을에서 이웃들이 서로 오가며 새봄을 맞이하며 즐거움을 나누는 모습을 묘사하지 않는다. 어떤 손님도 찾지 않는 쓸쓸함을 이겨내기 위해서 하늘만 바라본다.

두보는 쓸쓸한 봄의 정취를 “집의 남북의 온 천지가 다 봄물인데(舍南舍北皆春水)/날마다 보이는 건 기러기 떼뿐이구나(但見群鷗日日來)”라고 일행과 이행에서 노래한다.

시인은 분명 겨우내 단절된 채 갇혀있었지만 봄이 되었으니 생명감을 느끼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봄이 왔지만 봄은 정녕 오지 않았다(春來不似春)는 동방규의 시귀와 매우 유사하다. 흉노족과 화친을 맺기 위하여 끌려간 왕소군은 호얀야가 죽은 후 장안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녀의 미모에 반한 아들 복주루가 황후로 삼아버린다. 봄이 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왕소군에게 흉노의 땅은 춥기만 했으리라.

성도의 초야에 묻혀 살던 두보는 번잡한 도회를 떠나있어 쓸쓸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두보의 시심은 왕소군의 비극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두보는 왕소군의 소외감이 아닌 장자의 무자기와 초탈의 시심에 잠겨있다. 다만 시인은 봄의 정취를 함께 공유하며 즐길만한 친구가 없으니 더욱 적적하고 시야에 보이는 것은 하늘을 나는 기러기 떼일 뿐이다.

하지만 도회의 번잡한 상황에 놓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적한 초야에서 즐길 수 있는 무위자연을 추구한다. 그는 결코 돈이나 권력을 취하려 안달을 하는 도회생활과 대조적인 초당의 생활이 마음에 드는 것이다.

두보는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인위적으로 집에 손님이 찾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가 손님을 만나는 행위는 극히 무위에 가깝다. 시골의 초당에서 자연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 그에게 하등의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만약에 그가 누군가에게 의도적으로 호의를 베풀기 위해 초대한다면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야 한다.

집안을 정리하고 그가 좋은 인상을 주려고 낙엽이나 꽃잎이 떨어진 마당을 정돈해야 한다. 하지만 두보는 “꽃길은 지금껏 손님 오신다고 쓸어보지 않았소(花徑不曾緣客掃)”라고 노래하면서 그런 인위적 예의의 무의미성을 전하고 있다.

그렇다고 두보가 이웃과 담을 쌓고 살겠다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불쑥 찾아와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사립문을 살짝 열어놓는다. 아마도 오랫동안 칩거했다가 오늘 처음으로 사립문을 조금 밀어놓았으리라. 시인은 “사립문도 오늘 처음 열었다오(蓬門今始爲君開)”라고 고백한다. 누군가 초당에 들른다면 들어와도 좋다는 아주 소극적이고 작은 의사표시인 것이다.

만약에 손님이 온다하더라고 이백처럼 온갖 재산을 털어 고기와 술을 즐기겠다는 이백의 입장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초당은 도회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 음식거리를 충분하게 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식사는 매우 빈약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반찬은 시장이 멀어 맛있는 것 전혀 없어요(盤飧市遠無兼味)”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두보의 삶이 매우 빈곤한 상황이었다는 전기적 기록들이 그의 시의 분위기를 입증하고 있다. 다만 그의 주선적 자세를 묘사하는 시귀는 “독에 가득한 술도 막걸리지요(樽酒家貧只舊醅)”이다. 그가 즐기는 술은 민중들이 마시는 흔한 막걸리에 불과한 것이다. 손님이 온다한들 그보다 좋은 술을 내놓을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남루한 환경이라도 술을 마시기를 원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초대하고 싶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두보 시인의 술 상대는 그저 초당에 묻혀 사는 시인과 이웃하고 있는 노인이다.

이웃이라면 허물없이 초당에 와서 함께 한 동이의 막걸리를 마시고 싶은 시인은 과연 주선이다. 이백과 다른 점이라면 술을 화려하고 오부지게 마시려는 낭만성이 주조를 이루지 않는다.

시인이 “그래도 이웃 노인과 같이 마시고 싶으면(肯與鄰翁相對飮)/울타리 너머로 불러 남은 술잔 다 비우리라.(隔籬呼取盡餘杯!)”라고 마지막 두 행을 노래하는데 어조는 매우 담담하다. 어쩌면 이웃과 술을 마시는 것은 특별하게 축제적 의미를 가지지 않은 일상적 행위에 불과할 수 있다. 그저 적적한 분위기를 이기기 위해서 동병상련의 이웃끼리 술을 나누며 삶의 애환을 달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랄까.

할 일이 없어 흘러가는 낚시를 던지는 시인은 물고기보다 세월을 낚는 것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두보 시인이 이웃과 술을 마시는 것도 흥을 돋우려는 열정이 아니라 세월의 강물을 따라 가려는 마음의 행위라고 본다. 무위자연을 실천하는 장자주의자로서 두보는 함께 자연에 묻혀 사는 이웃과 작은 마음을 주고받고자 한적하게 술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박정근 (대진대 교수, 윌더니스 문학 주간, 소설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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