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천만칸 집을 지을꼬(5)

차동영의 唐詩 시리즈 ⑤ 詩聖 杜甫

언제나 천만칸 집을 지을꼬(5)

 

두보 시 33수
있는 자여! 없는 자에게 베풀 순 없을까
한자의 기원

한족은 그 민족의 역사가 오래인 만큼 그들의 문자생활도 매우 일찍부터 열려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양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한자가 지금의 모양으로 발달하기까지는 오랜 시일과 점진적인 몇 단계의 변천을 거쳤다.

다른 여러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한족도 아득한 옛날의 어느 단계에는 먼저 결승(結繩:새끼의 매듭 모양과 수로 의사를 소통하고 사물을 기억하기 위한 도구)을 사용한 듯하고, 이어서 서계(書契:글자로 사물을 표시하는 부호)·회화(繪畫) 등으로 발전되고, 거기서 다시 문자로 발전하여 정착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전하는 기록과 한자의 글자 모양 등에 남아 있는 흔적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한자를 처음 만든 사람에 대하여는 문헌상으로 대개 다섯 가지 설이 전하여 온다. 복희(伏羲), 주양(朱襄), 창힐(倉頡), 저송(沮誦)·창힐, 범(梵)·겁로(怯廬)·창힐 등이 그것이다.

이들 가운데에서 창힐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창힐에 대하여도 다시 세 가지의 설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는 창힐을 상고의 제왕(帝王)으로 보는 견해, 둘째는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으로 보는 견해, 셋째는 시대의 의인화(擬人化)로 보는 견해인데, 이 중에서 황제의 사관으로 보는 둘째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리하여 일반 사람들은 대개 한자를 만든 사람은 황제의 사관 창힐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한자와 같은 표의문자는 표음문자와는 달리 그 글자 수가 너무 많아서 한두 사람이 단시일에 만들어 낼 수는 없었을 것이고, 창힐은 다만 초기 단계의 글자들을 크게 정리하였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와 같은 설의 한 근거로는 갑골문(甲骨文)의 많은 이체(異體)를 들고 있는데, 갑문(甲文)에 쓰인 ‘人’ 자의 이체는 78종이나 된다고 한다. 한자의 발생 기원이 오래인 것만은 사실이나, 그 시기를 정확히 밝혀내기는 어렵다.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랜 한자는 허난성(河南省) 샤오툰촌(小屯村)의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갑골문자이다.

이 갑골문자는 이미 회화와는 거리가 멀고, 조자방법(造字方法)에서도 육서(六書)를 갖추고 있어서, 문자로서의 갖추어야 할 조건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한자의 발생 기원은 은대(殷代) 보다도 더욱 오랜 옛날에 있었다 할 것이다.

은나라 때의 갑골문이 주나라 때에 이르면 그 자체(字體)가 일변하여 대전(大篆) 혹은 주문(籒文)이라 부르게 되는데, 주나라 선왕宣王의 태사(太史) 사주(史籒)가 만들었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각국에 서로 다른 자체가 쓰이다가 진(秦)나라 시황(始皇) 때에 승상 이사(李斯)가 대전을 정리하여 문자의 통일을 이루어내니 이것을 소전(小篆)이라 하고, 또 옥리(獄吏) 정막(程邈)이 실무에 편리한 자체로 고치니 이것이 예서(隷書)라는 것이다.

한나라 때는 예서가 통행문자로 되니, 이를 금문(今文)이라 하고, 선진(先秦)의 죽간(竹簡)에 쓰인 과두문자(蝌蚪文字)와 종정(鐘鼎)에 쓰인 금석문자(金石文字)를 고문(古文)이라 총칭하게 되었다.

후한의 왕차중(王次仲)은 한예(漢隷)를 다시 개량하여 해서(楷書)를 만드니, 그 뒤 이것이 정체(正體)라 불리고, 표준자체가 된 것이다.

삼국 이후에는 필사에 편리한 초서(草書)·행서(行書) 등이 생기고, 육조(六朝)·당나라 때는 서도(書道)가 크게 행하여졌다. 한자의 자체와 서체(書體)가 이에 두루 갖추어지게 되었다.

2장
아 젊은 날이여

四 首

江南逢李龜年

강남에서 이귀년을 만나며 “또 만났구려”

岐王宅裏尋常見, 崔九堂前幾度聞。

正是江南好風景, 落花時節又逢君。

기왕 댁에서 얼마나 자주 뵈었고

최구 집에서 몇 번이나 들었던고

지금 강남은 마침 좋은 경치인데,

낙화하는 시절에 그대를 또 보는구려.

◇ 배경

770년 대력(大歷) 5년 늦봄에 장안에서 유명한 악공이었던 이귀년(李龜年)을 40년이 지난 오랜 세월 후에 다시 만나게 되자 현재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그 느낌을 써 기증한 시이다.

◇ 어휘

李龜年(이귀년) 당 현종 때의 명창. 궁중악장.

岐王(기황) 당 현종의 동생.

尋常(심상) 예사롭다. 일반적이다.

崔九(최구) 당 현종 때 비서감을 지냄.

堂前(당전) 대청마루 앞.

幾度(기도) 몇 번. 종종.

正是(정시) 마침 ~이다.

◇ 해설

이귀년은 당나라 현종 때의 유명한 명창이다. 현종의 동생 기왕(岐王) 이범(李范)이 천하의 명창과 시인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 이귀년과 두보가 자주 불려가 자신의 재주를 떨쳤다. 또한 당대의 풍류객인 최 씨 집안의 아홉째인 최척(崔涤)도 명창과 시인을 초청해 주연을 베풀기를 좋아했는데 그 집에서도 이귀년의 노래를 자주 들었다. 그러던 두 사람이 안록산의 난으로 피난 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강남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반갑고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늙고 병들은 처량한 시절에 한 사람은 거리의 악사로 또 한 사람은 유랑 걸식 시인으로서….

한때는 문학과 예술이 꽃피웠던 성당(盛唐)의 태평시대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두 인물이… 더군다나 그것도 잔인하리만치 화창하고 아름다운 봄날에… 주마등같이 스쳐 가는 지난 사십여 년에 대한 사연과 감회, 회한들….

하고 싶은 말 얼마나 많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받치는 감정을 절제하며 모든 감회를 담아 내뱉는 한마디 말 “또 만났구려!” 그리고 헤어지면서 하는 말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낙화시절(落花时節)은 꽃이 떨어지는 시기로 초라한 인생의 말년을 비유하고 있다. 참으로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 이 시는 두보의 절구(絶句) 가운데 가장 함축미가 뛰어나며 정감이 넘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시를 지은 해에 바로 두보는 59세를 일기로 피난 중에 먼 타향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게 된다.

◇명구

正是江南好風景, 落花時節又逢君。

차동영의 학력및 경력:▴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중어중문학과▴서강대학교 대학원 중국어과▴삼성 배우기 최고가상품 개발▴DMZ종주상품 및 태권도방한관광상품 개발▴CITM(중국국제여유대전)한국관 최우수관 선정 및 수상

*편집자주:본지는 저자의 양해를 받아 ‘언제나 천만칸 집을 지을꼬?’ 중에서 술과 직접 관련이 있는 대표시를 연제한다. 삽화및 관련 사진은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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