音酒동행
그날이 오면
문 경 훈 교사(지혜학교)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가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품고 있기 때문이라면, 12월이 아름다운 이유는 크리스마스가 있기 때문이다. 머리맡 선물을 기대하며 꾹 삼켰던 어린 시절 내 눈물방울들, 가사도 모른 채 마냥 신나서 흥얼거리던 이국의 캐럴들, 형형색색으로 꾸며진 트리와 포근한 전구의 불빛들, 흰 눈과 그처럼 하얗고 달콤했던 생크림 케이크. 이러한 것들이 12월이 다가올수록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다.
‘음주동행(音酒同行)’이라는 칼럼을 쓰는 입장에서도 12월엔 캐럴과 어울리는 수많은 술이 있으니 호기(好期)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얼마 전 현대사 속 영욕의 두 인물이 연달아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올해는 ‘아침이슬’이라는 민중의 상징 같은 곡이 세상에 나온 지 꼭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세상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침이슬 50주년을 기렸고 또 기리려 하고 있다.

아침이슬 50주년과 두 인물의 죽음, 이따금 찾아오는 이 운명의 얄궂음이 단조로운 삶에 재미를 던져준다. 어떻게 하면 이 12월을 나만의 방식으로 기릴 수 있을까. 역사 선생이라는 본업으로 잠시 돌아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지난한 얘기는 굳이 꺼내지 않으려 한다. 대신 노래들을 소개하고 싶다. 그들이 영욕의 사다리를 오르내릴 때 가장 낮은 곳, 민초들 사이에서 울려 퍼진 노래들이다. 어쩌면 그들이 가장 귀 기울여 들었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을, 그 노래들을 소개함으로 2021년의 마지막을 기리겠다.
대한민국 민중가요의 역사를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그룹이 바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하 노찾사)’이다. 1983년 서울 시내에 민중가요 노래패들이 모여 결성한 그룹으로 그 김민기가 1집 앨범을 기획하고 제작하였으며, 김광석, 안치환, 권진원 등 인기 가수들이 몸담았던, 그야말로 전설적인 그룹이다.
2집은 대중적으로도 상당한 히트를 기록했는데 2002년 힙합가수 MC스나이퍼가 새롭게 부르기도 했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 앨범에도 삽입되었던 ‘광야에서’, 2001년 혼성그룹 거북이가 리메이크하여 재 인기를 끌었던 ‘사계’, 이한열 열사의 추모 곡이었던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몇 해 전 개봉했던 영화 1987의 엔딩 곡이었으며 본래 전태일 열사의 추모 곡이었던 ‘그날이 오면’, 광주민중항쟁을 주제로 한 ‘오월의 노래’ 그리고 제주 4·3사건을 주제로 한 ‘잠들지 않는 남도’ 등 오늘날도 불리는 유명 곡들이 모두 2집 수록곡이었다.

지금까지 멤버가 변하긴 했지만 노찾사는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올해 김민기 트리뷰트 앨범에 수록된 ‘야근(공장의 불빛 中)’을 부르기도 하였다.
2016년 촛불을 들고 뛰쳐나간 광화문 거리에서 피 맺히듯 절규하는 목소리로 노래를 하던 가수가 있었다. 애타게 자유를 부르짖던 그 가수의 이름은 안치환이었다. 그는 노찾사의 일원이었며 지금까지도 민중가수로 소개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민중가수라고만 한정 짓기엔 폭이 넓은 가수다. 영화 ‘오아시스’에서 문소리가 불렀던 ‘내가 만일’ 같은 곡은 사랑을 주제로 한 아름다운 발라드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지금도 노래자랑 때마다 종종 불리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역시 안치환의 대표곡으로 유명하다.
이제는 제법 알려진 ‘죽창가’도 명곡이다. 동학농민운동을 배경으로 한 2019년의 드라마 ‘녹두꽃’의 주제가였던 죽창가는 원래 김남주의 시에 김경주가 곡을 붙인 노래다. 노찾사의 문진오가 처음으로 불렀고 지금은 안치환의 목소리로 더 유명해졌다. 제주 4·3사건을 추모하기 위한 ‘잠들지 않는 남도’는 안치환이 가사와 곡을 모두 썼으며 노찾사의 앨범에도, 안치환의 솔로 앨범에도 수록되었다.
마찬가지로 김광석도 불렀던,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인 ‘타는 목마름으로’도 안치환의 목소리로 자주 들을 수 있다. 이 외에도 김남주의 시에 곡을 붙인 ‘저 창살에 햇살이’와 ‘돌멩이 하나’, 류시화의 시에 곡을 붙인 ‘소금인형’, 나희덕의 시에 곡을 붙인 ‘귀뚜라미’, 그리고 ‘당당하게’ 등이 필청트랙이다.
안치환은 이처럼 민중가요와 대중가요의 노래를 넘나들면서도 언제나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리고 그의 노래는 현재 진행형이다. 터질 듯 절규하는 음성을 듣고 있노라면 언뜻 실력 있는 웅변가의 호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덕에 때론 공감하고 또 때론 공분하며 빠져들게 된다. 거리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얻었던 힘과 용기를 잊을 수 없다. 만일 다시 한 번 거리로 나가게 된다면, 그럴 날이 온다면 그때도 그는 우리와 함께 하지 않을까.
집회나 시위를 제법 나가보았거나 혹은 광화문 앞을 우연히 걸어갈 때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을 수 있는 노래들이 있다. 다름 아니라 20대 시절 의경으로 군 복무를 마친 필자의 친구는 그때 하도 많이 들었다며 ‘아~민주노조 우리의 사랑’ 이 구절은 지금도 완벽하게 따라 부른다.
조금 더 전투적(?)이고 확고한 메시지를 담은 이 노동·민가들은 누가 불렀을까. 1988년 결성된 노래패 ‘꽃다지’가 그 주인공이다. 노동자의 날(5월 1일) 집회현장에서, 그리고 노동자들이 모인 곳에 항상 울려 퍼지던 ‘철의 노동자’(위 가사가 이 노래의 일부이다)나 응답하라 1988에서 성보라가 불렀던 ‘동지가’, 90년-2000년 초 대학생 율패들의 단골 넘버였던 ‘바위처럼’,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배웠던 ‘서울에서 평양까지’ 등이 제목은 모르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곡들이다.
그 외에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민중의 노래’를 비롯하여 ‘단결투쟁가’, ‘파업가’, ‘가자 노동해방’ 등도 이쪽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바로 ‘아 이 노래’라고 할 것이다.
위의 노래들을 좋아하고 부르고 싶더라도 사실 부를 기회가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꽃다지 출신의 김성민이 중심이 되어 뭉친 천지인의 ‘청계천 8가’는 노래방 기기에도 등록돼있는 기념비적인 명곡이다. 천지인은 1993년 결성된 민중 Rock 밴드로 민중가요를 대중음악의 화법으로 풀어내고 있으며 이후 민중가요 밴드에 많은 영향을 끼친 그룹이다. 그들의 대표곡 중 ‘청계천 8가’는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서정적인 록발라드 형식을 띠고 있는데다 애틋하면서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노랫말을 사용하여 여러모로 듣기 좋은 곡이다.

출처는 한경닷컴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 민주화가 제법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오늘날에도 민가들이 불려지고, 또 새로 발표되고 있다. 물론 인기는 예전 같지 않지만 그래도 2016년 촛불집회 당시 널리 불렸던 윤민석 작사·작곡의 ‘헌법 제1조’나 노랫말이 조금 많이 격정적이지만 취향만 맞는다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역시 윤민석의 작품 ‘격문 1’ 등이 그나마 유명하다 할 만하다. 그리고 정태춘, 민중가요와 대중가요의 사잇길 어딘가에 기념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거장 정태춘을 빼놓을 수 없지만, 그의 서사와 노래들은 또 너무나 방대하기에 다음 기회에 소개하려한다.
이 글을 탈고하고 있는 지금이 12월 11일이다. 내일이면 12월 12월이니 여러모로 마음이 묘하다. 역사의 평가는 차치하고, 산 자들의 노래는 또 어떻게 불릴 것인가. 각자가 꿈꿀 그 날을 생각하며 이 글을 마친다.

◇ 필자 문경훈
▴1990년 출생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졸업▴한국전통주연구소 가양주반 수료
▴한국가양주연구소 전통주소믈리에 자격 취득 ▴한국가양주연구소 명인반 수료▴(현) 지혜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