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명의 주당천리
수제 맥 주제조장, 부산 아키투를 찾아서
수제 맥주 바람이 분다. 2015년 3월초 매화 향 날리는 봄바람 속에 그 바람도 실려 온다. 전라도에 갔더니 중국 수출을 겨냥해 홍삼맥주를 만들었던 고창의 주식회사 드림카운티에서 이제 막 국내 시판을 시작했다. 고추장 마을 순창에서는 장앤크래프트 브루어리가 100억 원 가까이를 투자하여 맥주 생산에 돌입했다고 한다. 경상도로 넘어갔더니 울산의 트래비 하우스 맥주집에서도 땅을 마련하고 수제 맥주 제조 장비도 해외에 주문해놓은 상태였다. 부산으로 내려갔더니 광안리 바닷가에 갈매기 브루잉이라는 새로운 맥주 제조장를 겸한 맥주바가 있었다. 한국 여성과 혼인한 미국인 스테판 털콧이 운영하는 가게였다. 갈매기 브루잉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기장군에 새로 생긴 소형 맥주 제조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친 김에 그곳까지 가보았다.
아키투(Akitu)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서길 84-2 번지에 있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고 가니, 기장읍 못 미쳐서 반송로 큰 길에서 산비탈을 내려가니 만화리 마을이 나왔다. 신라시대 무덤이 전해오는 만화리 마을의 양지바른 곳에 아키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양조장은 천정 높은 철근 판넬로 지어진, 공간 활용도를 높인 구조물이었다. 양조장 안으로 들어서니 왼편으로는 시음장이 있고, 오른편에 배달 나갈 20리터짜리 맥주 통이 쌓여있었다. 시음장 옆에는 원료를 보관하는 저온 창고가 있었고, 제조장은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키투 대표는 김판열씨다. 그는 우리 양조 사에서는 갖지 못했던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부산의 맥주 만들기 동호회 활동을 10년 넘게 하면서 맥주를 취미삼아 만들다가 과감하게 맥주 만드는 일에 뛰어든 것이다. 지금까지 맥주 사업은 권력이나 자본의 기획으로 창업되었지, 취미가 창업까지 이어진 경우는 드물었다. 사실 우리는 개인의 열망으로 맥주 제조장을 내기란 불가능했던 시절을 지내왔다. 아키투처럼 맥주를 취미삼아 즐겼던 이가 상품의 세계로 성큼 들어와버린 경우로, 서울의 안암동에 창업한 히든트랙이 있을 뿐이다. 히든트랙 역시 네이버 카페의 맥주 만들기 동호회 활동을 한 이들이다.
아키투, 그 이름이 낯설어 김판열 대표에게 물어보았다. 아키투는 인류 문명사에서 맥주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을 남긴 수메르인들이 즐긴 신년 축제의 이름이란다. 당시는 춘분을 새해의 시작으로 잡아서 축제를 했는데, 이 때 맥주를 빚어 즐겼다고 한다.
양조장 안을 김판열 대표의 안내로 둘러보았다. 맥주를 빚으려면 보리를 싹틔운 맥아가 있어야 하고, 향기로운 홉이 있어야 하고, 발효 미생물인 효모가 있어야 하고, 물이 있어야 한다. 9할이 물이니, 물이 가장 중요한 재료다. 맥주가 아무리 수입 농산물로 빚는다고 한들, 태어난 땅을 무시할 없는 것은 바로 이 물 때문이다.
아키투에서 사용하는 보리와 홉과 효모는 모두 수입품이었다. 한국 땅에서 맥주를 빚는 현실이 그렇다. 대량 생산해야 하는 맥주 산업만 오래도록 존재하다보니, 차별화된 국산화의 작업은 움트지 못했다. 오로지 원가 절감하면서 균일한 맛을 내야 한다는 핑계로 외국 가공 농산물을 써왔다. 물론 중간에 대관령 지역에서 홉 농사도 지어보았고, 남부 지방에서 맥주보리인 두줄보리 농사도 짓게 하여 맥주 회사에 보리를 배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속되지는 못했다.
아키투의 장비는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장비 산업, 원료 산업, 유통 산업 등 맥주의 모든 영역은 국제화되어 있다. 세계 1위 매출을 기록하던 미국의 안호이저부시 회사가 세계은행 자본을 등에 업은 후발업체 인베브에 합병되는 당혹스런 일이 벌어지는 곳이 맥주판이다. 물론 한국 1위였던 맥주 회사도 인베브로 넘어갔다.
이렇게 큰 자본의 싸움 속에 취미로 맥주를 만들었던 김판열 씨가 뛰어들었으니, 태평양으로 이어진 부산 앞바다에 수영복만 입고 뛰어든 형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은, 지금의 수제 맥주 바람의 정신 속에 담겨있다.
맥아를 당화시키는 당화솥, 맥주를 발효하고 저장시키는 통, 발효통을 씻는 장비, 실험 제조를 할 수 있는 발효통, 그리고 맥주를 외부에 배달할 수 있는 20리터 크기의 통들이 제조장 안에 있었다. 이쯤이면 직원을 한두 명만 데리고도 대표가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술을 빚을 수 있어 보였다.
시음장에서 김판열씨가 직접 빚은 맥주를 맛보았다. 수도꼭지처럼 생긴 금속관에서 거품과 함께 따라낸 시원한 맥주를 맛보았다. 맥주의 큰 장점은 시원하고, 가볍고, 거품을 즐긴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키투의 맥주는 조금 달랐다. 맥주가 시원하고 거품도 즐길만한데, 가볍지는 않았다. 자기 색깔을 가지고 있고, 입안에 오래 남는 향과 맛을 지니고 있었다. 그저 가볍게 넘겨버리는 청량음료가 아니었다.
처음 맛본 오륙도부터 그랬다. 맥주 이름이 오륙도라니! 김대표는 태종대에서 바라보는 오륙도 앞바다의 시원한 풍경을 그리며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황금빛 밝은 색을 띠고 있는데, 한 모금 맛보니, 허브향이 짙게 감돌면서 탄산이 잘게 부서졌다. 말린 귤껍질에서 나는 신맛과 삭힌 과일 맛이 났다. 이 맛의 계보는 아메리칸 페일 에일(American Pale Ale)에 속한다고 했다.
아메리칸 페일 에일이 오륙도라는 이름으로 부산에 상륙한 것이다. 수제 맥주로 번역되는 크래프트 비어(Craft Beer)의 선풍적인 바람의 맨 앞장에 서 있는 맛이 아메리칸 페일 에일이다. 우리가 흔히 마셔왔던 라거 맥주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홉(넝쿨식물의 꽃으로 맥주의 보존성을 높여주고 쌉싸래한 맛과 향기를 주는 소재) 향기가 아메리칸 페일 에일에는 담겨있다. 이를 위해 귤껍질의 신맛과 농익은 열대과일 향이 나는 홉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두 번째로 맛본 아키투의 맥주는 까멜리아였다. 까멜리아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함께 자리한 부산 사람들이 모두 웃는다. 그것도 모르냐는 눈치다. 까멜리아는 동백꽃의 외래어인데, 샤넬 명품 브랜드도 있고 부산에 까멜리아 아파트도 있어서 부산 사람들은 익히 아는 말이라고 했다. 까멜리아 맥주는 동백꽃처럼 붉은 색이 도는데, 그 붉은 색이 치밀어 올라 거품도 연분홍색을 띠었다. 알코올 도수가 제법 느껴져 물어보니 7도라고 했다. 일반 맥주가 4도 쯤 되니, 두 배 가까이 되었다. 자몽 향이 느껴지는데, 결정적인 것은 쌉싸래한 홉향이었다. 진한 홉 향에 턱이 돌아갈 지경이다. 이 맛이 아메리칸 인디안 페일 에일 스타일이라고 한다. 아메리칸 페일 에일이 크래프트 비어 바람의 맨 앞장에 서 있다면, 그 뒤를 따라 보무도 당당하게 등장하는 맥주가 아메리칸 인디안 페일 에일이다.
한국 맥주의 맛은 1세대가 대형 맥주 회사가 주도하는 황금빛 라거형의 맥주였다가, 2세대는 하우스 맥주집의 삼총사 필바둥, 필스너 바이제 둥켈이다. 그리고 2013년부터 불어오는 수제 맥주 바람 속의 강자는 아메리칸 페일 에일과 아메리칸 인디안 페일 에일이다.
19세기에 제국주의 깃발 아래 세계를 요란하게 했던 맥주가 영국의 페일 에일과 인디안 페일 에일이라면, 21세기는 미국의 페일 에일과 인디안 페일 에일 시대의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제국의 상징이 영어이고 달러인데, 그 대열에 맥주도 끼어 있다. 인디안 페일 에일은 19세기에 영국이 인도에 맥주를 수출하기 위해서 보존력을 높일 목적으로 홉을 잔뜩 집어넣어 만든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목적은 오랜 항해 기간에 상하지 말라고 한 것인데, 그 강렬한 홉 향과 쓴맛에 사람들이 매료된 것이다. 강렬하고 극단적인 맛, 때로 그것은 인간의 입맛 뿐 아니라 의식까지 넓혀 놓았다. 아키투의 동백, 까멜리아는 김판열 대표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술이고, 소비자의 반응도 좋다고 했다.
세 번째 맛본 술은 고등어라는 뜻을 지닌 메커럴(Mackerel)이다. 맥주의 스타일로는 스타우트로 분류되는데, 맥주가 띨 수 있는 가장 짙은 색상을 지니고 있다. 스타우트의 강자는 아일랜드의 기네스 맥주다. 아키투의 스타우트 메커럴도 그래서 영국식 홉과 효모를 사용하여 만들고 있다고 했다. 고등어라는 이름에는 비릿한 맛이 담겨 있지만, 술 맛에서는 꽃향기가 스며있고 비온 뒤에 옅게 올라오는 흙내를 담고 있다. 김판열 대표는 검고 강렬한 흑맥주이지만 부드럽게 마실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네 번째로 맛본 술은 달맞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헤페 바이젠 스타일의 맥주다. 헤페는 효모, 바이젠은 밀 맥주를 의미한다. 효모가 살아있는 밀 막걸리를 즐겨 마신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근하게 여겨지는 맥주가 헤페 바이젠이다. 흔히들 라거에서 페일 에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노릇을 해주는 맥주가 바이젠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우리 입맛에 편하고 부드럽고 정감 있게 느껴지는 맛이 바이젠 종류다. 달맞이는 밀 맥주 특유의 뿌연 기운을 지니고 있어 수제 맥주다운 투박함을 지니고 있다. 맛을 보니 신맛이 약간 돌고 은은한 바닐라향이 돈다. 홉 향은 그리 강하지 않고, 구수한 맛이 돈다. 알코올 도수는 5.5%로 약간 높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맛본 맥주는 춘분을 뜻하는 버날 에퀴녹스다. 아키투 축제가 춘분에 이뤄졌는데, 회사 이름과 짝지으려고 버날 에퀴녹스라는 어려운 이름을 붙여놓았다. 이 맥주는 독일 옥터버페스트 비어로 알려져 있는 메르젠 스타일이다. 독일식 라거 맥주라 우리 입맛에는 익숙한 편이다. 물젖은 빵에서 느껴지는 곡물 맛과 카라멜 향이 돈다.
시음장 탁자에 기대여 아키투에서 생산하는 맥주 다섯 잔을 시음하고 나니, 학교 운동장을 다섯 바퀴는 돈 듯 숨찼다. 김판열 대표가 설명해 주는 맥주 하나하나에 담긴 재료와 의미에 귀기울이다보니, 시원하게 들이킨 맥주가 위가 아니라 혈관으로 들어간 듯했다.
김판열 대표는 맥주를 빚게 되면서 취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아쉬워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일과 취미가 너무 분리되어 있는 게 탈이다. 일과 놀이가 너무 분명하면 스트레스와 기쁨도 너무 극명하게 갈라진다. 현대 사회는 일과 놀이가 혼재된, 취미와 직업이 혼재된 사회로 진입했다. 경제 개발 시대에는 대량 생산으로 원가를 낮추는 상품이 우월했다면, 지금은 재미와 개성적인 맛을 살린 수제 맥주 유형이 흥미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자신이 만들어 마시던 맥주를 만들어 이웃과 함께 즐기는 재미를 김판열 대표가 지속한다면, 그 맥주에 행복해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