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 한 자루 들고 가서 술 마시던 시절도 있었다. 볼펜이 없으면 침 발라 손가락으로 긋기도 했다.(술집 주인에게 외상이라는 표시)
술값이 없어 외상으로 마시고 나서 주모에게 “외상이야 달아 놓으시오”하면 글을 모르는 주모는 장부책에 적을 수가 없어서 벽에다가 술잔 수만큼 작대기를 그어 놓는 방법으로 외상술값을 표시해 놓은 데서 긋는다는 표현이 나왔다고 한다.
가난 했던 주당들은 이른바 단골 술집을 정해 놓고 외상술을 퍼 먹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월급날은 회사문턱에서 술집 주인이나 아가씨들이 외상 장부책을 들고 진을 친다. 이를 피하기 위해 꼼수를 부리기도 하지만 헛수고가 일쑤다.
우리나라는 상거래 상 독특하게도 외상거래가 성행 했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라는 속설이 생겨났을 정도인데 외상으로 술 마시는 정도야 무엇이 대수랴.
70년대만 해도 월급봉투는 대개 누런 봉투였다. 고무명판으로 꽉 찍은 명세서가 적혀 있는데 월급 날, 경리에게 아양(?)을 떨어 월급 명세서를 후려치게 하여 술 마실 비자금을 마련하곤 했다.
외상술이라야 어디 우리에게만 있었던가. 당(唐)나라의 시성(詩聖) 두보(杜甫)의〈곡강시(曲江詩)〉에 “…술빚이야 가는 곳마다 흔히 있지만(酒債尋常行處有), 인생 칠십은 고래로 드물도다(人生七十古來稀)”
이 시에서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로 인해 나이 70을 먹으면 고희연(古稀宴)을 베풀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십 수 년 전만해도 70세까지 사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곡강시를 지은 두보도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59세에 죽었다니 술빚은 다 갚고 세상을 떠났는지 모르겠다.
요즘 세상에 외상술 주는 주모도 없으려니와 카드 한 장이면 통하는 세상이라 젊은이들은 외상으로 술을 마신다는 자체를 이해 못할 것 같다.
지난 해 5월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더불어민주당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경쟁한 바 있던 안희정 씨가 문 대통령과 축하 포응을 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부를 수 있어 기쁘다”며 “오늘 새벽까지 광화문 일대 호프집에 (맥주가)완전히 동 나도록 하자. 안되면 문재인 대통령 앞으로 외상을 긋도록 하자”고 이야기하며 눈길을 끈 적도 있었다.
직장 상사들은 때론 부하직원들과 한 잔 할 수 없을 경우 단골집에 가서 내 앞으로 달아 놓고 마시라고 한다. 이런 상사를 만난다는 것은 복 받은 술꾼들이다.
술이 고프지만 돈이 없을 때는 민증(주민등록증)도 맡기고 시계를 찬 친구는 시계를 안경낀 친구는 안경도 맡기고 술을 먹었다.
모르긴 해도 외상술을 대 놓고 먹던 사람들은 이른바 시인이나 소설가 등 예술인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요즘 예술인들은 경제적으로 크게 궁핍하지 않지만 60-70년대 예술가들은 배고픈 직업이었다.
외상술을 즐겼던 박인환이 어느 날 은성(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명동에서 운영했던 술집)에서 외상술을 먹던 날 우연히, 술집 여주인의 사연을 듣고 즉석에서 시를 썼다. 그 옆자리에 앉아있던 작곡가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붙이고 때마침 가까운 곳에서 술을 마시던 가수 현인이 달려와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탄생한 노래가 불후의 명곡 <세월이 가면>이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중략> 사랑은 가고/과거는 남는 것/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그 벤치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
노래를 듣던 은성 여주인이 “외상 술값은 안 줘도 좋으니, 제발 그 노래는 부르지 말아 달라”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주머니 사정이 두둑할 때는 그다지 술 생각이 안 나다가도 주머니 까뒤집어 봐야 동전 몇 개가 전부일 때 술 생각이 더 나는 것은 웬일일까. 그래서 술맛 좋기론 공술이 최고라고 하지만 때론 외상 술맛도 뒤지지 않는다. 술상이라야 초라한 거섶안주에 소주병이 전부이지만 진수성찬이라고 여기고 마시면 세상만사가 돈짝만큼 보이는 것이 주당들의 세상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포 한잔 마실 수 있는 체력과 경제가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한 시기다. 나이 먹어봐야 아는 진리다.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