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술을 마시자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술을 마시자

박정근

(문학박사, 황야문학 주간, 작가, 시인, 김수영기념사업회 부이사장)

 

박정근 교수

필자의 고향은 전북 부안이다. 서울에서 오십년 넘게 살다 보니 정도 들었지만 인간관계의 허위성에 대한 회의감이 슬금슬금 드는 것이 아닌가. 마침 창작에 몰두해야 할 타이밍이라 조용한 곳에서 글이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에서 만든 이런저런 관계가 대단해 보이지만 병이 들거나 늙으면 그것도 시들해진다. 오히려 변하지 않는 자연과 벗하면 변덕스러운 인간에게서 느끼는 실망감은 없으리라 여겨졌다.

그래서 필자는 고향에 조그만 농막을 짓고 서울에서 오르내리면 창작을 하는데 영감이 잘 떠오르라고 믿고 반귀농을 시도하였다.

 

고향에 내려와 보니 모든 게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여기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다. 항상 자연과 벗하며 지낼 수는 없다. 인간은 미우나 고우나 동병상련할 수 있는 지기가 필요한 것이다.

필자는 고향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한 사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진서리에 소재한 내소사 옆에 고등학교 동창이 살고 있었다. 그는 조용한 성격이라 은행에서 명예퇴직한 후 이곳을 전원주택을 짓고 한가한 삶을 즐기고 있었다. 고등학교 동창이지만 함께 테니스를 즐긴 적도 있어 매우 적절한 친구라고 보았다.

 

문제는 친구도 시골 삶이 너무 무료하여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시골에 정착하기 위해 마을 사람과 어울리려고 함께 술도 마시고 사귀었지만 코로나 이후로 교우 관계가 시들해져서 주로 혼자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너무 번잡한 도시가 싫어서 시골로 왔는데 이곳은 너무 쓸쓸한 것이다. 이것은 귀촌생활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친구와 필자는 서로 외로움을 달래주는 관계로 발전했다. 고등학교 동창이란 학연은 나름대로 신뢰를 주는 정서적 배경이 될 수 있어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는 방패막이가 되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시간이 되는대로 친구의 집에서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집은 내소사 정상을 바라보고 있어 뒤뜰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곰소 어시장에 친구의 단골집이 있어 질이 좋은 회와 조개를 살 수 있었다. 친구가 애주가라서 소주와 맥주가 냉장고에 항상 준비되어있다. 폭탄주를 한잔씩 만들어 뒤뜰에 나오면 멋진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달밤이면 더 낭만적인 분위기가 즐길 수 있었다. 달빛이 비치는 정상의 바위는 어쩌면 부처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한잔의 폭탄주를 거침없이 들이키고 달과 바위를 번갈아 바라본다.

술이 얼큰해지면 친구는 나에게 가곡 한곡 부르라고 청한다. 마을과는 꽤 떨어져 있어 이웃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필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한 바리톤이다.

“장하던 금전 벽 위 잔재되어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하여라” 교교한 달밤에 내소사가 멀리 보이는 산기슭의 전원주택에서 가곡을 부르는 맛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술에 취하는지 달빛에 취하는지 가늠할 수 없다.

 

언젠가 내소사 주지의 초대를 받아 만찬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필자는 좌중을 위해서 축가를 부른 적이 있었다. 아직 귀농을 하기 전이라 고향에 여행을 온 기분이 약간 감상에 젖어있었다.

필자는 향수에 젖어 ‘산아’라는 가곡을 불렀다. “산아, 사랑하는 내 고향의 산아, 종내 너를 두고 나는 가누나, 내 마음에 무게 이고 내 넋의 크나큰 날개여, 두 팔로 네 목을 얼싸 안고 나를 울리는 사랑아, 산아, 산-아. 잘 있거라”

 

필자의 향수에 잔뜩 젖은 목소리가 주지 스님을 감동시켰던 모양이다. 스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평생을 산사에서 지내는 스님에게 산은 어떤 의미였을까. 매우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묻기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감정이 필자의 가슴 속에서 거대한 감동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 무게를 그대로 두기에는 견딜 수 없었다. 느낌이 오는 대로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그리고 만취한 상태로 깊은 잠에 빠졌다.

 

친구의 집 뒤뜰에서 술을 마시며 부른 ‘산아’는 조금 다른 느낌이 다가온다. 고향의 산과 헤어지는 이별의 슬픔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가슴에 안겨있는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 아름다운 산과 교유하며 살아가는 친구를 축복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쓸쓸함에 빠지는 비극성보다 산과 사랑하는 희극적 기쁨을 만끽하기를 기원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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