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여사의 술이야기 9

김 여사의 술이야기 9

< 어느 날 여고 시절~ (3) >

선생님은 몹시 반색을 하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전 그때까지, 편지에 만나자는 말은 쓰지 않았었고, 만나자는 말을 어찌 꺼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친구는 빨리 말하라고 제 엉덩이를 쿡쿡 찔러댔습니다.

“저…. 선생님. 저 있잖아요. 저….”

전화로 말하기 힘들면 만나서 얘기할까?

“네 ?????”

이번엔 제가 당황할 차례였습니다.

저는 수화기를 황급히 틀어막고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얘, 선생님이 만나자는데… 어떻게 해?”

“뭘 어째~ 결과 봐야지”

어쨌든 내기는 내기니까, 끝을 보기로 했습니다.

“언제요?”

“오늘 되니?”

“네….”

“그럼 4시에, 종로 2가에 로얄제과라고 알지? 2층으로 와라~”

그런데 친구가 식구들과 외가에 가야 한다고 저 혼자 나가라며 “전화할게~” 하더니 포로롱 가 버렸습니다.

저는 집으로 와서 잠시 고민했습니다.

교복을 입고 갈까, 사복을 입고 갈까….

사복을 입기로 합니다. 좀 더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어서~^^

고등학생이 사복이라야 변변한 것이 있을 리 없었고, 오로지 한 벌뿐인 외출복, 아직도 눈에 선한 하늘색 바지에 크림색 블라우스였습니다.

그러나 어른스럽게 보이는 데 실패한 결정적인 실수는 -몇 년이나 지난 후 불현듯 알아챈 것이지만 – 그냥 갈래머리 땋은 채 나갔다는 것입니다~^^

약속장소로 조심스럽게 올라가니 저만치 창가에 수학선생님이 앉아 계셨고, 머뭇거리며 다가선 제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자 선생님은 무척 놀라는 표정이셨습니다.

“아니…. 하나가 너였니???”

선생님은 전혀 의외라는 듯 어이없는 웃음을 웃으셨습니다.

아마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떠들썩하게 소문이 났거나, 아니면 노골적으로 접근하는 학생들 중 하나가 아니어서 그랬겠지요.

수학선생님의 트레이드마크인 예의 그 개구쟁이 같이 천진하고, 해사한 웃음에 저도 모르게 스르르 긴장이 풀어져 버렸고….

무엇보다 제 러브레터가 효력을 발휘해, 선생님 쪽에서 먼저 만남을 청해온 사실만이 스스로 즐겁고 대견했습니다.

그랬으므로 “그 편지 정말 네가 쓴 거니?” 하고 물으셨을 때, 그만 경계심을 풀고 신바람이 나서는 사건의 전말을 재잘재잘 죄 불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먼저 만나자고 하셨고, 또 이렇게 만났으니까…. 제가 이긴 거지요~”

승리감에 도취된 제가 열심히 떠들다가, 무엇인가 팽팽한 분위기에 정신을 차리고 선생님을 쳐다 본 순간, 아! 그때 선생님의 그 표정을 그대가 보셨어야 했는데….

수학선생님의 얼굴은 정말 ‘구겨졌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그런 표정이었습니다.

그때서야 철없는 저도 머리를 탁 치듯 느껴지는 것이 있었죠. 선생님은 어린 제자에게 농락을 당한 것입니다. 더구나 편집반 샘께선 둘의 농간을 꿰뚫고(?) 있었던 반면, 자신은 제자들이 장난삼아 쳐놓은 올가미에 걸린 줄도 모르고, 그 제자를 불러내기까지 하였으니….

아마도 수치심과 모욕감으로 몹시 당황하셨던 것 같습니다. 수학선생님과 어찌 헤어졌는지, 이상하게도 기억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기치 못했던 선생님의 반응에 기가 질려 경황없이 사과하고, 무척 불편한 심경으로 돌아온 건 분명한데 정작 걱정은, 당장 다음 학기부터 하루도 빼지 않고 들어 있는 수학시간을 맞이할 일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시작된 방학, 학교 생활관이 있던 경기도 근처 산으로 각 특별활동반 단위의 수련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재잘대며 생활관 입구에 들어섰을 때, 널따란 풀장을 젊은 여자가 홀로 차지하고 수영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수영장의 그녀를 본 순간, 저는 이상하게 정체 모를 강한 거부감을 느꼈는데,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 여자가 바로 수학선생님의 약혼녀라는 말이, 호기심에 좀이 쑤신 우리들 사이를 휭 하니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녀가 수학선생님 약혼녀란 것이 알려지면서, 아이들은 당장 입을 삐쭉이며 삼삼오오 모여 앉아 흠 잡기에 골몰했습니다.

다리가 굵고 짧다느니… 머리가 촌스러워 못 봐 주겠다느니….

개학 전에 수학선생님과 마주치리란 생각을 꿈에도 안 해본 전 그 만남이 엄청나게 곤혹스러웠으나,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친 그의 약혼녀를 바라보는 제 심정은 참으로 복잡 미묘했습니다.

수학선생님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공연히 꿈틀거리는 질투심. 거기에 ‘당신이 있었어도 당신 약혼자는 나에게 만나자고 했어….’ 하는 은근한 우월감(?)이 뒤섞여 아주 묘한 기분이었죠~^^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당돌하기 짝이 없는 그런 마음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의주시하는 수많은 눈초리가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수영장에서 살다시피, 하루를 묵고 돌아갔고, 수학선생님의 의도적인 외면과 싸늘함에 저는 적잖이 속상하고 걱정되어 줄곧 기분이 가라앉은 채 침울해 있었습니다.

수련회 마지막 날 밤.

선생님들은 잔디밭에 놓인 파라솔 아래 탁자에서 늦은 밤까지 술잔을 기울이셨는데, 저는 그 무리에 섞이기 싫어 잔디밭 한쪽에 앉아 풀벌레 소리에만 귀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언니, 안 들어가실 거예요” 하는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건배를 외치시던 선생님들도 친구와 편집반 후배들도 모두 사라져 버렸고, 처음 보는 낯선 후배 아이 하나와 저만 덩그렇게 남아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들어가기 싫었고, 잠은 더욱 오지 않았습니다. 휘이 한 바퀴 둘러보니, 탁자 위엔 선생님들이 잡숫다 남은 술과 안주가 그 사이 내린 이슬에 젖어 축축해져 있었는데,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이젠 전혀 기억에 없지만, 아무튼 전 그 후배를 옆에 둔 채 남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너 먼저 들어가라”는 말을 한 듯도 같은데 그 아이는 아무 대답 없었고, 제 그림자마냥 소리 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열여덟, 겨우 여고 2학년 때였으니, 첫 음주의 경험이 비교적 일렀던 것과는 달리 술과는 도대체 사귀어지질 않아, 회식자리가 늘 고역이었던 저는 직장생활 25년만에야 처음 아들과 함께 술을 배웠죠.

그동안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술 마신 사건이 세 번쯤 있는데, 그날 밤 4홉들이 소주병에 3분의 1쯤 남아 있었던 술을 기어코 바닥내고야 만 것이 그 첫 번째 사건이었습니다~^^

투 비 컨티뉴~

Let me 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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