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에로틷한 수밀도형 술잔 이야기⑬

베르사유 전경 그림(painted by Pierre Patel _Versailles Museum)

세상에서 가장 에로틷한 수밀도형 술잔 이야기⑬

남태우 교수의 특별기고

쿠페잔 탄생의 일화(下)

르네상스 시대의 사회에는 두 가지 종류의 유방, 즉 남성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아담한 크기의 ‘상층 계급의’ 유방과 자기 자식과 그들의 부유한 고용주의 자식에게 젖을 먹이는 여성들이 갖고 있던, 수유를 위한 풍만한 ‘하층 계급의’ 유방이 있었다. 앙리 4세의 총애를 받았던 가브리엘 데스트레(Gabrielle d’Estrées)의 초상화는 이러한 위계질서를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가브리엘은 고급문화를 자랑하며 “벽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미인들의 초상화”를 전시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화랑에 자신의 누드화를 더해준 마지막 왕의 애인이었다.

당시 프랑스 궁정사회는 작고 아담한 유방을 이상적인 유방으로 보았는데, 앙리 2세는 유방을 술잔으로 만들어 만 천하에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앙리 2세의 애첩인 디안은 비록 왕보다 나이가 20세나 많았지만 헬레네만큼이나 완벽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절세 미녀에 홀딱 반한 앙리 왕은 그녀를 살아있는 여신이라 부르며 엄청난 부와 명예 권력을 주었다. 또 당대의 뛰어난 시인과 조형예술가들을 불러 모아 빛나는 미모를 수많은 그림과 판화와 조각으로 만들어 기념하게 했다. 왕은 종종 애첩의 모습을 나체로 그릴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오로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그녀의 유방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미술사를 통틀어 예술가들이 유방의 아름다움을 가장 감격적으로 묘사했던 때는 르네상스 시대다. 이 시대가 얼마나 유방을 열광적으로 찬미했는지는 15, 6세기에 유방 모양의 분수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유행한 것으로 잘 알 수가 있다. 유명한 뉘른베르크의 청춘 분수는 유방에 대한 르네상스인들의 욕망이 정점에 달한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화가와 조각가들이 앞 다투어 여성의 유방을 예찬하자, 왕과 귀족들은 아내나 애인들을 초상화를 주문할 때 유방을 온전히 드러낸 모습으로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로코코 시대의 회화에 그토록 많은 여인들이 아름다운 젖가슴을 당당히 풀어헤치고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유방의 관능성을 최고의 미로 찬양했던 궁정과 귀족 사회의 분위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지적이며 정치적이었던 디안은 앙리 2세의 평생친구로, 연인으로 그의 인생에 영향력을 끼치며, 왕비에 버금가는 정치권력을 누리며, 1553년에는 왕비 다음 서열인 발렝티누아 공작부인(duchesse de Valentinois)의 작위를 받기도 한다. 앙리 2세는 디안을 위해서 아네 성(Château d’Anet)을 지었고, 왕실 소유의 아름다운 슈농소 성(Château de Chenonceau)도 디안에게 선물로 주며, 왕실보다 이곳에서 디안과 머무르며, 마상 창시합에서 창에 눈이 찔려 죽을 때까지 25년을 그녀와 함께했다.

앙리 2세로부터 슈농소 성(Château de Chenonceau)을 선물 받은 디안 드 푸아티에는 ‘달의 여신 다이아나’로 비유될 정도의 절세미인이었다. 디안은 15세 때 39세 연상인 아네의 영주 루이 드 브레제(Louis de Brézé, seigneur d’Anet)와 결혼한다. 루이는 샤를 7세의 손자이다. 디안과 루이 사이에는 2명의 딸, 프랑수아즈 드 브레제(Françoise de Brézé)와 루이즈 드 브레제(Louise de Brézé)를 생산했다.

슈농소 성은 1513년 샤를 8세,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때 재정관을 지낸 토마스 보이에(Thomas Bohier)와 그의 부인인 카드린 브리소네 (Katherine Briconnet)가 요새화한 마르케 가문의 옛 물방앗간 자리에 4개의 탑을 갖춘 단순한 장방형의 아성으로 지어졌고, 마르케 탑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세워졌다. 성의 건축은 토마스 보이에가 직무에 바빠 참여하지 못하고 그의 부인인 브리소네의 지휘하에 섬세하면서 우아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1521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보이에는 1524년에, 부인은 1526년에 세상을 떠나 이 성에서 오래 살지 못했다. 성에는 이들 부부의 이니셜인 토마스 보이에를 뜻하는 이니셜 ‘TB’와 카트린 브리소네의 이니셜인 ‘KB’가 성의 곳곳에 새겨져 성의 첫 주인을 기리고 있다.

슈농소 성(Château de Chenonceau)은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2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으로 유네스코가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루아르 계곡에 있는 여러 고성들 중 하나이다. 우람한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순백의 드레스로 치장한 고운 신부의 설렘으로 다가서는 슈농소 성이 동화 속의 나라에 들어오라는 듯 서 있다.

성은 강 위에 다리처럼 세워져, 석조 아치교가 건물 하단을 지탱하고 있는 독특한 구조로 기다란 갤러리 건물과 장방형의 본채가 남북으로 연결되어 강을 가로지며 서 있는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다. 이렇게 자리한 성은 강물 위에 떠있는 셰르(Cher)강에 반영되어 한층 더 고아한 느낌으로, 물속의 자신의 아름다움에 빠진 나르시스를 보는 듯 아름답다.

슈농소 성의 주인은 6명의 여인들이 성주였기에 ‘여섯 여인의 성’으로 불리는데, 여성주 중에서도 앙리 2세의 왕비였던 카트린 드 메디치와 왕의 연인이었던 디안 드 프와티에의 사랑과 증오가 긴 매듭으로 얽혀있다.

슈농소 성은 1513년 샤를 8세,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때 재정관을 지낸 토마스 보이에(Thomas Bohier)와 그의 부인인 카드린 브리소네 (Katherine Briconnet)가 요새화한 마르케 가문의 옛 물방앗간 자리에 4개의 탑을 갖춘 단순한 장방형의 아성으로 지어졌고, 마르케 탑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세워졌다.

슈농소 성(Château de Chenonceau)

성의 건축은 토마스 보이에가 직무에 바빠 참여하지 못하고 그의 부인인 브리소네의 지휘 하에 섬세하면서 우아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1521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보이에는 1524년에, 부인은 1526년에 세상을 떠나 이 성에서 오래 살지 못했다. 성에는 이들 부부의 이니셜인 토마스 보이에를 뜻하는 이니셜 ‘TB’와 카트린 브리소네의 이니셜인 ‘KB’가 성의 곳곳에 새겨져 성의 첫 주인을 기리고 있다.

이들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인 앙투안 보이에(Antoine Bohier)가 유산으로 물려받지만 공금횡령으로 거액의 벌금을 물게 되면서 빚더미에 앉게 되고, 결국 1535년에 성을 프랑수아 1세에게 양도하였다. 프랑수아 1세의 뒤를 이어 1547년 왕위에 오른 앙리 2세가 사랑하는 여인 디안 드 푸아티에게 사랑의 증표로 슈농소 성을 선물로 주었다. 디안은 이곳에 머물며 1556년-1559년 사이에 다리를 지었고, 그 후 앙리 2세가 세상을 떠나자 왕비인 카트린 드 메디가 살았다. 그녀는 두 연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새로이 손질을 하며, 다리 위로 웅장한 갤러리를 건축했다. 갤러리는 흑백 바둑판 위 바닥에 들보가 밖으로 노출되어 있다.

카트린은 죽을 때 이 성을 앙리 3세의 미망인 루이즈 드 로렌(Louise de Lorraine)에게 소유권을 넘겨주었고, 다시 앙리 4세가 그의 연인 가브리엘 데스트레(Gabrielle d’Estrées)에게 주었다. 이어 많은 예술가들과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 루소, 몽테스키외와 두터운 친분을 맺으며 후원하던 뒤팡(Dupin)부인이 18세기에 성주가 되었다.

슈농소 성은 민중에게도 존경을 받던 뒤팡 부인의 명성 덕택으로 프랑스 대혁명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 성의 마지막 여주인은 플루즈(Pelouze) 부인으로 세월에 낡아가는 슈농소 성을 복원하고 관리를 해 지금의 슈농소 성으로 남게 했다.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édicis, 1519~1589)는 16세기 프랑스 왕비이자 황태후의 삶을 산 메디치가의 카트린을 “검은 베일 속의 백합‘이라고 은유한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백합 세 송이와 일곱 개의 환약으로 만들어진 메디치가의 문장(紋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래 평민 출신었던 피렌체의 강력한 금융가문인 메디치가의 문장은 7개의 알약만 그려져 있었다. 메디치가의 조상이 약사라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백합 세 송이가 같이 그려진 것은 프랑스의 왕 앙리 2세의 덕이다. 그는 메디치가의 가문을 높이 평가하여 1464년 코시모 데 메디치가 죽자 프랑스의 카페 왕조를 상징하는 백합 세 송이를 넣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영예로운 일이었다. 초라한 환약과 백합의 결합인 이 문장은 권력과 명예의 가문에 걸맞는 문장이었다. 카트린 드 메디치는 이 가문에서 배출한 여걸이었다. 그녀는 메디치가의 출신으로 프랑스 왕비가 되면서 내면으로 금융가문인 메디치가의 피를 지니고 프랑스의 백합으로 살았다. 이 백합은 프랑스 왕족이라는 권위와 명예를 지키는 삶을 살다 갔다.

구슬이 6개 박힌 메디치가문의 문장

 

 

 

 

“이 아이는 엄청난 불행의 씨앗이 되리라.” 그리고 ‘검은 베일’의 의미는 이렇다. 그녀의 남편인 앙리 2세가 마상 시합을 하다가 상대방의 창이 눈을 관통하는 바람에 40살의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남편이자 왕국의 왕이 죽고 나서부터 카트린은 영원히 복상한다는 뜻으로 더 이상 화려한 색감이 있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

다. 백성들에게 그때부터 그녀는 ‘검은 왕비’로 불리게 된다.

첫날밤(1553년)에 앙리 2세(1519~1559)는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édicis)를 처녀인 채로 잠재웠다. 스무 살이나 많은 디안드 푸아티에와 꿀맛 같은 사랑을 꿈꾸고 있었다. 앙리 2세 열 여섯 살 때다. 카트린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가의 딸로 첫날밤에 대해 환상적인 꿈을 키워왔었다. 그러나 현실은 동상이몽이다. 앙리 2세는 디안을 생각하고 카트린은 앙리 2세를 병적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 간극은 너무 컸다.

머나먼 이국인 피렌체에서 온 카트린은 숨도 죽인 체 앙리 2세의 손길을 기다렸으나 동창이 밝아올 때까지 끝내 손길은 오지 않았다. 그녀는 앙리 2세와 열여섯 살의 동갑내기다. 생일이 앙리 2세가 6개월 앞설 뿐이다. 육체적으로 성숙한 남녀가 한 이불속에 있으면서 동상이몽 상태로 밤을 샌다는 것은 보통일은 아니다. 앙리 2세는 엄마같이 푸근한 디안의 품을 생각하고 카트린은 꿈속에서도 그리었던 억세고 풋풋한 앙리 2세의 품을 기다렸을 터다.

사실 외모로만 따지면 디안이 카트린을 제압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카트린은 교양 면에서 단연 디안을 뛰어 넘는다. 수준 높은 교양에 라틴어에 그리스어까지 능통해 왕비로서 손색이 없는 재원이었다. 그러나 왕실에선 상인 딸이란 선입관으로 처음부터 왕비로서 품위와 인격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앙리 2세가 특히 더욱 그러했다. 남편인 앙리 2세가 그러할 진데 궁궐 식구들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말만 왕비이지 실제는 디안이 왕비 행세를 했다.

그렇지만 애첩 디안의 거실은 밤낮없이 인산인해다. 그러나 카트린의 주위는 찬바람이 불고 몇 명의 시녀가 따를 뿐이다. 이름뿐인 왕비다. 반면에 디안은 비록 정부(情婦)지만 주위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몰려들어 앙리 2세와 은밀히 사랑을 나눌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디안은 앙리 2세를 만나면 며칠이고 놓아주지 않았다. 디안은 방사(房事) 기술이 뛰어났다. 앙리 2세보다 20세나 많아 그녀는 이미 여러 사내를 거친 몸이다. 15세 발랄한 나이 때 노르망디 지방의 프레제 백작의 부인이 됐으나, 40세 연상의 사내는 디안이 여자역할을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사망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앙리 2세 아버지인 프랑수아 1세(1494~1547) 정부가 되어 측근에서 앙리 2세와 나이를 뛰어넘는 알고 지내는 관계에서 깊은 관계에까지 갔다. 그 같은 관계에서 프랑수와 1세가 사망하자 앙리 2세와 디안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남자와 여자로서 본격적인 만남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늘 뜨거웠다. 그녀는 2대에 걸친 애첩의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여성의 미모는 세상에 둘도 없는 강력한 무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앙리 2세의 위치가 격상되는 것에 따라 디안의 신분도 정식 정부의 자리로 인정받게 되었다. 디안은 몸뚱이 하나로 아버지와 아들을 휘어잡았다. 그녀는 낮의 디안과 밤의 디안을 철저히 구분시켰다. 낮의 디안은 우아하고 청초한 수련이라면 밤의 디안은 태양같이 뜨겁고 새벽달처럼 냉혹한 붉은 장미다. 그녀는 낮의 디안보다 밤의 디안을 더 즐겼다. 밤의 디안은 앙리 2세를 독차지 할 수 있어서다.

낮의 앙리 2세는 프랑스를 지배하는 지존이지만 밤엔 그 지존이 디안의 품에서 어린아이가 되기 때문이다. 앙리 2세도 그런 디안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그녀는 밤엔 자애로운 어머니로 변신도 불같이 뜨거운 정부역할도 때와 장소에 따라 자유자재로 해냈다. 그래서 앙리 2세는 주말이면 디안의 처소에서 월요일 아침까지 문밖도 나가지 않았다.

반면 앙리 2세의 왕비인 카트린 드 메디치에게 디안은 삶의 고통이요, 시련이었다. 카트린 드 메디치는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자손으로 1519년에 태어나 출생 직후 부모를 잃고 피렌체의 정치상황에 의해 수녀원에 감금되기도 하고 추방을 당하기도 하며 어린 시절부터 시련 속에서 살았다. 그녀가 프랑스에 오게 된 것은 이탈리아의 문화를 사랑하던 프랑수아 1세에 의해서이다. 프랑스에서의 카트린은 명문의 메디치 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상인의 딸이라는 조롱을 들어야 했고, 결혼 한지 10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해 편치 않은 시간에 앙리 2세와 디안의 관계로 이중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다행히 10년 만에 그녀는 10명의 자식을 낳았고, 앙리 2세가 슈농소 성에 주로 머물 때 궁중에 머물며 자식들을 교육하며 지냈고, 그녀의 자식들은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 마고로 유명한 마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등이 프랑스 왕가를 계승하게 된다.

그녀의 오랜 삶은 고통은 1559년 앙리가 마상시합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자마자 그녀가 지배권을 장악하고, 디안이 왕을 만나는 것을 제한시키며 막을 내리게 된다. 앙리 2세가 부상으로 생사의 고통에 시달리는 10일 동안 왕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한 디안을 못 보게 하는 것으로 카트린은 바로 복수의 칼을 빼들었고, 왕이 디안에게 선물했던 물건들의 목록을 작성하게 해, 디안에게서 모든 것을 반환받았다. 또 왕이 죽었을 때에는 장례식에도 초청하지 않았다. 이어 디안을 슈농소 성에서 추방하고 초라한 쇼몽 성(Château de Chaumont)에 머물게 한 후 자신이 슈농소 성에서 살았다. 디안은 쇼몽에 잠시 머물다 아네에 있던 자신의 성에서 외부와 일체의 접촉 없이 조용하게 말년을 보내다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디안 드 푸아티에는 앙리 2세의 아버지 프랑수아 1세의 정부였다가 앙리 2세가 카트린 드 메디치(이태리 국부 코시모 데 메디치의 마지막 적자손)와의 결혼 때 ‘아들을 남자로 만들어 달라’는 왕의 부탁을 받고 결혼선물로 앙리에게 넘겨져 20세나 연하인 왕 앙리 2세의 정기를 몽땅 빼 버렸다는 색녀였다. 늙을 줄 모르는 그 미모는 마법의 회춘약이라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사람들이 쑤군거릴 정도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아침마다 슈농소 성의 샘물로 하는 세수가 비결이고 미녀의 이상이라 하여 프랑스 안에 다음과 같은 기준을 남기기도 하였다. 마치 조선시대의 미인의 기준을 본 것 같다.

하얀 것 세 개:피부·치아·손

검은 것 세 개:눈·눈썹·눈꺼풀

장밋빛 세 개:입술·볼·손톱

가는 것 세 개:입술·허리·발목

부드러운 것 세 개:몸통·머리카락·손

작은 것 세 개:유두·코·머리

풍만한 것 세 개:팔·허벅지·엉덩이

앙리 2세의 디안 사랑은 병적이었다. 유산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앙리 2세는 그날 밤 불꽃같은 사랑을 한 후 아름다운 ‘슈농소 성’을 선물로 하사했다. 여자로서 아이를 낳고 싶은 욕망을 극복하고 왕위 권으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포기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다. 그 후 디안에 대한 그의 사랑은 더 뜨겁고 더 애틋해졌다. 디안에 대한 사랑이 종교같이 승화되자 궁궐안팎에서 앙리 2세에 대해 비난이 거세졌다. 아버지의 정부를 아들이 또 정부로 삼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앙리 2세의 디안에 대한 사랑은 세론이 거세지면 거세지는 것만큼 더 강렬해졌다.

사실 디안이 낙태를 선택한 것은 다 목적용이었다. 첫째는 카트린의 아이를 계속 보기 위함이고, 둘째는 몸을 아름답게 보존하기 위한 전술이며, 셋째는 국왕의 사랑을 한시도 떼어 놓을 수 없어서다. 여자로서 엄마가 되고 싶은 욕망이 없는 여인은 이 세상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디안은 독하게 마음먹고 아이 엄마를 포기했다. 그러므로 그녀 역시 앙리 2세에 대한 사랑이 욕망을 뛰어넘는 종교화가 되었다.

앙리 2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디안에게 슈농소 성을 하사했다. 슈농소 성은 파리에서 쉽게 갈 수 있는 아름답고 고풍스런 성으로 심사숙고해 결정한 것이다. 카트린의 아이를 봐주기 위해 항상 궁궐에 있어야 하지만, 주말엔 슈농소 성에 가서 쉴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앙리 2세도 슈농소 성에 가서 카트린의 눈치 안보고 마음껏 사랑을 하려는 속셈도 깔려 있었다.

디안은 앙리 2세의 배려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녀는 사냥을 즐겨 산야를 좋아했으나 강도 몹시 사랑하였다. 그런데 슈농소 성 옆엔 해자(垓字:성 밖으로 둘러 판 방어용 물길)같이 루아르 강이 흘렀다. 봄, 여름, 가을엔 뱃놀이를 할 수 있고 겨울에는 눈 축제를 즐길 수 있어 디안은 더욱 흡족해 하였다. 주말이면 슈농소 성은 디안의 천하다. 앙리 2세가 있으나 그가 하인같이 디안을 위해 몸소 고기를 굽고 포도주를 따랐다. 사랑하는 여인이 자기는 아이도 낳지 않고 왕실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디안에게 주말이라도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겠다는 국왕의 뜻이다. 그러나 디안의 사랑은 국왕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순수한 사랑이 아니었다. 아무튼 그들은 빛과 그림자 같이 한 달을 하루같이 일 년을 한 달처럼 세월을 아름답게 엮어갔다. “폐하 오늘은 너무 애쓰셨어요…. 소첩이 안마를 해 드릴게요.” 밖에선 여름 장맛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천둥번개까지 요란하게 쳤다. 그들은 사랑을 할 때는 반드시 불을 껐다.

그러나 오늘은 천둥번개가 치는 바람에 남녀의 나신이 신비하게 드러났다. “우선 샤워를 하셔야지요!” 디안은 앙리 2세의 등을 밀어 샤워실로 갔다. 젊고 탄탄한 몸이다. 디안은 뒤에서 아기를 안듯이 앙리 2세를 품고 샤워실로 갔다. 앙리2세는 언제나처럼 디안에게 몸을 완전히 맡겼다. 국왕의 가슴엔 부드러운 여름 잔디 같은 털이 여인의 욕정을 부채질 했다. “전하 소첩을 버리지 마세요! 소첩 이제 나이 들어 전하의 재미있는 노리갯감이 안 되잖아요?” 디안의 음성에 울음기가 가득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네 말을 알아들을 수 없구나, 어서 등을 밀고 물을 끼얹어라. 해가 떨어졌는데도 여전히 덥다!” 사내는 빨리 침대로 가서 육체의 허기를 채우고 싶은 것이다. “말씀을 하셔야 돼요…….” 디안의 손이 어느새 앙리 2세의 물건에 가 있다. 한 손은 귀두를 간질이고 한 손은 항문주위를 더듬었다.

국왕이 제일 좋아하는 전희다. 앙리 2세와 디안의 관계는 여자가 남자에게 솜처럼 보드랍고 햇살같이 따뜻하게 전희를 해주었다. 디안은 처음부터 그렇게 앙리 2세를 리드했다. 물을 끼얹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들은 침대로 뛰어가 한 덩어리가 되었다. “말 안 할 거예요?” 이젠 귀두를 입으로 애무하다 빼며 다시 다그쳤다. “당신이 나를 배신하면 몰라도 내가 당신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국왕은 잔소리 말고 어서 하던 짓이나 계속 하란 식으로 디안의 머리를 다시 사타구니로 밀어댔다.

사실 디안은 요즘 체력이 부쩍 딸렸다. 낮엔 연년생으로 낳은 카트린의 자녀들을 돌보고 밤이면 앙리 2세의 밤 생활 파트너가 되기에 혼백이 빠져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권력과 화려한 궁궐생활도 좋지만, 조용히 여자의 길로 살아가고 싶은 생각이 요즘 들어 부쩍 새록새록 샘솟았다. 나이도 나이인 만큼 대접도 받고 싶은 것이다. 국왕의 정부로서 질시와 아첨이 아닌 진정성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눈길과 가슴 뜨거운 손길이 그립다. 몸에 힘이 빠질수록 진정한 마음이 애타게 목마르다. 국왕의 사랑이 진정성이 없어 보이지 않으나 사랑의 열정이 식으면 사내들은 여자에게서 알맹이 빼먹은 소라 껍데기 모양 팽개치는 생리를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다. 그런 마음이 든 이후 디안에 대한 국왕의 열정이 추호만큼씩이지만 식어져가는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이 그 첫 번째 징후 같다. 평소 같으면 디안이 이렇듯 애절하게 읍소하면 비너스 언덕에 멍이 들도록 풀무질을 하다가도 멈추고 여인의 마음을 달랬을 텐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어제의 국왕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디안이 평소 같으면 허리아래 모든 근육을 움직여 국왕의 즐거움을 돋구어주면 앙리 2세는 어린아이같이 웃으며 기쁨을 만끽했는데 지금은 감정 없는 기계처럼 움직였다.

국왕은 자기만 기쁨을 만끽하고 뒷물도 하지 않은 채 깊은 잠에 빠졌다. 그의 얼굴엔 알 수 없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지금까지 디안의 직감에 걸리지 않는 국왕의 일상은 없었는데, 지금의 앙리 2세의 표정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국왕은 자면서 식은땀까지 흘리며 알 수 없는 잠꼬대도 했다. 디안은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정식 정부로 인정받아 왕실 가족들에게 신임을 받아가는 데 국왕이 행여 붕어하면 공든 탑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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