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우 교수의 특별기고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수밀도형 술잔 이야기(14)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는 앙투아네트
사치의 끝을 달렸다는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Josephe Jeanne D’Autriche-Lorraine, 1755~1793)는 처음에는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공주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나이또래의 평범한 왕실의 소녀와 다르지 않았다. 그 당시 유럽 공주들의 교육 수준이 낮았던 것과 같이 마리 앙투아네트도 쓰기와 읽기에 곤란을 겪었고 프랑스어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정략결혼 전 1년 간 프랑스 왕실에서 파견한 교주의 가르침 덕분에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성격은 많은 사람들에게 우호적 평가를 받을 만큼 상냥했다고 한다. 외모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했다. 이렇게 마리 앙투아네트는 평범하고 예쁜 외모에 친절한 성격을 가진 평범한 유럽 왕실 소녀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가난한 사람의 삶에 대해서도 잘 알아 마차가 밭을 망치는 것도 거부 했으며,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세요’라는 발언도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프랑스에 불행을 몰고 올 것이라는 악의적인 선전과 루이 16세의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에 외로움을 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국, 파티와 의복, 보석에 국고를 소비하는 사치스러운 왕비가 되었다.
이런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와 허영의 대명사로 불리고 이에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다이아몬드 목걸이사건’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1775년에 발생한 일로 한 보석상이 선왕 루이 15세의 주문을 받아 크고 작은 540개의 다이아몬드로 된 160만 리브르 상당의 목걸이를 제작을 했는데, 이는 루이 15세의 애인이었던 듀바리 부인(Madame du Barry)을 위하여 주문이 된 것인데, 갑자기 루이 15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보석상이 비싼 목걸이를 그대로 떠안게 되었다.
이에 보석상은 이 목걸이를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판매하려 했지만 너무 고액인데다가 평소 적대하던 듀바리 부인을 위해 만들어진 목걸이라 왕비는 이를 구입하지 않았다. 그러자 보석상은 당시 왕비와 친분이 있다고 말하고 다니던 라 모트 백작 부인(Comtesse de la Motte)에게 중개를 의뢰하게 되고 라 모트 백작 부인은 1785년 왕비에게 아첨하여 재상으로 출세하기를 바라고 있던 로한 추기경에게 접근하여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목걸이를 탐내고 있다고 말하며 이를 대신 구입하여 왕비에게 선물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로한 추기경은 목걸이를 구입해 라모트 백작부인에게 건네게 되고 라모트 백작부인은 그 엄청난 목걸이를 손에 넣은 후 목걸이를 분해하여 팔찌, 팬던트, 반지로 만들어 자신이 착용하고 남은 다이아몬드를 팔아 넘겼다. 이 사건은 보석상에게 가격을 지불하는 과정에서 들통이 나게 되었다. 목걸이의 대금이 지불되지 않아 보석상은 왕비의 측근을 찾아가 이 사실을 호소하게 되었고 1785년 8월 로한 추기경과 라모트 백작부인은 체포되었고 이 사건에 화가 난 마리 앙투아네트는 재판을 의뢰하였으나 무죄선고를 받게 되어 마리 앙투아네트의 체면만 깎이게 되고 백성들의 귀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목걸이를 훔쳤다는 소문으로 퍼지게 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좌절하게 된다.
그로 인해 바스티유감옥에 갇힌 로한 추기경은 법정에서 목걸이를 사취했다는 혐의는 벗었지만 공직에서 해임되었고 모트 백작부인은 매질과 낙인이 찍히는 형을 받은 뒤 종신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이후 영국으로 도망친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방하는 <회고록>을 썼다.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목걸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그 사건은 그녀를 부도덕한 여성으로 회자되게 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당연한 귀결이었지만 목걸이를 둘러싼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져 파리 시민들은 부패한 왕실과 무능한 정부에 분노하다 못해 냉소하기에 이르렀다. 이 이야기는 다음 항목에서 다시 전개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루이 XVI(Louis XVI, 1754~1793)세의 왕비로 간택되어 베르사이유 궁에 들어온 것은 그녀가 14세 때이며, 그의 남편은 황태자로 한 살 위인 15세 때였다. 그녀는 18세에 왕비가 되었고, 21세에 임신할 때까지 7년 동안 루이 XVI세는 비뇨기과의 질병 때문에 왕비를 처녀의 몸으로 그대로 있게 했다. 물론 병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7년이라는 긴 세월을 첫날밤을 치루지 못하고 처녀로 지내게 했던 것이 나이 어린 왕비의 정신적인 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왕비는 무료한 생활에 한계를 느껴 쾌락을 얻기 위해 밤이면 마차를 몰고 젊은 족속들과 어울려 극장과 도박장을 출입하기 시작했고, 이에 싫증을 느끼고는 보석과 값진 장신구를 사들이는데 열중했다. 나중에는 1년에 무려 100벌의 옷을 만들게 했고, 귀걸이, 목걸이, 팔찌, 반지 등 새로운 장신구에도 눈을 돌리는가 하면 연극, 경마, 무도회를 매일 밤 열고, 베르사유 궁전 안에 ‘꿈의 궁전’이라는 작은 별장을 짓고 매일 밤 친구들과 고관 대작의 부인들을 불러들여 연회를 열었다.
당시 귀부인들 최대의 관심사는 누구의 유방이 가장 아름다운가에 있었다. 그래서 여인들이 모이면 서로의 유방을 겨루는 ‘유방 콘테스트’를 열곤 했는데, 1위는 언제나 앙투아네트 왕비가 독차지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서 무료함을 달래는 길은 이렇게 새로운 쾌락을 발굴하는 길이었는데, 루이 XVI세는 남성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어 부인 옆에 오지 못했기 때문에 왕비의 낭비와 사치를 방관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프랑스 절대주의 시대에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슴을 석고로 떠서 여성의 유방모양 과일그릇을 만들 정도로 가슴을 드러내는 패션이 유행했다. 데콜테라는 가슴을 드러낸 패션이 등장한 배경에는 신분을 한눈에 구분하기 위한 욕구도 담겨있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베르사유의 소 트리아농 궁(Petit Trianon)을 장식하던 과일그릇은 여성의 유방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 그릇은 프랑스의 소설가 형제 공쿠르 형제(Goncourt Frères, Edmon Goncourt & Jules Goncourt)의 전언에 따르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방을 그대로 석고로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여왕의 젖가슴 형태로 만들어진 그릇에는 탄생의 설화가 있다. 어느날 궁전에 모인 귀부인들 사이에 누구의 가슴이 가장 아름다운가 하는 얘기가 오가다(당연하게도) 만장일치로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슴이 1등을 차지했다는 것, 이 ‘미의 대회’ 우승을 기념해 왕비는 자신의 가슴을 석고로 떠서 예술적인 모형을 만드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이처럼 절대주의 시대에 극단적으로 발달한 가슴노출은 이전 세대와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게 역사가들의 설명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여자들은 자신의 가슴을 남자들의 눈앞에 드러냈지만, 절대주의 시대와는 그 의미가 달랐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자연 그대로(의복의 부족이나, 수유의 의미를 띄며) 드러냈다면 절대주의 시대에는(성정 의도를 가지고)도발적으로 노출시켰다는 데서 차이가 있다는 설명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저절로 드러난 유방을 여자들이 손이나 얼굴을 가리지 않듯, 자연스런 표현의 일환으로 가리지 않았다.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여성의 유방은 옷속으로 꼭꼭 숨어들어 갔다. 하지만 절대주의 시대에 들어서면 한번 감췄던 유방을 가슴이 파인 의복형태인 데콜테(Decolletee)가 발달하면서 의도적으로 다시 드러내게 됐다는 게 풍속사가 에두아르트 푹스(Eduard Fuchs)의 분석이다.
특히 이 시대에는 코르셋을 통해 가슴의 형태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방식을 취했다. 여자들은 상의를 될 수 있는 한 넓게 깊게 팠고, 심지어 영국 찰스 2세의 궁정에서는 궁정 여인들의 복장이 모두 가슴을 완전히 드러낸 것이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가슴노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목걸이 역시 여성 가슴에 남자의 눈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고, 특히 황금 십자가 형태 목걸이가 인기를 끌면서 일부 ‘도덕적인’ 성직자들은 이를 신에 대한 모독으로 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여인들은 당당하게 가슴을 드러낸 채 거리를 활보했고 심지어 예배를 보기위해 교회로 향했으며, 일부 고식적인 성직자들은 교회에 그 같은 복장을 한 채 오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같은 풍습은 강력한 세를 얻었고, 17-18세기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선 오히려 일부 교단의 수녀들까지도 가슴을 드러내놓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 수녀원이 귀족집안 재산분할 방지를 위해 딸들을 보내는 처리장이거나 명문 귀부인들이 한때 이런 저런 이유로 숨어 살거나 했던 귀족계급의 기숙사 같은 것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그다지 놀랄만한 일도 아니라는 시각이다.
이같은 가슴노출은 시대가 흐르면서 발전하는 양상을 보였다. 유방의 아름다움을 노골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은 17세기 하반기에 시작되어서 18세기 초가 되면 목 밑으로 2졸 이상 노출하는 게 예의없는 일이 됐지만, 이어 18세기 중엽에는 어깨와 가슴 대부분을 매우 품위있게 노출시키는 의상이 유행하는 형태로 발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이같은 가슴이 한껏 파인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당시 지배계급은 하층계급 여인들이 가슴이 깊이 파인 옷을 입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상류계급 여인들은 한 눈에 미천한 민중과 구별되기 위해 가슴을 드러내는 눈부신 특권을 독점하려고 했다. 가슴골 패션이 유행한데는 엄격한 신분 구분에 대한 욕구와 당시의 사회 경제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 첫날밤을 치루지 못했다는 이러한 사정을 전해들은 앙투아네트 왕비의 오빠인 요셉 II세(Joseph II)는 매우 걱정이 되어 빈에서 일부러 파리로 와서 루이 XVI세를 설득해 외과수술을 받게 했으며, 그 결과 사나이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왕비는 비로소 결혼 7년 만에 남편과 첫날밤을 치를 수 있었는데, 그 다음날 왕비는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에게 기쁨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루이 XVI세의 병이 고쳐짐에 따라 부인과의 결혼생활도 원만해졌고 왕비는 임신이 되었다.
그러나 왕비의 사치와 낭비벽은 점점 더 심해만 갔다. 그래서 후세 역사가들은 단지 원만한 결혼생활을 할 수 없었던 것만이 왕비의 사치와 낭비벽의 원인이 아니라, 그녀의 성격상 문제 혹은 어려서부터의 엄격한 종교교육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고도 주장한다. 하여튼 그녀는 혁명 전 귀족문화를 대표하는 향락생활을 주도했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의 혁명 세력에서는 왕비를 ‘적자부인(赤子婦人)’이라고 비난했고, 혁명이 성공되자 왕비를 단두대에 올려놓고 처형했던 것이다.
앙투아네트 왕비는 비록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녀가 남긴 것이 있다면 그녀의 탐스런 ‘수밀도잔’이다. 즉 그녀는 베르사유 궁내에 ‘꿈의 궁전’이라는 별장을 지어 자기만의 작은 왕국을 만들었다. 건물은 작았지만 여기엔 가장 프랑스적인 취미를 살린 매혹적인 로코코 예술의 진수로 가득 차 있었다. 한편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영향을 받은 왕비는 낙농장과 젖 짜는 여자, 어린 양으로 가득 채우고 환상적인 전원생활을 누렸다.
그러면서 젖을 먹이는 어머니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세브레라는 제작자에게 두 개의 도자기 잔을 한 쌍으로 하는 완벽한 유방 모양의 잔을 만들게 했다. 당시 ‘꿈의 궁전’에 모인 귀부인들과 벌인 유방콘테스트를 해서 언제나 자기가 1위를 하자 자기의 유방 미의 영광을 길이 남기기 위해 석고로 유방을 캐스트 해 유방의 잔을 만들게 했다는 것이다.
즉 이 유방의 잔은 앙투아네트가 결혼하고 7년간의 처녀생활을 할 때 욕구불만이 최고도에 달했을 20세 무렵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반구형의 잔은 젖꼭지를 밑으로 한 유방을 세 마리의 산양의 머리로 잔을 떠받들고 있는데 숫 산양은 남성 욕망의 심벌로 이를 본 프로이드 박사는 ‘처녀처(處女妻)’의 욕구불만이 잘 나타나 있다고 평했다고 한다. 이 유방 잔의 모양은 상당히 예쁜 것으로 매우 건강하고 혈기가 넘치는 유방으로 표현되었는데 특히 유두부의 표현은 의학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Marie-Antoinette’s ‘bol-sein’
‘작은 요정’으로 사랑받던 그녀가 지금까지 남겨놓은 것은 그녀의 유방잔 뿐이다. 그러나 유방의 수난사도 만만치 않다. 유방에서 벗겨낸 피부로 책을 장정했는데, 두 유두가 알맞게 책표지의 특징 있는 모양을 만들어 내도록 했다고 한다. 또 고대 종교의 참회의식으로 유방을 가시쇠사슬로 묶어 죄이거나 바늘, 못, 가시 등으로 유방에 고통을 가해 참회시키던 적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혹은 러시아의 스코프첸 종파의 여성들은 육욕을 억제하기 위해 시뻘겋게 달군 가위로 유방을 손상시키거나 아예 제거했다고도 한다. 마치 활을 쏘고 창을 던질 때 방해되지 않게 오른쪽 유방을 불로 태워서 없앴다는 아마존 여인들을 연상시키는 행위를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했던 것이었다.
어느 누군가 샴페인을 마신 후 “별을 마신다”고 표현해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 머리 위로 별이 쏟아질 것만 같은 상상을 펼친 적이 있다. 잔에 가득 차오르는 ‘별’들의 조각을 보고 있으면 그 신비로움에 자못 호기심도 인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시대의 명사들 역시 샴페인 예찬에 빠졌으니 그들의 선택엔 우리와 같은 이유가 있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샴페인은 유난히 다른 어떤 와인보다도 역사 속 명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다른 이들을 유혹에 빠뜨리던 그들조차도 샴페인의 유혹에 넘어가 그들의 삶 속에 고스란히 샴페인을 담았던 것이다.
먼저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당시 절대왕정 말기의 재정 궁핍을 고려하지 않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며 세간에 좋지 못한 평판을 남겼던 그녀가 프랑스 혁명 당시 단두대에 오르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다. 그녀를 단두대로 끌고 가기 전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말하시오.”
그러자 그녀가 답했다.
“샴페인 한 잔과 파테 드 푸아그라(pâté de foie gras)를 먹고 싶다.”
18세기에 처음 샴페인을 접한 그녀는 기포가 주는 달콤한 맛에 반해 왕실에서 열리는 모든 만찬에 샴페인만 내놓게 했고, 궁중 파티를 준비하면서 자신의 가슴 모양을 본뜬 잔을 내놓으라고 지시했다는 후문이다.
남태우 교수:중앙대학교(교수)▸중앙대학교 대학원 문헌정보학과 박사▸2011.07~2013.07 한국도서관협회 회장 ▸2009.07 한국도서관협회 부회장▸2007.06~2009.06 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 ▸2004.01~2006.12 한국정보관리학회 회장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