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수밀도형 술잔 이야기⑮

문제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프랑스Château de Breteuil 소장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수밀도형 술잔 이야기⑮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The Affair of the Diamond Necklace)(上)

南台祐 교수의 특별기고

 

살아있는 사람의 피부에 글자나 그림을 그리는 타투를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아직도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잔인한 원시인들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잔인하고 몽매한 것은 인체의 피부를 사용하여 책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최근 영국에서 발견되었다는 인피 장정의 책은 그 역사가 만만치 않게 길다. 전쟁에서 인디언들이 적의 머리가죽을 벗겨 쓰고 돌아오는 이른바 스칼프 의식은 적을 ‘짐승’으로 생각했었듯이 곰이나 사슴을 사냥한 뒤에 그것들의 껍질을 옷으로 뒤집어쓰는 것의 동일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었을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 전쟁에서 적장의 해골로 승리의 축배를 들던 것이나 적의 가죽으로 또는 그 뼈로 북이나 피리를 만들어 불었던 잔인한 행태들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인텔리전트 한 책 제본에도 인피를 사용하기 까지 했다는 것은 가공할 일이라 할 것이다.

고대 앗시리아 사람들은 전쟁에서 포획한 포로들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 도시의 성벽에 걸쳐 전시를 했다. 처형 방법에서 사람의 머리를 잘라 성벽에 걸어 효수했던 우리나라의 역사는 근대까지 이어져 왔다. 그런데 더욱 잔인한 것은 인간의 피부를 생활도구로 사용한 것이라 할 것이다. 책의 장정을 인피로 했던 관습은 중세시대 때까지 이어져 왔고 13세기에는 특히 성경책과 교황의 교서도 인간의 가죽에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인피제본의 책들의 그 인피가 저자의 피부로 된 것도 있고 애인의 피부로 된 것도 있어 인피제본 책의 역사는 그 동기가 더욱 흥미롭다. 19세기의 인피제본은 귀족계급 사회에서 로맨틱한 한 방법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마치 우리나라 전통에서 연분을 나눈 기생에게 어금니를 뽑아준 것이나 피부는 아니지만 여자의 치마에 일필휘지 연정의 시귀를 써준 것과 같은 의미랄까.

1818년 프랑스 도서관에서 판매한 책들 가운데 시선을 끌었던 것은 그 중 두 권의 책이 여자의 피부로 장정한 것이었다.

알벗 버켓(Albert Bouckaert)의 책 <Sexology>(1949)의 480-2쪽의 ‘Bookbindings of Human Skin’에 세인트 애그니스 백작부인은 아름다운 어깨를 가졌는데 그 어깨피부가 그녀의 연인에게 주어졌다. 그녀의 뜻에 따라 프랑스의 유명한 천문학자인 카밀로 플라마리온(Camille Flammarion)은 그 여성의 어깨 가죽으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이라는 책을 장정했다. 이 책은 그녀의 어깨에 그 천문학자의 얼굴이 타투로 새겨 그로 하여금 잊혀지지 않는 여자가 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의 내용에는 그 인피를 제공한 사람이 여자란 것만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쥬비시(Juvisy Observatory) 도서관에 아직도 남아 있다. 2-3세기 전까지만 해도 살인자의 가죽으로 살인 재판 기록을 제본하거나, 해부학책을 해부 대상 시체의 피부로 제본하기도 했던 것은 단두대에 공개적으로 목을 자르던 잔인함과 어딘가 통해 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The Affair of the Diamond Necklace)

프랑스 대혁명의 거대한 흐름 한 가운데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신화가 존재한다. 온갖 사치와 노름으로 프랑스 재정을 휘청거리게 만들었던 ‘적자 부인’, 남편인 황제 루이 16세의 성적 무능력을 비웃으며 갖은 성적 방종에 탐닉한 ‘암캐’, 외교 분쟁에 끼어드는 정치 간섭으로 나라를 망친 ‘오스트리아 계집’, 마리 앙투아네트의 신화는 바로 이런 치욕적인 저주를 받는 ‘부정적 신화’다. 그 이름은 무절제와 방종으로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몰락시키고 결국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대혁명의 원흉’으로 각인되어 있다.

프랑스 혁명을 불러온 직접적 원인은 프랑스 왕실의 재정파탄이었다. 태양신 아폴로를 흉내 낸 별명 태양왕(Le Roi Soleil) 루이 14세 이래 상비군을 창설하고 유지하는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다. 게다가 베르사유 궁전 건축으로 국고는 바닥을 드러냈다. 무려 36,000명의 인부와 6,000마리의 말을 동원해서 지은 베르사이유 궁전이다. 태양의 신 아폴로를 표방하던 그답게 하찮은 평민의 막대한 희생(사고와 말라리아)에도 불구하고 무려 24년 동안 궁전을 지었다. 궁정 안에는 300m 길이의 거대한 복도, 회의실, 도서관, 황실용 개인 아파트, 휴식용 거실과 개인 예배당 등 좁은 복도, 계단, 벽장과 부엌으로 얽혀있다. 루이 14세는 1638년~1715년 그리고 4살 때부터 (비록 어머니와 재상의 섭정을 받기는 했어도) 왕에 즉위했으니까 무려 72년 동안 유럽의 최강대국 프랑스를 통치했고 유럽 역사상 가장 긴 통치기간으로 재임했다. 그는 당시에도 작은 키였던 163cm 정도였고 다리근육에 자신이 있어서 항상 타이트한 스타킹을 신고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좋아했다.

루이는 상당히 많은 여성과 불륜을 저질렀지만, 어릴 때에 결혼한 스페인 공주 마리아 테레사와의 혼인관계를 지킨 것도 재미있다. 밖에서 어떤 짓을 했던 지간에 아내 옆에서 잠들었고 한 달에 두 번은 성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여왕이 고해를 했기 때문에 알려진 사실이다. 기록에 의하면 본능이 부르면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주변에 야심만만한 기혼여성의 왕의 신호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명의 메트레상티트르(Maitressess, 왕의 정부)가 유명했는데, 루이즈 드 발리에르(Louise de La Valliere), 마담 드 몽테스팡(Madame de Montespan) 그리고 마드모아젤 드 퐁탕쥬(Mademoiselle de Fontanges)등이 바로 그녀들이다.

경제가 파탄 지경이었음에도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1740~1748)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패배해 독일 동부의 비옥한 슐레지엔을 빼앗긴 오스트리아가 그곳을 되찾기 위해 프로이센과 벌인 전쟁 ‘7년 전쟁(Seven Years’ War, 1756~1763)’ 등 전쟁은 계속됐다. 급기야 루이 16세가 미국 독립 전쟁에 참여하면서 재정 파탄은 절정에 이른다. 민중의 분노는 왕실을 향했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와 향락의 주범으로 몰렸다.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악의적 평판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있다. 1785년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다. 라 모트 백작부인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칭해 고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가로챈 사건이다. 재판을 통해 진범이 가려졌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무 상관없음이 밝혀졌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침전 상궁이었던 캉팡 부인 회고록을 보면 “루이 16세는 이 목걸이를 왕비에게 선물하고자 했으나, 왕비는 필요하지 않다며 확실하게 거절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이러한 재판 결과를 믿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목걸이를 원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왕실을 향한 분노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로 쏠렸다.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역대 왕조와 비교할 때 특별히 더 사치스럽지 않았다. 루이 15세의 정부(情婦)였던 마담 뒤 바리(Madame du Barry)가 사용했던 도자기 티세트는 현재 가격으로 수천 만 원을 호가했을 정도다. 무절제한 낭비는 역대 왕조 모두 껴안고 있던 문제였던 셈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썼던 왕실 예산은 프랑스 전체 예산의 3%인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중 10% 정도만 썼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재정 파탄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 때문이 아니라 무리한 대외전쟁과 경제정책의 실패, 역대 왕조의 낭비가 누적됐던 결과였다. 검소한 왕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지나친 사치를 부리지도 않았다는 얘기다.

지금도 회자되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는 말은 당시 혁명군이 악의적으로 부풀린 말이다.

이와 비슷한 표현은 사회계약설로 유명한 루소의 <참회록(Les Confessions)>에 처음 등장한다. 루소가 루이 14세의 왕비인 마리 테레즈(Marie-Thérèse de France, 1667~ 1672)의 “빵이 없으면 파이 껍질이라도 갖다 주라”는 말을 인용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책에서는 백성이 굶주린다는 말에 마음 아파하는 왕비의 측은지심을 표현하기 위해 나온다. 마리 테레즈가 마리 앙투아네트로, 측은함의 표현이 철없고 인정머리 없는 모습으로 왜곡돼 대중 속에 퍼진 거다.

왕실을 향한 분노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쏠릴 때 왕실이 민중의 신뢰를 잃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1791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려다 발각돼 파리로 압송된다. 국왕의 권위는 실추됐고 민중의 왕실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커졌다. 그나마 일부 남아있던 혁명군 안의 친(親) 국왕파 세력도 이를 계기로 돌아서게 된다. 이듬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전쟁이 다시 벌어졌다. 프랑스는 연이어 패배했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친정 오스트리아에 정보를 넘기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민족주의 열기로 가득했던 프랑스 민중에게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를 꼬드겨 프랑스를 적국에 팔아넘긴 반역자로 비춰지기에 충분했다.

혁명은 대개 급진적이고 파괴적이며, 잔혹하다. “1793년 과격파 자코뱅파의 수장인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의 처형을 주도했다. 공포 정치는 1년 사이에 1만 7,000명을 단두대로 보냈고, 지방 반란 진압 과정에서 수만 명 이상을 학살하였다”고 적었다. 절대왕정의 몰락과 함께 마리 앙투아네트도 단두대로 보내졌다.

사건의 발단은 루이 15세 때인 17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루이 15세는 자신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Madame du Barry, 1743~1793)을 위해 파리 최고의 보석 세공사인 뵈머와 바쎈즈(Boehmer and Bassenge)에게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다이아몬드들을 모아서 목걸이를 만들어 오라 명했다. 뵈머는 신바람이 나서 무려 600개의 값비싼 다이아몬드로 목걸이를 만들었는데, 그만 루이 15세가 갑자기 천연두로 사망하는 바람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구입해 줄 사람이 없어져 버렸다. 더구나 뒤바리 백작부인도 수녀원으로 추방을 당하고 만다.

루이 15세의 마지막 애첩, 본명은 잔 앙투아네트 베퀴(Jeanne Antoinette Bécu), 뒤바리 부인(Madame du Barry)이다. 혹은 ‘뒤바리 백작부인(Comtesse du Barry)’이라고 부른다. 같은 평민 계급이라고 해도 부유한 집안의 딸로 교양을 갖추었던 마담 드 퐁파두르와는 달리 원래부터 창녀였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신분이 낮았다. 그녀의 후견인이 된 바리 백작은 처음부터 그녀를 국왕의 애첩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며, 실제 그녀를 본 국왕은 곧 매료되어 그녀를 베르사유 궁전에 들이게 된다. 다만 국왕의 애첩은 법도상 반드시 기혼녀여야 했고, 그래서 바리 백작은 그녀를 자신의 남동생과 급히 결혼을 시켜 그녀를 입궁시켰다.

1786년 어느 날, 오색찬란한 불빛 속에서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무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왕과 귀족들이 거의 모두 참여한 성대한 무도회에 잔느 랑송은 뒤바리(DuBarry) 자작의 파트너로 참석했다. 술과 춤으로 무도회의 밤은 더욱 음탕하게 물들어갔다. 이곳에 루이 15세가 홀로 나타나 춤추고 술 마시는 여인들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이미 루이 15세는 4년 전에 왕비를 잃은 상태였다.

당시 잔느 랑송은 악녀로 알려진데다 남자를 늘씬한 몸으로 휘감고 색을 써버리면 웬만한 남자는 땀으로 목욕을 하고 기진맥진해 하루 이틀은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루이 15세는 이런 색녀에 걸려 백성들의 비난에는 귀를 기울리지 않았다. 아예 그는 다른 사람의 비판과 충고에 귀를 기울일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라는 나라와 백성들을 소유한 절대 군주였지만 사치와 여색으로 한 평생을 살다가 천연두에 걸려 죽음에 이른 패륜아였다.<다음호 계속>

◇ 필자 남태우 교수 경력:▴전남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중앙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중앙대학교 중앙도서관장▴중앙대학교 교무처장▴중앙대학교 문과대학장▴한국정보관리학회장▴한국오픈엑세스포럼회장▴한국 문헌정보학교수협의회장▴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한국도서관협회장▴중앙대학교 명예교수(현재)▴현재 건전한 음주문화 선도자로 활동하고 있음

◇ 음주관련 저작리스트:▴비틀거리는 술잔, 휘청거리는 술꾼이야기(1998)▴주당별곡

(1999)▴술술술, 주당들의 풍류세계(2001)▴알코올의 야누스적 문화(2002)▴음주의 유혹, 금주의 미혹(2005)▴주당들의 명정과 풍류(2007)▴홀 수배 음주법의 의식과 허식(2009)▴술잔의 미학과 해학(2013)▴은자의 명정과 청담세계(2013)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