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민의[삶과 맥주②]
조화의 맥주 ‘캘리포니아 커먼’
파주 공동육아 어린이집 ‘반딧불이’에서 아이들 아빠사이로 만난 이수용과 나는 배짱이 맞고 같은 단지에 사는 인연도 있어 퇴근 후 집 앞에서 자주 술잔을 기울이던 맥주친구였다. 대기업의 오줌도 만원에 네 캔 세계맥주도 가리지 않고 마셨다. 그 부담 없는 술자리에서 우리는 나중에 재미있는 일을 같이 하면서 나이 들면 멋지겠다고 주정하곤 했다.
시절인연은 질기고도 정확한 것인지 몇 년 후 우리는 실제로 같이 수제맥주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천재양조가 조쉬를 만난 것은 우리의 행운이고 회사에 좋은 사람들이 모여준 것은 우리의 기쁨이다. 맥주회사라고는 하지만 정부가 정한 최소생산량을 겨우 맞추는 시설이었고, 우리는 모르는 것을 고생고생 배워가며 거북이처럼 천천히 나아갔다. 건축과 경영을 전공한 이수용은 단순명쾌한 디자인 감각과 꼼꼼한 사업실행력을 갖추었기에 대표를 맡았고, 나는 그보다 헐렁한 성격으로 컨텐츠 관련 일 등 대표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성격으로 부딪히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름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편이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퀄리티를 최우선으로 하며 재미를 추구하겠다는 처음의 약속은 결코 놓지 않으려 한다. 서울브루어리에서 내놓는 맥주는 어떤 스타일이든 믿고 마실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싶으니까.
맥주는 큰 틀에서 ‘라거’와 ‘에일’ 두 종류로 나뉜다. 라거는 보통 맑은 바디와 깔끔한 맛을 추구하며 대량생산과 유통에 적합하다. 탱크 바닥에서 저온발효로 만들어진다.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맥주의 대부분이 라거다. 카스도 하이트도 클라우드도 그리고 호프집의 500 생맥주와 편의점의 아사히, 칭따오, 하이네켄도 모두 같은 스타일의 라거로, 그 중 맛이 좋으니 나쁘니 하는 것은 원재료의 질이나 생산관리에서 섞여 든 잔맛의 차이에서 오며 아주 차게 해서 마실 경우 입으로 감지할 수 있는 풍미의 차이는 미미하다. 애초에 깊은 풍미를 추구하는 맥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깔끔하고 시원함이 포인트로 덥고 힘든 날 꿀꺽꿀꺽 마시기에는 최고다.
반면 에일의 매력은 다양성이다. 맑은 것부터 막걸리처럼 탁한 것까지 있다. 쓰고 달고 시고 알싸한 맛을 내며 보통 그 풍미들이 여러 조합으로 뒤섞여있다. 희미한 빛깔부터 노랗거나 붉거나 진한 갈색과 검은빛을 내는 맥주들이 있다. 에일효모를 사용하면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에서 빠른 발효가 일어나고 숙성기간도 짧기 때문에 다양한 홉을 투여하거나 커피, 카카오, 바닐라, 각종 과일같은 부재료를 적절히 사용해 다양한 풍미를 끌어낼 수 있다. 다만 대량생산과 유통에 있어서는 라거보다 약간 불리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대개 크래프트 브루어리의 주종은 ‘에일’이며 대형업체의 주종은 ‘라거’다.
이쯤에서 한 가지 소개하고 싶은 맥주가 있다. 미국 서부에 금광이 발견되어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가던 골드러쉬 시대, 오랫동안 미개척지로 남아있던 캘리포니아에 새로운 도시들이 하나 둘 생겨난다. 힘든 노동을 끝내고 저녁에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이 맥주를 찾지만 어쩐지 동부에서 양조하던 방식은 캘리포니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기온이 높기 때문에 저온에 익숙한 라거효모가 제대로 발효를 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날은 덥지, 일은 힘들지, 맥주는 없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맥주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모든 것을 이겨내는지 여러 번의 실패 끝에 결국 라거효모를 이용하되 에일처럼 상면발효하는 기술을 찾아내 맥주양조에 성공하게 되는데 훗날 그 맥주는 ‘캘리포니아 커먼’이라고 불린다. 막힌 곳에서 돌아서지 않고 도전하여 뚫고 나가는 힘, 최악의 양조환경에서 크래프트 브루어리의 정신을 구현해 낸 수제맥주 선구자들이 먼 옛날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진한 갈색 바디에 미세한 거품이 많이 올라오는 ‘캘리포니아 커먼’. 이 맥주를 마셔보면 에일같은 깊은 풍미로 시작되지만 라거처럼 끝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첫맛은 쌉쌀하면서도 약간의 달착지근함과 함께 여러 가지 풍미가 느껴지다가 끝맛은 깔끔하게 딱 떨어지며 잔을 내려놓으면 입안에 희미한 숲의 향이 남는다.
한 잔 안에 에일과 라거의 특징을 모두 갖춘 것인데, 현재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서울브루어리에서만 생산하고 있다. 우리는 상반된 두 가지 특성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에 깊은 흥미를 느꼈고 처음 생산할 맥주로 바로 이 ‘캘리포니아 커먼’을 선택했다. 애초에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시작한 작은 회사로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꾸려나갈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다른 사람, 다른 의견과의 대립으로 생각이 복잡할 때 양조장을 찾아 이 맥주를 한 번 시켜보자. 어쩌면 꿀꺽꿀꺽 마시고 잔을 탁 내려놓는 순간 ‘아, 이런 식의 조화도 가능하구나’ 하는 통찰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여전히 상대를 이해하지 못해도 그 존재를 인정하는 수준에서 스트레스는 가고 미묘한 조화가 찾아올지도. 게다가 뭐니뭐니해도 이 맥주는 지독히 맛있다.
(‘삶과 맥주’ 연재는 다양한 국내 수제맥주에 대한 소개와 감상을 통해 맥주문화의 변화를 함께 느껴보는 자리로 언제나 퀄리티를 지향하는 ‘서울브루어리’와 ‘삶과 술’의 공동기획입니다.)
작가소개:
▴장성민▴1975년생 약사▴서울브루어리 부대표▴2016년 여행에세이 ‘이렇게 일만 하다가는’ 출간▴2017년 아무튼 시리즈 3권 ‘아무튼 게스트하우스’ 출간▴현재 파주에서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살며 통일이 되면 누구보다 먼저 북한을 여행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