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자연의 신 박쿠스의 선물이다
박정근
(문학박사, 대진대 전 교수, 소설가, 극작가, 시인, 황야문학 주간)
‘술은 신의 최고의 선물이다’라고 흔히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빠지지 않고 술이 등장한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살아왔고 거기서 우연히 술을 발견하게 된다. 술을 마셔보니 하루의 피곤을 풀어주고 두려움이나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시켜준다.
또한 한동안 먹기 위해 온갖 일을 해야만 하는 세상이었는데 잠시나마 일에서 벗어나 일상의 속박에서 풀어주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술을 통해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술이 가진 디오니소스적 효과로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우정과 사랑을 돈독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인간사회의 갈등이란 대개 지나친 소유욕에서 기인한다.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관용이 있다면 갈등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술에 취하면 자아의 경계가 풀어지면서 사고의 영역을 타인이나 공동체로 확장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술을 함께 마시고 이기심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타협과 양보로 조정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필자에게 술을 사랑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아직도 인터넷을 이용해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일을 한다. 외국과 정보를 주고받는 일이라 하루 종일 컴퓨터와 씨름을 해야 한다. 그는 나이 칠십이 넘어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산다.
하지만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하는 생활이 답답하기도 하다. 대신 그는 가끔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밤늦도록 술을 즐긴다. 그 자리에 단골로 끼는 친구가 바로 필자이다.
필자의 친구는 멋진 습관을 가지고 있다. 가끔 일을 마치면 한 밤중에 손전등을 들고 북한산에 올라간다. 어둠 속에서 피어있는 산꽃을 보기도 하고 애절하게 우는 밤벌레 소리도 듣는다. 일에 지쳐있었다가 비로소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격할 수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술맛이 더욱 당기기 시작한다. 쌍문동 아파트 값이 오르지 않아도 북한산 아래 사는 덕분에 북한산을 그의 정원으로 삼아 사는 삶이 더욱 값지다는 친구의 고백을 들으며 마시는 술은 가히 환상적이다.
또한 술은 과거를 망각하게 하는 효과도 있다. 지나간 서운함이나 원한을 오래 간직하면 그의 삶은 피폐해지고 우울해진다. 술을 마시면 과거의 상처와 스트레스를 망각하게 하거나 감소시켜준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괴롭히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을 마신다. 갈등을 가졌던 자들이 술을 마시며 과거의 서운함을 토로함으로써 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술은 인간에게 갈등과 복수 대신에 관용과 용서의 열쇠를 준다.
뿐만 아니라 술은 인간에게 용기를 준다. 술을 마시고 사랑을 고백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는 것도 술이 주는 용기를 이용한 덕택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싶지만 용기가 없는 남성들은 술을 적절하게 마시는 자리를 이용한다. 남성에게 고백할 수 있는 용기뿐만 아니라 여성들은 남성의 크고 작은 흠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을 수 있는 관용도 제공한다.
결혼을 앞둔 남녀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상대를 고르는데 물질적이고 계산적인 마음이 작동한다.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런저런 이유로 상대방과의 진정한 결합이 불가능하다. 결국 선을 수십 번 보아도 성에 차는 연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남녀가 적당하게 술을 즐기는 자리라면 이성보다 열정이 발동하여 작은 흠 정도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흠보다 상대방의 매력을 더 찾아감으로써 결합에 성공할 수 있다. 이 과정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술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후기작 <태풍>을 읽어보면 술에 관한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태풍으로 알론소왕 일행을 태운 배는 귀국하다가 태풍을 만나 파선한다. 그들이 겨우 도착한 섬에는 캘리번이 살고 있다. 왕의 일행은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성에 상륙한다. 선원들도 이리저리 방황하게 된다. 파선된 배에서 가져온 술통을 가진 인물이 스테파노와 트린퀼로이다. 그들은 섬을 방황하다가 이상한 장면을 목격한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 큰 판초 밑으로 기어들어간 원주민 캘리번을 발견한 것이다.
스테파노와 트린퀼로의 눈에 캘리번은 인간이 아닌 일종의 괴물에 불과하다. 그들은 원주민인 캘리반을 일종의 동물로 바라보며 마음대로 악마 화한다. 이 장면은 영국인이 비문명화된 제3세계인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은 캘리번을 영국으로 데려가 시장에서 구경거리로 삼으면 돈벌이가 될 거라고 말한다. 그들의 사고는 제국주의적인 것이며 오리엔탈리즘의 잔재인 것이다.
스테파노는 천둥과 번개에 놀라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떠는 캘리번에게 술을 몇 모금 마시게 한다. 이 순간 캘리번에게 술은 놀라운 효과를 발휘한다. 술에 취한 캘리번은 천둥과 번개 등의 자연적 현상에 대한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섬에 도착하여 캘리번에게 언어 등의 문명적 도구를 전해주는 대신에 섬을 식민지로 삼은 프로스페로의 마술에 대해서도 저항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부여한다. 그는 술을 맛보게 해준 스테파노를 단숨에 신으로 숭배한다. 캘리반에게 술은 지금까지 어떤 것보다 값지게 인식된 것이다.
캘리번은 스테파노를 부추겨 자신을 문명화시켜주는 대신에 자신을 비롯한 섬을 마술을 이용해 독재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프로스페로를 제거하자고 설득한다. 캘리번은 그 보답으로 섬의 온갖 보물이 숨겨진 곳을 알려주겠다고 유혹한다. 물론 그들의 반란은 실패로 끝나지만 캘리반에게 술의 매력이란 엄청난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요즘 식민시대의 일본의 역할에 대해서 논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은 자원탈취를 위해서 건설했던 철도나 도로가 한국의 근대화에 엄청난 혜택이었다고 떠들어댄다. 그리고 일부 친일학자들이 그들의 주장에 부화뇌동하여 위안부나 징용에 대해 한국인이 자원한 것이라고 왜곡하기도 한다. 친일주의자들은 셰익스피어가 그린 캘리번의 저항적 의식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캘리반이 술을 마시고 프로스페로에게 저항하며 부르는 자유의 노래를 시로 써보고자 한다. 이것은 술이 가지는 저항과 해방의 의미를 〈캘리번의 노래〉로 재현해보려고 한다.
이제 자연으로 돌아가려네
문명인들이 문명과 언어로 묶어놓은
구속의 줄을 끊어버리고
해방의 세계로 가려네
밤낮으로 악몽처럼 억누르는 문명의 속박들
모두 버리고 마음껏 술을 마시고
노래하는 자유의 세계로 탈주하여
완전한 자유를 누리려고 하네
화려한 옷이나 멋진 저택도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디오니소스 후예들을
구속하는 보이지 않는 창살일 뿐이네
인간에게 술을 선물하신 신, 박쿠스여
그대는 인간에게 해방의 천국을 선물하여
억압하는 모든 문명에서 탈주하여
망각의 황홀함 속에서 살아가게 하라